소설 8.

거짓도 사랑할 수 있는가.

by Sabina

[일러두기:본 소설은 실화에 근거를 둔 허구입니다. 창작 소유권은 황정미에게 있습니다]


햇살이 없는 날도 있다.

부서져 내리는 햇빛이 큰 창가에서 쏟아져 들어오면 알 수 없는 두려움 따위 다 날려버리고 어느새 하나에서 열까지 버릇처럼 숫자를 세어보며 의식처럼 희망을 품곤 했다. 그런데, 오늘은 그 햇살이 없다.

층층이 보이는 회색 빛 구름 사이로 아주 멀리 숨어서 지켜보는 햇빛 만이 있을 뿐이다. 기운이 다 빠져버리고 한 여름에 솜이불을 찾고 싶을 정도로 몸이 떨렸다.

-무슨 일인데?

그녀는 의례적으로 내면의 목소리를 알아차린 듯 물었다. 아무리 서걱거리는 안부 인사를 나누고 외로워 죽고 싶을 때만 솔직해지는 대화를 나누는 친구 사이라도 그녀는 목소리 끝에 묻어나는 불길한 기운을 알아차렸다.

-네 번째 남자가 힘들게 하는 거야?

-그냥....기운이 없어. 감기 기운이 있나봐.

두 번의 이혼에도 너무 당당하고, 차가 없는 그녀 앞에서 벤츠를 모는 돈 잘 버는 친구가 네 번째 남자를 만나고 있다고 말하면 말이다.

배가 아플까...?

네 번째 남자와도 실패 할 것 같은 불길한 기운을, 몸이 아프다는 변명으로 막아버려도 그녀는 알까?

-무슨 일인데?

그녀는 급했다. 그녀가 싸온 감기에 좋은 음식은 꼬리에 꼬리를 무는 질문으로 잊혀진지 오래다.

-무슨 일이냐고? 맨드라미 보러 병풍도 갔다 왔다며? 왜 비 맞은 병든 닭 모양으로 쭈그리고 있는데?

-추워....발만 따뜻해도 살 거 같은데...

식탁 위에 던져진 그녀가 싸온 음식 봉투를 뜯으며 그녀가 던지는 질문을 막아버리고 싶었다. 그녀는 어떤 마음으로 음식을 싸 온걸까. 내가 잘 살기를 바랄까. 그녀는 내가 살아가는 방식이 마음에 들까.

대화가 피곤해지기 시작했다. 서걱거리기 시작했다.

-지난 겨울 죽어가는 나무를 아파트 정원에 내다버렸어...

-그래? 병풍도 이야기 해봐. 뜨겁게 사랑했다고 하지 않았어? 잘지내고 있는 건 맞는 거야?

'아...내가 그런 이야기도 했구나...'

-너는 제대로 알고 사귀는 거야? 그가 기르는 태오를 미워한다고 하지 않았나?

소름끼쳤다. 아픈 것에 공감하지 않는 그녀가 태오 이야기를 꺼내며 태오의 눈 처럼 빛나는 지점이 진위여부라니.

-유미야, 요즘도 너는 아무에게도 선의를 베풀지 않는 하루에 경의를 표하니? 시를 쓴다고 스타벅스에 앉아서 사람들을 관찰하고 있니? 식물이 내는 소리도 듣기 싫다며 내가 사준 화분을 받지 않았던 그 날을 기억하니?

말하고 싶었다.

그녀는 봉투에 싸여있던 음식을 식탁에 나열하면서 숟가락을 건네주며 말했다.

-내가 해결해 줄게. 고민이 뭐야?

하필이면 그 숟가락으로 먹어야 할 음식이 삼계탕이어서, 하필이면...유미가 그 닭을 뜯어주고 있어서 나는 발끝부터 따뜻해졌다.


유미야 네가 그랬잖아. "너는 남자를 모른다"고.

첫 번째 남자는 내가 팔랑대는 치마를 입고 그의 이야기에 팔랑대니까 당한 거라고 했지. 눈을 동그랗게 뜨고 대답만 잘하니까 속이기 쉬운 상대가 나였을 거라고 말했지. 결혼하고 보니 아이가 있었다는 사실에 너는 그랬잖아. "그럴 줄 알았다."

너는 어쩜 그렇게 잘 아는 거니?

두 번째 남자가 술만 먹으면 때린다고 말했을 때도 너는 그랬잖아. "그럴 줄 알았다"

나만 남자를 모르는 거니?

-언제까지 이야기 할 건데? 그러니까 네 번째 남자는 진실된 사람이 맞냐고 물었잖아?


유미야 너는 클럽에서 만난 세 번째 남자와 원나잇으로 끝나야 했다고 목에 핏대를 세우며 말했잖아. 술을 먹고 만난 가벼운 만남이 오히려 더 무게감이 있다고 말했을때 너는 말했잖아.

"개뿔, 내가 그럴 줄 알았다."


유미야, 이번에도 그런 느낌이 드니...?



태오의 까만 털이 빳빳하게 서는 날, 노란 눈이 더 선명하게 보이는 날이 있다.

커피 잔에 쌓인 그의 담배 꽁초가 수북해지면 그는 와인을 꺼내왔다. 달콤한 로제 와인을 시작으로 그가 알고 있는 철학적 사유가 과거 내면여행으로 물들어 가면 그는 도수가 높은 포트와인 베메스터를 꺼내왔다. 이제 그의 입에서는 단호한 "...다"로 끝나는 말은 없다. 격정적인 사랑끝에 실수해버린 사정처럼, 여자를 배려하지 않는 이기적인 자세만을 강조하다 알아서 쏟아져 나오는 정액처럼, 그러다 그가 좋으냐고 물었을 때, 어느새 하이, 이이데스요(はい、いいですよ。)하고 있는 눈빛을 읽었을 때 쯤인가보다.


그러고보니 그의 오른 쪽 네번째 손가락에는 이제 반지가 없다.

"엄마는 아름다웠어. 아버지에게 맞고 파란 멍이 들어도 하얗게 빛나는 피부색을 이기지는 못했지."

한 번도 만나지 못했던 그의 엄마가 자연스럽게 그려진다. 하얀 피부, 검은 드레스, 가끔은 하얀 앞치마에 묻은 토마토 케찹. 그렇게 말하지 않았는데도 그가 말하는 그의 엄마는 그렇다. 그래서 만나고 싶지 않은 사람이다.

"레고를 가지고 아주 높은 성을 쌓으면 엄마는 먹고 싶은 것을 물어봤어"

"무엇을 만들어 먹었을까나..."

진한 포트 와인에 이미 반쯤 눈이 풀려버린 나는 그의 과거여행이 지루했다.

"폭립을 먹고 싶어요...라고 말하면 미안하다 아들아 그건 어려워 라고 말했지..."

"그럼 포기했나요?"

"아니, 엄마는 캔 옥수수 콘을 따서 폭립 모양으로 만들어 왔어. 엄마는 나를 정말 좋아하고 아꼈거든. 어떻게든 비슷한 것을 만들어 왔지."

그의 입꼬리가 올라갔다. 이제는 정확히 보인다. 진한 와인에 취했어도 정확히 보인다. 그것은 웃고 있는 미소가 아니다.

"엄마는 버릴 것은 다 버리고, 찢을 것은 다 찢었어."

아마, 이쯤에서 내 손을 그의 손에 포개야했다. 이제 나는 느낀다. 슬픈 이야기가 아니라는 것을.

"집에 가야겠어요..."

"가지마"

"너무 취했어요."

"자고 가"

하필이면 비틀거리는 내 손을 잡은 그의 손이 너무 차가웠다. 오늘은 가고 싶다고 뿌리치는 용기가 바닥에 굴러있는 와인병에 채이자 와인 병들이 날카롭게 부딪혔다. 그 때 발 밑에 툭 걸렸다. 검은 털이 더 빳빳하게 서있고 노란 눈동자가 더 선명하게 보이는 태오가 내 발 밑에서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아..!" 소름끼쳤다.


"태오야..." 그의 목소리가 끈적하다. 그의 목소리에 반응을 하듯 태오는 어느새 침대 밑으로 사라졌다.

검은 색이 싫은데, 집에 가야하는데 아마 그의 엄마도 검은 드레스를 입었을 것이라고 상상하는 찰나의 생각이 다리에서 힘을 뺏아갔다.

"씻고 올게"


잠을 깨야한다. 와인 잔 사이, 식은 커피잔에서 반쯤 남아 있던 커피를 들숨으로 넘겼다. 아주 오래 씻을 것이다. 강박처럼 결벽증이 있는 사람이니까. 샤워기 물줄기 소리 사이 사이 콧노래가 들린다.


그의 방이 이제야 제대로 보인다. 연두색 형광펜을 손에 쥐고 초콜렛을 먹는 입 모양을 오물거리던 그 때 그 도서관 서가처럼 그의 책꽂이에는 책이 많았다. 아, 책만 있는 게 아니다. 작은 인형, 카메라, 머그 잔, CD와 수많은 DVD들이 책꽂이에 일렬로 나열되어 있었다. 독특한 물건도 보인다. 특이한 것은 책장이 오렌지 색이고...중간 중간 여자의 손길이...


-1950년대 독일에서 쓰던 약장이죠. 책이 많죠?


흠칫 놀랐다. 여자 목소리였다.


[네이버 카페 힐링스페이스에서 연재했던 소설입니다. 퇴고 중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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