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짓도 사랑할 수 있는가
-큰 강의 시작과 끝은 어차피 알 수 없잖아요. 하지만 슈프레강의 물줄기가 어디서 시작했는지는 알 수 있어요. 베를린은 엘베강과 슈프레강이 맞나는 지점에 있어요. 어느날, 아들이 말했어요. "엄마, 'Bearlin'이 무슨 뜻인지 알아요? '새끼곰'이라는 뜻이래요."
그거 알아요? 의미를 부여하는 순간, 달라보이는 거...베를린이 좋았어요.
그의 엄마는 너무 많이 말을 했다. 바짝바짝 타들어가는 건조한 입술에 물길을 대주고 싶은데, 그의 엄마는 임종을 앞둔 사람이 큰 복의 말을 남기고 가야 하는 빚쟁이처럼 말을 이어갔다.
-긴말 전하지 않아도 눈만 쳐다봐도 기뻐서 출렁이는 웃음을 보고 싶었어요. 슈프레강에 햇빛이 쏟아지는 날, 은빛 고기 비늘 같은 윤슬이 나를 유혹했어요. 그 때....아들이 내 손을 잡아끌지 않았다면...
어느새 그의 엄마는 '...다'로 끝나는 문장이 없었다. 나에게 경계가 없는 그녀는 짧고 어색한 관계가 무색하리만큼 우리 사이에 막혀있는 물길을 툭툭 제거해주고 있었다. 그의 엄마의 '...요'가 사랑스러웠다.
그도 더이상 엄마의 말을 막지 않았다. 그와 나는 부모의 임종을 지키며, 우리 머리에 손을 대며 복의 복을 기원해주는 손길, 맞다. 창세기에 등장하는 이삭이 장자 에서에게 주려고 했던, 동생 야곱이 뺏어갔던 그 축복권을 받고 싶은 마음으로 듣고 있었다. 나는 어느새 그의 엄마의 딸이라도 되고 싶었다. 야곱이 장자권을 뺏고 싶어서 에서 몸에 잔뜩 난 털을 모방했듯이, 나는 그의 고양이 태오가 풍기는 냄새와 공중으로 날리는 털을 참아가면서 계속해서 태오를 쓰다듬었다. 마치 내 무릎 위에서 잠을 자고 있는 태오가 나의 몸의 일부라도 된 것처럼 계속해서 태오의 목을 그루밍해 주었다.
-저 멀리 바라보는 윤슬이 눈이 부시게 아름다운데, 다리 밑은 시커맸어요. 그 새까만 강 바닥에서 남편의 얼굴이 떠올랐어요. 남편이 돌아 올 시간이 지났다는 것을 느꼈어요.
딱딱한 호밀 빵을 오른 손으로 뜯어 먹으면서 왼손에는 연두색 형광펜을 들고 있었다는 그날이다.
나는 사람과 대화를 하면 현상 뒤에 숨어 있는 본질을 예견할 수 있다. '물길을 항상 맑게 고집하는 사람과 친하고 싶다'고 말하면 그 반대의 사람에 이미 지쳐있다고 듣는다. '내 혼이 잠잘 때 가장 사랑하는 사람이 나의 얼굴을 쓰다듬어 주었으면 좋겠다'고 말하면 그런 사람 하나조차 없다고 듣는다. '그대를 생각할 때면 언제나 싱싱한 강물이 보이는 시원하고 고운 사람을 원한다'고 말하면 답답하고 거친 사람과 살고 있다고 듣는다. 내가 그런 사람이다.
딱딱한 호밀 빵조차 아껴 먹으며 땅에 흘린 부스러기 조차 주워먹었다는 그의 아버지 앞에서 아름다운 윤슬을 보고 돌아 온 그래서 눈 빛에 윤슬같은 눈물이 가득찬 그래서 안부없는 사랑에 지쳤다고 소리칠 수 있는 그날, 그의 엄마는 그의 아버지를 버렸다.
지금이 크라이막스일까, 그녀의 이야기가 절정인지 결말인지도 모르는데 주책없이 너무 많이 울어버려서 태오가 내 무릎 위에서 뛰어 내렸다.
귀가 멍멍하고 마음이 먹먹함을 넘어 숨이 가빠지기 시작했다. 그의 엄마가 남편을 죽였다고 들었는지, 버렸다고 들었는지 알 수가 없었다.
그때 태오는 어느새 그의 무릎 위로 올라갔다. 아마 그가 울고 있기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엄마...엄마는 오래 참았잖아요...
그와 그의 엄마가 독선적이고 이기적인 남자를 피해 한국으로 도망 치고 무채색 옷을 입고 무채색 가구와 무채색 침구를 쓰고 산다고 그가 덧붙인 것 같다.
그의 엄마가 손을 내밀었다. 긴 과거 여행을 마치고 돌아와서 긴 여행의 끝점에서 만난 사람이 나라서 고맙다고 했다. 그의 엄마의 손이 따뜻하지 않았다. 너무 끈적거렸다. 땀을 흘리고 나서 닦아야 하는 그 손의 끈적함이 나의 하얀 손위에 포개질 때 그녀는 말했다.
-우리 아들을 부탁해요...
-유미야, 있잖아 너에게 하지 못한 말이 있어...아이를 낳아야겠어.
-하지 못한 말이 결혼을 해보니 아이가 있다거나, 결혼을 해보니 폭력적이라거나 하룻밤 원나잇을 해보니 너를 소유물처럼 여긴다거나 그런 말은 아니지?
-유미야, 그는 나 없으면 아무 것도 못해. 아니 나는 그가 없으면 아무 것도 못해. 아이를 낳아야겠어. 말해야겠어.
-그니까 하지 못한 말이 뭐냐고?
-지난 겨울 죽은 나무를 버린 적이 있어. 마른 뿌리를 땅에 묻고서 나무의 본분대로 그렇게 세워두고 왔어. 차라리 그냥 다 버려지도록 두고 왔으면 좋은데 조금씩... 조금씩... 신경이 쓰이는 거야.
-아...그럴 줄 알았다. 넌 또 그 남자에게 넘어갔어. 넌 조금씩 조금씩 넘어 간거야. 그치?
-남 몰래 조금씩 가서 봤어. 하루는 뿌리를 더 깊게 박아주고 왔어. 눈 조차 내리지 않아서 건조한 하루의 끝에는 물 한바가지 퍼붓고 왔어.
-그니까 너는 그 남자를 변화 시킬 수 있다고 믿는 거구나. 죽은 나무가 살아날 거라고 믿는 거지? 뿌리를 박아주고 물을 주면 죽은 나무가 살아난다고 믿는 거지?
-맨드라미 씨를 품은 남자가 꽃을 피운다면?
-너는 미쳤다. 내가 그럴 줄 알았다고.
...거짓도 사랑할 수가 있을까
그는 아버지를 잃고 그의 엄마를 잃었다.
나는 진실을 잃었다.
나는 그에게 몸을 주고, 돈을 주고, 집을 주고, 차를 주고, 물을 주고, 뿌리를 박아 주었다.
지난 겨울 내다버린 나무가 연두빛 잎이 나고 연분홍 꽃이 피고 있는데 그는 맨드라미를 피우지 못 했다.
그는 1년 째 놀고 있었다. 내 하얀 린넨 침대위에는 그와 태오가 잠들어 있다.
그가 말했다.
-나는 슈프레강 교각 아래에 있는 새까만 강 바닥을 봤어. 엄마 손을 잡아 끌면서 드리우는 어두운 그림자를 봤어. 나는 무채색이 싫어졌어.
그리고 덧붙였다. 우리 집이 풍기는 하얗고 뽀얀 풍경에서 쉬고 싶다고 했다. 그리고 말했다.
-네가 뿌리는 향수는 파우더리해서 너의 살갗 냄새 같아. 부드러운 너의 살을 너의 향기가 가득한 곳에서 느끼고 싶어.
나는 그를 위해 아쿠아 디 파르마 레몬 향수를 몸 깊숙이 아주 많이 뿌리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