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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Sabina Jul 19. 2021

닭띠를 찾습니다.

백비탕을 권하며.

마흔일곱까지 꿈과 꽤 친했다. 아이들처럼 좋아하는 연예인이 나오거나, 얼굴도 모르는 낯선 실루엣이 사랑한다고 고백하는 개꿈을 꾸고 나면 '잠을 푹 못 잤다' 라며 수면의 질을 따지는 것이 고작인 그 정도로 매일 꿈을 꿨다.


남편과 헤어지려고 마음먹은 마흔일곱 그때는 자살을 언급하는 초등학교 5학년 여학생을 살리기 위해 (어쩌면 내가 살아야 했으리라.) 다시 대학원에서 상담심리학을 배울 때라 서울에서 대학원 수업을 듣고 다시 아이들을 가르치는 공간으로 달려와서 새벽까지 과외를 했으니, 달콤하거나 씁쓸한 꿈 따위는 사라진지 오래인데, 교수는 말했다.


"프로이트 꿈의 해석을 듣는 여러분, 앞으로 한 학기 동안 여러분의 꿈을 기록하고 해제해서 내면 여행을 하시기 바랍니다."


그렇게 시작했다. 어린 대학원생 사이에서 A 학점 받아보겠다고 꿈을 꿨다고 느끼는 자각이 오면 기를 쓰고 깼다. 꿈을 꾸는 시간은 대체로 일정했다. 렘수면이 끝나고 업어 가도 모르게 잠드는 시간이 지나고 얼핏 선잠이라고 기억되는 새벽녘, 아마 새벽 다섯시로 기억된다. 베갯머리 맡에 놓아 둔 노트에 비몽 사몽 글씨체로 꿈의 내용을  휘갈겨 놓은 채로 다시 잠을 청한다. (습관이 되면 아주 쉽게 다시 잠을 자거나, 앞선 꿈을 다시 이어갈 수도 있다.)

휘갈겨 놓은 꿈은 하루가 지나면 왜곡의 색을 덧입게 된다. 오전에 처리해야 했다. 무의식을 다루는 심리학 서적을 참고하고, 꿈을 해제한다. 난해하고 불안을 감지하는 꿈은 교수님께 자문을 구했다. 그렇게 한 학기를 보냈다.


그때부터였을 거다. 

누구는 꿈도 안 꾼다는데, 루틴처럼 새벽 다섯시에 눈을 뜨고 꿈의 의미를 새기며, 가끔은 프로이트가 되어 깊은 해석을 하고 다시 잠을 청했다. 세월이 흘러 쉰 다섯이 됐는데도 나의 꿈은 여전히 누군가를 위해 열려있고, 나를 위한 예지몽이 되기도 한다. 꿈을 해석할 만큼 심리학의 경지가 올랐다고 표현하기는 위험하다. 다만 꿈의 의미를 긍정의 심리학으로 풀어갈 수 있으니 불안과 걱정으로 자리잡은 사람들을 품어주기에 딱 좋은 그 정도의 해석능력이다.


이해가 부족해서 오해로 버무러진 말을 쏟아내는 사람을 꿈에서 안아주기도 했고, 힘든 삶의 원인을 모르겠다고 우는 사람을 위해 그 해결점이 보이는 꿈을 선물하기도 했다. 그러다보면, 에니어그램 머리형 나의 머리카락 숱이 줄어들 때가 온다. 너무 많이 누군가를 위해 기도하고 품어주다보면 생각의 꼬리가 꿈까지 찾아와서 "잠을 푹 못잤다'는 수면의 질을 논하게 한다. 가끔은 꿈을 기억하지 못하도록 푹 자고 싶을 때가 있다. 핑계같지만, 몸은  피곤한데 여전히 꿈을 꾸는 나에게  '꿈없는 하루'를 선물하는 마음으로 맥주를 딴다.

늦은 밤 술집에서 나오는데 주인 할머니 꽃다발을 놓고 간다며 마늘 찧던 손으로 꽃다발을 끌어안고 나오신다. 꽃다발에서 눈을 떼지 못하는 할머니에게 이 꽃다발은 할머니한테 어울리네요. 가지세요.(...)신(神)에게 가겠다고 까부는 밤은 술을 몇잔 부어주고서야 이토록 환하고 착하게 온다. -이 병률 시인. 온다는 말 없이 간다는 말 없이 중에서

아, 맥주를 마셨어야 했는데, 힘든 일과 후에 쓰러지듯 잠이 든 나는 루틴처럼 새벽 다섯시에 꿈을 꾸었다.

큰일났다. 꿈이 너무 신기하고 신묘했다.베개 머리 맡에 놓아 둔 노트에 비몽 사몽 글씨체로 휘갈겨 놓고 다시 자기에는 너무 생생하고 적나라했고 풍성했다.

꿈의 해석이 필요했다.


1시간 동안 꿈을 해제하고 네이버카페 힐링스페이스 단톡방 멤버들에게 뜬금없이 물었다.

"이 곳에 닭띠 있나요?"

나를 이해하는 사람들이 모인 공간이니, 좋은 꿈으로 귀결 된 닭과 관련된 그 꿈을 사겠다는 분들이 계셨다.



나는 사람을 살리는 직업, 에니어그램 전문가다. 요즘 그 상담사 역할을 조금 더 진하게 하고 있었다. 그러다보니 꿈에서 닭의 형상을 하고 있는, 많은 무리에서 혼자 아파하고 닭 털이 다 빠져나가고 마지막 털이 타들어가듯 아프다고 울고 있는... 그 자리에서 다른 모든 무리가 웃고 놀고 있는, 아픈 닭을 거들떠 보지도 않는 그 곳으로 막 들어가던 나는 소리쳤다.

"뭐하는 거예요! 털이 다 빠지고 있잖아요. 물을 가져오세요 아주 차가운 물을!"

이런, 현실 세계에서 큰 소리도 못 치는 내가 꿈에서 이렇게 정의로울 수가 있단 말인가. 자각몽이니 이정도의 자책도 느껴졌다.


의협심과 정의로움때문이 아니라, 목발을 던지고 그 닭으로 달려가 타들어가는 털 위로 물을 뿌리며 쓰다듬고 있는 장애인이 안쓰러워서일까. 일제히 모든 사람들이 그 닭을 품어주고 털 하나 하나를 살려주고 있었다. 해결되고 다시 날개짓을 하고 생기를 찾은 좋은 꿈이 맞다. 문제는 휘갈겨 놓은 글씨를 해제하기 전에 찾아오는 수많은 의문들이 다시 잠을 청할 수 없도록 생각의 꼬리를 만들었다.

왜 닭일까, 왜 사람의 형체가 아니었을까. 

"혹시 닭띠인가요?"

새벽 여섯시, 아직 깨지도 않은 사람들에게 뜬끔없이 물어야했다. 혹시 닭띠라면 혹시 마음이 아픈데 말하고 있지 않다면 내 꿈을 팔아서라도 해결해주고 싶었다.


신기하다. 나를 믿고 대답해주는 닭띠들은 꿈의 맥락보다 내가 걱정해주는 마음을 알고 있다. 그리고 나는 그들에게 꿈에서 마지막으로 닭을 위해 먹여주었던 백비탕을 똑같이 권했다. 임금을 살리기 위해 100번 끓이고 식히기를 반복하는 정성이 담긴 백비탕을 나는 아주 간단하게 만들어서 마시라고 권했다.  뜨거운 물을 반 따르고 그 위에 차가운 물을 따르고 섞지 말고 천천히 마시면 된다고.



꿈과 백비탕.

한바탕 소란일 수 있다.

중요한 것은 꽃다발을 바라보고 있는 술집 주인 할머니, 또 오기나 하라는 말에 온다는 말 없이 간다는 말없이 꽃 향은 두고 술 향을 데리고 가는 시인의 마음이 내 마음이라는 것을 알려주고 싶었다.


나의 꿈은 팔렸다.

내일 대장암 수술을 앞두고 있는 닭띠 친구를 둔, 막시 작가님이 나의 꿈을 샀다.


나는 안다. 그렇게 해서라도 친구를 위로하고 살리고 싶은 작가님의 마음을.

그리고 나는 안다.

새벽 녘 닭띠를 찾으면서 여기저기 백비탕을 권하는 나에게 또 다른 비법 백비탕을 안겨주는 나의 친구들이 있다는 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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