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Sabina Dec 22. 2021

우아한 독(毒)서 클럽 4.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


[일러두기] 이 글은 제가 머무는 작가의 서재 1층, 이노스 타샤와 무관합니다. 그녀는 영감을 줄 뿐입니다.





어느 날 문득 내가 잘 알고 있다고 생각했던 사람이 낯설 때가 있다. 어느 날 문득 나는 잘 한다고 하는데 그는 잘 못했다고 말했다. 어느 날 문득 나는 겸손하다고 생각하는데 그는... 어느 날 문득 나는 사랑한다고 생각했는데 그는...



어느 날 문득, 사랑하는 남녀의 이야기인 줄 알았는데, 가볍고 무거운 것의 미묘한 차이를 설명하는 철학적인 책을 만났다.





이제 나는 그녀를 사비나라고 부른다. 동갑이라는 키워드는 작가라고 부르거나 선생님이라고 부르는 호칭을 거추장스럽게 했다. 그녀는 아이의 눈을 닮은 호기심 가득하고 심지어 보호본능을 자극하는 문장으로 어느새 오래 품고 있던 속마음을 나에게 다 말했다. 사비나 그녀가 독서 멤버로 함께하고 싶은 사람들을 데리고 올 때마다 내 마음에 가득한 생각은 일대일로 마주하고 그녀와 책을 나누고 인생을 나누고 아무에게도 익숙해지지 않아서 잘 울지 않은 나를 그녀에게만 헐어버리고 싶은 내색을 했다.



"저는 사람들과 친해지기까지 시간이 걸려요. 회원들과 어색한데..."



내가 하고 싶은 말을 누군가의 입으로 들었다. 새로 모임에 합류한 그녀는 내가 카페를 열기 전, 나만의 성에서 아침이 아침을 지배하고 밤이 밤이 지배하는 그래서 겨우 노트에 끄적인 비밀일기, 그 비밀일기의 활자를 닮아 있었다.



"속도 차이를 수용합니다. 그 누구도 빠르거나 느린 것에 질책하지 않습니다. 말하고 싶지 않으면 그냥 들어도 되고, 눈물이 앞서면 울어도 됩니다. 이불 속에 들어가서 울었던 기억까지 다 말할 수 있는 날, 사랑하는 사람을 생각하면 길을 가다가 문득 멈춘다고 말할 수 있는 날, 더 나아가 삶과 죽음에 관한 깊은 이야기를 가볍게 툭, 말할 수 있는 그런 날이 온다면 제가 먼저 울어버릴지도 모릅니다. "



사비나의 동공이 진해졌다. 어두운 공간에서 이제 막 알을 깨고 나온 독서 멤버들은 덩달아 사물의 위치를 제대로 찾고 싶은 눈동자의 모양을 했다. 책에 대한 호기심이 사람에 대한 호기심으로 넘어가면 우리는 힘들게 이야기를 꺼내는 사람의 숨소리조차 그저 흘려보내지 않았다. 나의 동공이 커지자 사비나는 자신의 필명이 들어가 있는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을 꺼내며 말했다.








" 삶의 무게와 획일성을 벗어나, 자유를 추구하는 방법이 지극히 이기적인 외과의사 '토마시'가 나와요. 그의 여자 '테레사'는 운명적인 사랑을 찾고 기다리고 있죠. 이 책은 사회적, 정치적 속박으로부터 철저하게 자유롭고 싶은 '사비나'와 그녀의 남자 '프란츠'가 등장하는 소설입니다."


사비나는 덧붙였다. 서로 다른 사랑 이야기가 체코의 역사와 맞물려 소설의 전개를 따라가기 어려울 수도 있다고.



"정체성을 찾아가는 방법이 '무거움'과 '가벼움'으로 그래서 동전의 앞면과 뒷면처럼 공존한다고..."


사람을 알아가는 데 시간이 걸리니 이해해 달라고 말했던 그녀는 읽었던 책이라고 했다.



"자유를 추구하는 외과의사 토마시가 테레사와 사비나를 동시에 사랑하면서 말했던 문장이네요?"


책을 뒤적이며 사비나는 말했다.








"네, 동시에 두 여자를 사랑할 수 있을까요...?"


"네, 저는 가능하다고 봅니다. 그런데 그 가치관을 멋들어지게 설명할 자신은 없네요. 그래서 나를 위한 선택이 자유이고 독립이었던 '사비나'의 삶을 옹호합니다. '모순'을 설명할 자신이 없다면 '배신'을 선택하는 그래서 혼자 외롭게 지내는 것을 선택한 '사비나'의 마음이 이해가 됩니다..."


역사와 이데올로기의 소용돌이 속에서 끝없이 갈등과 반목을 거듭하는 주인공들은 오랜 방황 끝에 '인간은 참을 수 없이 가벼운 존재'라고, 어쩔 수없이 한계를 드러내는 나약한 존재라고 책을 설명하는 사비나의 말이 조용한 카페에 무겁게 내려앉았다. 마침 카페에 흐르는 음악은 보수적이고 내성적인 로맨티시스트 브람스의 '독일 레퀴엠'이었다.



"아, 브람스를 좋아하세요?"


사비나는 자연스럽게 흐르는 카페의 선율에 오랜만에 만난 반가운 사람을 바라보듯 아이처럼 커진 눈을 나에게만 집중하고 물었다. 읽지 않은 책과, 모르는 작곡가의 음악을 고개를 끄덕이며 설명하기에는 가볍고 나약한 나를 너무 많이 보여주었다.


"커피와 어울리는 음악을 선곡해서 걸어두긴 했는데, 오늘은 브람스가 흐르네요..."



독을 품고 있는 벨라도나의 눈빛이 허물어지고 책을 논하던 동공의 진하기가 흐려지면 그녀는 어김없이 커피를 리필했다. 어쩌면 질문에 답하지 못하는 숱한 상황들을 모면하게 해주려고 여백이 많은 나의 문장을 채워주려고 말하는지도 모른다. "다들, 커피 한잔 더 할까요?"



신기하다. 한번 잃었던 길의 걸음을 기억해서 또다시 그 길을 잃어버리는 버릇이 있는데, 내가 모르는 기척을 섬세하게 읽어주는 그녀의 배려가 다 느껴졌다.



"엘베 강구에 있는 함부르크에서 태어난 브람스를 좋아했어요. 브람스의 사진을 보면서 미간을 모으고 어딘가 응시하는 진한 눈빛에 빠져들어갔죠." 내가 커피를 준비하는 동안 그녀는 책의 이야기 대신 음악가의 이야기로 카페의 분위기를 환기시켰다.



"저는 드라마, '브람스를 좋아하세요'를 봤어요!"


새로 합류한 젊은 새댁은 피아노를 가르치는 선생이다. 이제 막 아이를 알고 남편을 알아가는데 책이 한몫했다는 그녀는 책을 통해 하루의 감정을 정리하는 습관이 생겨서 좋다고 했다. 그녀에게 '브람스'는 '브람스를 좋아하세요?'라고 물어 본 주인공 김민재의 대사와 같았다.



"평생을 독신으로 살아가는 브람스는 만년의 고독을 이겨내지 못했어요. 바그너처럼 화려하고 위압적인 울림은 없지만 저도 그의 음악이 좋아요. 무거웠다가 가벼워지는 밀란 쿤데라의 책과 닮아있어요..."


유일하게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을 읽은 그녀는 오늘 제대로 회원들에게 깊은 인상을 심어주고 있었다. 그 자리에서 이탈한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누구나 잘했다고 인정하는 커피를 내려주는 것뿐. 포터 필터 안에 분쇄된 커피가루를 평평하게 레벨링 하면서 그라인더를 잡은 손에 힘이 들어갔다. 피식 웃음이 나왔다. 나를 바라보는 시선이 느껴졌다. 에스프레소 위에 따뜻하게 스티밍(steaming) 한 우유를 부어 라테 아트를 하고 있는 나에게 리필이 아니라 창조를 하는군요. 그리고 아마 멋지다고 말한 것 같다.



순간, 어느 날 문득 내가 잘하고 있다고 생각했는데 못 하고 있다고 말하는 사람과, 못 하고 있다고 생각하는데 잘하고 있다고 말하는 사람의 차이를 생각해 봤다. 알고 있는 지식을 폼 나게 나열하고 싶은 욕구를 잠재우지 못하면 영락없이 선을 넘어 필요하지 않은 말까지 해버리는 그날의 회환처럼 나는 겸손하다고 생각했는데 누구는 교만하다고 생각하는 어느 날이 떠올랐다. 생각이 깊어졌다.








"우유가 진한 커피를 품어서 맛이 깊어요. 감사합니다. 리필이 아니네요. 감사합니다." 사비나의 칭찬에 아이처럼 어깨를 으쓱했다.



"선생님, 책을 보니 인간의 삶은 오직 한 번만 있는데 한 번뿐인 것은 전혀 없다는 말에 줄이 그어져있네요. 어떤 의미인가요..?"


느린 호흡의 그녀는 진한 커피를 우유가 다 품어가는데도 한 모금도 마시지 않은 채 사비나의 책을 뒤적이며 그녀의 줄친 문장에 코를 박았다. 그런 질문을 사랑하는 건지, 벨라도나의 향기가 카페에 머물러있는 커피의 향을 다 먹어버리듯, 사비나는 다시 진한 동공으로 밀란 쿤데라의 의도를 설명했다.


"영원성이 무거움이라면 일회성은 가벼움이죠. 그러나 이 대립이 옳고 그름의 가치를 대변하지는 않아요. 특정한 시점, 특별한 순간마다 모든 의미를 부여하죠. '그래야만 한다'라고 말해버리면 영원과 일회성 단 두 개의 삶만 누리는 이분법적 삶을 살게 됩니다. 한 번뿐인 인생, 한 번뿐인 것은 없어요."



둘의 대화가 깊어질수록 대낮에도 불을 켜고, 눈 밑에 난 까만 점만 바라보다가 시간을 허비했던 그날이 떠올랐다. 모르는 이야기를 들으면 그럴까. 젊은 새댁은 휴대폰 문자를 확인했고, 프런트 직원 올라는 비밀 노트에 무언가 쓰기 시작했다. 그럼 나는...? 이미 내가 제일 잘하는 라테아트는 바닥이 났다. 사비나의 입술에 묻은 우유 거품이 사라지려고 했다.



"작가님, 곡을 바꿔볼까요?"


"네?"


"브람스의 노래 헝가리 무곡... 어때요?"


"아, 헝가리 무곡 제5번! 그대를 닮은 집시 음악이죠!"


사비나 그녀의 눈빛이 다시 허물어졌다. 진한 동공이 풀리고 어느새 사랑하는 남자를 떠올리 듯 가늘게 뜬 눈 위로 세 개의 주름이 미간에 잡혔다. 내가 잘 기억하고 있는 것을 어필하고 싶었다. 아, 헝가리 무곡을 뭐라고 하더라


https://youtu.be/HCDygl0pttM






"이런 곡을 '연탄곡'이라고 해요!"


아, 내가 말할 기회를 놓쳤다. 피아노 선생, 젊은 새댁이 말했다.


"연탄곡은 한 대의 건반 악기를 두 사람이 함께 연주하기 위해 만든 곡이에요. 헝가리 무곡은 연탄곡이죠! 네 개의 손을 위한 모음집!"


그녀의 어깨가 으쓱했다.



특별한 시점, 동공이 흔들리고 생각이 깊어지는 지점을 사비나는 알고 있다.


"타샤! 이럴 때는 무곡이죠. 자, 헝가리 무곡을 들으면서 쉬어갑시다."



무거움과 가벼움의 차이를 아는 그녀는 어깨를 들썩이며 춤을 추었고, 미소가 아름다운 세 명의 여자는 일회적으로 지나갈 음악에 취해 서로를 독려했다. 그녀들의 지갑이 열리면서 내일은 팔지 못할 유통기한에 임박한 빵과 쿠키가 사라졌다. 나만, 생각이 깊어졌다. 손을 빗처럼 말아 자연스럽게 머리카락을 쓸어넘기며 말했다.


"작가님, 이 곡이 대중에게 사랑받은 이유가 있대요... 연주 여행 중에 받은 영감이..."



가끔은 아무 생각 없이 순수하게 뱉은 문장에 분위기가 바뀌기도 하고 환해지기도 한다. 누군가 그랬으니까,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은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려움이라고.


"아 맞다! 사랑받은 이유는요, 초등학생들이 연주하기 때문이에요! 연탄곡은 연탄을 모르는 애들이 쳐야죠!" 새댁의 위트에 박장대소할 일인가.



가끔은 그 가려움과 가벼움을 소생시키고 싶은 교만이 선을 넘기도 한다. 가벼워진 분위기를 무겁게 바꾸는 것도 일순간이다.


"아, 참. 작가님.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은 체코 공산주의자들에게 일침을 가하는 목적도 있나요?"



그런 날이 있다. 무곡으로 취한 어깨 춤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브람스를 좋아하는 사람이 추억에 빠져 눈을 뜨지 못하는 날. 책에서 음악으로 넘어가 있는 사비나는 여전히 브람스에 취해 있었다. 어쩌면 과거의 참을 수 없는 존재를 찾아 이제는 얼마나 가볍게 사는지를 보여주고 싶은지도 모른다.



새댁이 말했다.


"아, 참 작가님, 드라마 '그 해 우리는'에 남자 주인공 최우식이 이 책을 읽고 있던데요!"


감은 눈을 뜨면서 사비나는 즉각적인 반응을 했다. "아! 저도 보고 있어요!"



어느 날 문득 알았다.



기쁨의 샘물이 폭포수처럼 터지는 순간이, 책의 주제를 제대로 이해할 때이기도 하지만, 같은 드라마를 보고 있다는 단순한 지지일 때이기도 하다는 것을.



어느 날 문득 나는 그렇게 몸이 가려웠다.


늦게 알아버린 깨달음에 그렇게 몸이 가려웠다.





작가의 이전글 이중생활:double-bubble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