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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Sabina Jul 27. 2020

Nonfiction 2.

외도, 바람 정당화될 수 있을까

오목은 하얀 돌과 검은 돌을 줄 세워 놓는 것... 아니다.

오목은 다섯 개의 돌을 먼저 놓는 사람이 이기는 것.. 맞다.

인생의 희로애락을 담고 있는 것이  바둑이라면,  짧은 펀치로 쨉, 쨉, 쨉을 날리다가

한 방에 The end 가 되는 것이 오목이다.

가볍게 보지 말라는 것이다.

그 오목에도 절대로 지지 않는 [무적 수]라는 것이 있다.

물론 [흑]을 잡았을 때 말이다.

[무적 수]는 통상적인 줄 세우기로 시작하지 않는다.

이런 식으로 두다 보면

이렇게 아름답게 이긴다. 막을 수 없다.


아이를 재우고, 노름하러 간 남편을 기다리면서 긴 밤을 쪼개기 시작했다.

허리춤에 찬 칼로 밤 허리를 베며

문학책을 읽기도 하고, 수업 준비를 하기도 했다.

그러나 신문물 인터넷으로 오목을 두는 내 공간과 저 너머 공간의 밤 허리는 나의 칼로 잘라지지 않았다.


채팅창을 열어놓고 대화하면서 오목을 두다 보면 통성명은 기본이고, 삶의 애환까지 나누니 미지의 남자와 여자가 위로자가 되어간다.

가끔 비라도 오면, 가끔 -첫눈이에요! 그런 날이면, 내가 잘 두는 무적수를 삐긋대는 실수를 일부러 해서 나약한 여자의 모양으로 -축하해요

그러면, 어김없이 채팅창으로 날아온다. [큐피드의 화살]을 가장하고- 몇 살이에요? 남편은 왜 그대를 혼자 두는지?

그 시간이 쌓여 길드 가입 조건으로 전화번호까지 냉큼 줘버리니, -아, 여자가 뭐 그리 잘 둬요 

달콤한 목소리로 전화를 걸어온다.


칭찬으로 다가오는 친절함에, 어릴 적 받아 두었던 상장의 빛바램이 살아나고 마이크를 잡고 노래 쫌 한다고 뽐내던 프레디 머큐리를 따라 하는 보헤미안이 된다. 내가 여자가 되어가는 것이다. 새근새근 자고 있는 아이의 숨소리가 들리지 않고, 노름하러 간 남편을 생각할 겨를이라는 것이 없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를 만났다.


오목 동호회가 남자들의 천국이어서 놀랐다.

바쁜 시간을 쪼개서 오목을 두는 남자들의 직업이 다양해서 놀랐다.

그들은 내가 목발을 짚고 나와서 놀랐다.

목발이 한 개에서 두 개로 변하는 시점은 이미 포스팅했다.

그러나 나는 마흔까지 목발을 한 개로 짚으려고 애썼다. 그리고 걷기 어려운 공간이 오면 한쪽 손은 내 옆에 있는 누군가의 손을 잡고 걸었다.

자연스럽게 동호회 남자들이 나의 왼쪽 손을 잡아주는 사람들이 되었다.


기억난다 아직도 기억난다.

-누나, 저 예요 0 00입니다.

청바지 위에 하얀 티셔츠에 파란 줄이 스트라이프로 몇 개 그어진 시원한 옷을 입은 남자가 걸어온다.

기억난다 아직도 기억난다

-누나한테 맨날 지던 00입니다.


온라인상에서 누나라고 부르던 그는 나보다 4살이 어렸다.


남편의 나이를 물었을 때, 나보다 4살이 많다고 하니 -궁합도 안 보는 나이네요

웃어주던 지인이 얄미웠는데,

나보다 4살이 어린 그에게서 나는 궁합도 안 본다는 그 금슬 좋은 나이차를 가늠하고 있었다.

오프라인 대회를 빌미로 그렇게 오목 동호회 사람들을 만났으니, 나의 일상은 과외를 끝나면 아이를 맡길 곳을 찾고 그들이 있는 곳으로 갔다.

아이를 맡길 곳이 없으면 남자들 천국인 그곳으로 데리고 나가서 그들의 호칭을 알려주었다.

삼촌 1, 삼촌 2, 삼촌 3

아들에게 생긴 삼촌의 수만큼 나는 흔들리고 있었다.

나보다 나이가 4살이 어린 그 남자에게 나는 흔들리고 있었다.

직감적으로 밤의 허리를 쪼개고 다니는 나를 보던 남편도 흔들리고 있었다.

내가 가는 곳이 영등포면 남편은 영등포 노래방 문 앞에서 나를 데려갔다.

내가 가는 곳이 자동차 극장이면 인천시내 온 극장을 뒤져서 나를 데려갔다.

노름판에 있어야 할 남편은 이제 [의처증] 남편이 되어갔다.


바둑에서 자기의 수를 줄이는 돌, 즉 상대방에게 유리한 수를 [자충수]라고 한다. 일상에서는 스스로 한 행동이 자신에게 불리한 결과를 가져오게 됨을 비유적으로 이르며 '자업자득(自業自得)'과 같은 말이다.


대범해지기 시작했다. 나의 노선을 들키지 않기 위해 나는 과감해졌다.

거짓말이 거짓말을 낳고 남편을 피해 궁합이 좋다는 4살 연하의 남자와 노느라 나의 아들은 시댁과 친정과 친구 집으로 맡겨지기 시작했다.

꼬리가 길면 밟힌다는 속담은 드라마에서나 있는 속담은 아니다.

스스로 한 행동이 불리한 결과를 가져오기 시작했다. 나의 자충수가 남편에게 읽힌 것이다.



정당화할 수 있을까?

외롭게 했으니 바람 타고 날아가는 여자였다고 정당화할 수 있을까?

중요한 건, 이름만 부부였던 그 흔적에  [외도]와 [바람]으로는 규정하고  싶지는 않다.

가정에 충실하지 않은 남편을 따라 복수하듯 충실하지 않았다고 규정하고 싶지는 않다.


정당화하고 싶지도 않다.

중요한 건, [진짜 감정] 외치며 살아가는 상담사에게 부부상담은 가벼운 [바람]을 안고 오기도 하고, 거센 [외도]의 현장을 가져오기도 하는데,

-저는 몰라요, 저는 순진해요, 저는 하나님밖에 몰랐어요

할 수가 없다는 것이다.


남편에 의해서 갈기갈기 찢기고 헤어진 그 연하의 남자 친구는 10년 뒤에 잠시 조우했다.

여전히 귀여운 얼굴을 하고

-누나, 저 결혼했어요

-그래 해야지 했어야지. 나이가 몇인데.


그런데 말이다.

아직도 그가 꿈에 보인다.

그때 그 시원한 옷을 나풀대며 다가와서 말한다.

-누나, 오목 한판 두시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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