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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Sabina Jul 26. 2020

Nonfiction

소설 같은 인생.

포대기라고 하면 유아를 등에 업고 부모와 밀착감을 주며, 아이를 등에 업고 있는 동안, 엄마는 자유롭게 손을 활용하여 일을 한다는 장점이 있는 데...


나는 장애인이다.

아이를 포대기로 업을 수 없는 장애로 인해 흔들침대로 재우고, 더 크게 울면 가슴으로 안아 키웠다.


거센 비가 한 차례 휩쓸고 간 하늘은 구름끼리 엉겨 붙어 파란색 우아한 자태를 뿜내고 있다.

병원 옥상, 하늘 정원에서 바라본 하늘은 저 밑으로 낮은 건물을 아우르며 아주 교만한 진한 파란빛 하늘을 토해내고 있다.

그때 네가 올라온 이곳이 건물의 최상층이 아니라고 더 올라오라고 손짓하는 공간에 눈이 머문다.

이미 눈물의 수액을 쏟고, 폐에 구멍을 뚫고 슬픈 과거 따위 역사의 뒤 언저리로 버리고 왔으니 신나게 놀아보자고 싸이의 [뜨거운 안녕]을 듣는데.,

자꾸 목이 맨다.

더 쏟아내야 할 것들이 더 진실해야 할 것들이 물이 찬 폐에서 나오는 빨간 핏덩어리처럼  실실 새고 있다.

그래 올라가 보자. 쏟아내 보자.



가슴으로 키우는 아들... 포대기 없이 가슴으로 안아 키운 아들.


내 나이 스물일곱, 백일도 안 된 아들이 흔들 침대에서 울고 있다.

아이들 과외지도를 해야 하는데, 아들의 큰 울음소리가 방해될 즈음 미친 듯이 더 흔들어서 아들이 잠잘 수만 있다면, 울어야 정상인 아기에게 울지 말라고 울지 말라고 돈을 벌어야 하는 엄마를 아기에게 투영하며, 쉴 새 없이 흔들침대를 위아래로 거칠게 다루며

-아, 나쁜 놈.

내가 가르치는 동안 노름하러 간 남편이 아들을 봐주지 않는다는 원망을 할 사이도 없이, 이내 아들은 흔들어 댄 침대의 무중력으로 빠져들어갔다.


그렇게 아들을 키웠다. 애착이 강해지니 아들이 없으면 죽을 수 도 있겠다 싶었다.

그것을 놓칠 리 없는 남편은 수시로 이혼하자는 나의 발언에 -너 오늘부터 00이 못 본다.

가슴에 안겨있던 아들이 시댁으로 가 있는 동안 아들의 백일이 오면, -이제 내 말대로 할 거지? -네

그렇게 다시 안아 본 아들과 애착을 나누며 나는 일을 하고, 또 노름하러 간 남편에게 -이혼하자.

그때 다시 아들은 시댁으로 옮겨졌다.

곧 돌이 다가오는데, 아들이 보고 싶어 미치겠는데 보여주지를 않았다.

-어머니, 00 이가 너무 보고 싶어요

-에혀... 어미야 몰래 보러 와라


포대기에 업혀 몸이 반쯤 빠져나와 달랑거리는 피사체가 보인다.

빨리 보여주고 다시 돌아가야 한다는 3대 독자 자신의 아들을 무서워하는 시어머니는 나의 아들을 업고 그 높은 산동네 언덕을 뛰어 내려오고 있었다.

아들을 업고 내려오는 동안 어머니의 뛰는 걸음만큼 포대기에서 아들의 몸이 자꾸 빠져나왔다.

그때 나는 차에서 소리쳤다.


-어머니!!! 저 금방 보고 갈 거니까 뛰지 마세요, 제발요!!


서양문화는 포대기가 없다.

누가 포대기가 편리한 도구이며 아이와 밀착이 강하다고 하는가. 심리학을 공부하니 가슴과 가슴으로 맞대고 안아주는 것이 부모와 아이와 안정감을 증폭한다고 하는데, 그것을 서양문화는 미리 알았던 걸까

왜 우리는 포대기 문화였냐고

난 포대기가 싫다.

포대기만 보면 높은 산자락 끝에서 몸이 반 이상 빠져나와 목이 꺾인 채 달랑거리며 포대기 끝에서 나를 쳐다보고 있던 아이의 눈을 잊을 수가 없다.


노름보다 나쁜 건, 사람의 감정을 이용하는 것

노름보다 나쁜 건, 아픈 감정이 쌓여 -네가 그랬다 -기억이 안 난다

그렇게 남편의 무능력과 무관심이 당연시되고 있을 때, 인터넷이 보급되었다.

아들이 6살이 되던 해, 일대일 과외 선생님에서 제법 큰 공부방을 운영하는 선생님이 되었다.

그때 내 나이, 서른 하나. 세상이 바둑알 색깔처럼 검고 하얀 두 가지 기준인 줄 알고 살던 숙맥이었던 내게 인터넷은 신 문화였고

나는 그 신문화를 일을 하고 쉬는 도구로 이용하기 시작했다.


작은 것을 탐하다가 큰 손실을 본다는 '소탐대실(小貪大失)', 한번 둔 수는 무르지 못하는 '일수불퇴( 一手不退)', 일이 급박한 상태인 '초읽기'와 자신의 행동이 결국에 자신에게 불리한 결과를 가져오는 '자충수', 언뜻 관계가 없어 보이는 이들 단어의 공통분모는 무엇일까? 바로 삶의 이치가 오롯이 담긴 나무판자 위의 전쟁터, 바둑에서 유래된 말들이다.

나는 그 바둑판을 컴퓨터로 접하고 그 위에 오목을 두는 오목 게임에 빠져들었다.

쌍삼 같은 쉬운 승부가 아닌 4.3으로 이겨내는 고도의 전략이 필요한 오목은 일이 끝난 불 꺼진 집에서 흔들침대가 필요 없는 아들을 재우고 할 수 있는 유일한 오락거리였다. 그렇게 매일 컴퓨터로 게임을 하니 실력이 늘고 길드에 가입해서 여성부 1위를 할 때까지 사람들의 인정을 받으니 오목은 나에게 외로운 감정을 치유해주는 도구였다.

아들을 잊고, 포대기를 잊는 도구 말이다. 소탐대실 인지도 모르고 말이다.

그때 만났다. 그를

 

교훈적인 책에서 쓸 수 없었던 과거를 쓰고 지워갑니다.

이어가 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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