혹시, 나를 찾고 있나요?
이렇게 사는 것도 괜찮을 수 있겠죠.
하지만 내 인생은 아니에요. 나는 내 인생을 사랑했어요. 진심으로요.
누구에겐 일상인 외출과 산책도 쉽지 않고, 작은 추위에도 폐렴이 걸리고, 그 폐렴에 걸리면 죽을 고비를 넘겨야 하는 남자가 있다.
단, 그에게는 능력치를 뽐내던 화려한 축제와 정상적인 몸으로 누렸던 젊음이 기억 속에 잔재하는 태생이 장애인이 아닌 남자가 있다.
결국 존엄사를 택하고 장애까지도 사랑해주는 여자를 두고 가는 그 남자의 이야기. 바로, 영화 미 비포 유[Me before You] 주인공, 전신마비 환자 윌의 이야기다.
그의 이야기를 다룬 영화를 사람들은 이렇게 평했다. [슬프도록 아름다운 이야기]
슬픈데 아름다울 수 있는 이유가 뭘까?
전신마비 남자여도 괜찮다는 여자 친구가 되어버린 루이자의 속삭임에 윌은 말했다. 장애인으로 살아가는 지금은 내 인생이 아니라고. 그가 사랑한 인생은 사고가 나기 전, 정상적인 몸으로 능력치를 뽐냈던 그때였다고 고백한다.
슬픈데 아름다울 수 있을까?
나에게는 슬프지도 아름답지도 않은 영화였다. 인생이 그저 영화 같을 뿐.
살면서 들었다.
-어떻게 장애인이 되었나요?
-사고였나요?
-아, 소아마비예요?
그러다 미안하면 위로를 건네준다.
-힘들었겠어요.
-그런데 이렇게 밝게 컸군요.
나는 자주 꿈을 꾸었다. 목발이 없는 자유로운 몸을, 나는 장애인이 아니다.
소아마비 예방주사만 맞았어도, 고열이 나는 어린 딸에게 더운 이불을 덮어주지만 않았어도, 아니 조금만 관심을 주었어도 되는 1969년 두 살의 아이는 결국 평생 장애인으로 살아가게 되었다.
크면서 알았다.
아버지는 고학력인데 일을 하지 않는, 세상과 전투적으로 대항하는 상처 투성이었고, 엄마는 낳아 놓은 자식들 배 골리지 않게 하기 위해 일만 하느라 허리가 휘어져 가는 것도 모른 채 강한 어머니 상을 심어주고 있다는 것을.
그리고 그 사이에 대물림해주고, 제사를 지내주고, 의존할 수 있는 아들이어서 사랑을 독차지하는 오빠 둘이 있었고, 여자라는 이유로 식모살이를 했던 언니는 가출의 형태로 반항을 했고, 장애인으로 만들어진 나는 어두운 창고에 갇혀있었다.
그 어두운 방에서 [분리]의 경험을 하고, 가난한데 장애인을 키운다는 [손가락질]이 두려워 더 외면하는 또 다른 [분리]의 경험을 하면서 나는 만들어졌다.
에니어그램 7번은 자신이 경험한 부모를 바탕으로 어린 시절 제약과 통제를 받게 되고, 그 부족한 자리에서 자기를 살려 줄 화려한 그곳을 늘 기대하는 아이로 큰다. 따뜻한 사랑을 받지 못하고 성장하는, 그 자리를 벗어나 누군가 구원해 줄 따뜻한 그 자리를 늘 꿈꾸며 살아간다. 그래서 재미를 찾아 탐닉하며 슬픈 감정을 잊기 위해 [남의 떡이 커 보이는] 그 사람들을 늘 부러워한다.
슬픈데 아름다울 수 있을까?
가난한데 장애까지 있다면 행복할 수 있을까?
그 반항이 저항이 되고 그 저항이 삶의 원동력이 되니 나는 살면서 그렇게 도전을 했다.
꼴찌여도 좋으니 남들이 하는 달리기를 했어야 했고, 목청이 크고 아이들을 휘어잡을 수 있다는 항변으로 응원단장을 얻어내고, [이 연사 여러분에게 외칩니다] 웅변을 할 때도 목발을 들어 외쳤으며, 운전을 배우고 차를 몰면 안전제일이라는 표어쯤 가볍게 무시하는 카레이서가 되어 있었다.
7 유형은 가장 낙관적인 사람이고, 습관적으로 미래에 벌어질 가능성에 주의를 집중하며 새롭고 자극적인 경험을 목말라하는 매력적인 공상가일 수 있다. 7 유형은 진심으로 스스로 상상하는 것을 전부 실현시킬 수 있고, 원하는 것은 무엇이든 획득할 수 있다고 믿는다.
다행히도 백수 아버지와 달리 엄마는 여장부였다. 어려운 일을 척척해내고, 식당을 차렸을 때 맛집으로 소문나서 그렇게 아끼는 아들들에게 건물을 안겨 줄 유산을 줄만 큼 성공했다.
분리와 무관심으로 컸지만 강한 엄마를 보면서 나의 무의식 속에는 [하면 된다]라는 강함이 존재했으니, 나는 하는 일마다 성공했다. 아니, 어쩌면 실패라고 느끼는 그 패배감을 인정하기 싫어서 빠르게 다른 일을 찾았으니 성공이라고 말하는지도 모르겠다.
7 유형에게 있어 인지적 오류는 [과도하게 행복에만 초점을 맞추는 태도]에 있다. 그래서 쾌락에 집중하게 되고, 그 쾌락이 중독이 되어 병을 얻어야 정신을 차린다. 빛은 항상 그림자를 드리우는 것처럼 7 유형이 그토록 추구하는 삶의 밝은 측면에는 보기를 거부하는 그에 상응하는 어두운 면이 있다.
아무도 몰랐다.
도전을 하고 항상 웃고 있는 내가, 가장 은밀한 공간에서 매일 울고 있다는 것을. 그 눈물이 차고 넘쳐서 베갯잇을 매일 갈아야 했는데 다음 날이면 아무 일 없다는 듯이 낙천가의 모습으로 사람들을 대하니 아무도 몰랐다.
가난을 대물림해 준 아버지가 간암으로 죽고, 술에 취해 살던 언니가 알코올 중독으로 객사를 하고, 오빠들이 간경화에 걸리고, 엄마가 혈액암에 걸렸을 때, 나는 알았다.
낙천가로 살다가 은밀한 공간에서 우는 그래서 아픔을 참기만 하고, 내면의 나를 인정하지 않아서 오는 그 중독성 때문에 에니어그램 7번 유형의 가족이 어떻게 붕괴되는지를 보았다. 나는 엄마만큼은 살리고 싶었다. 내가 배운 상담기법을 동원하고 엄마를 치유하는 긴 시간, 나를 왜 방치했냐고 엄마의 강함이 나를 내친 거라고 울부짖는 그 시간까지도 지나자 나는 제대로 엄마를 볼 수 있었다.
-엄마, 강하지 않아도 엄마는 엄마예요... 아빠 역할까지 하느라 고생 많았어요... 엄마 사랑해요.
엄마와 나의, 마음의 종양이 사라지자 의사는 말했다.
-아, 신기한 일이네요. 나이 드신 분들은 혈액암을 이기지 못하는데... 완치되셨습니다.
하나님의 은혜라고 했다. 기도의 응답이라고 했다. 엄마의 강함이 이겨냈다고 했다. 그러나 나는 안다.
엄마와 내가 과거를 인정하고 화해하는 그 시간이 만들어 준 결과라는 것을.
혹시, 나를 찾고 있나요?
-반장 할 사람?
-제가 할게요.
-오락부장 할 사람?
-제가 할게요
어릴 때는 조금 순수했으려나, 드러내기의 수단이 아니라 그냥 선생님이 찾고 있는 사람이 나였으면 했다.
-선생님, 제 아이를 좀 봐주세요. 마음이 아프대요
-물어 물어 왔습니다. 이 곳이 꼴등도 가르친다는 공부방 맞는지요?
고개를 숙이고 지나가는 아이들을 보면 차를 몰고 가다가 불렀다.
-아이야! 지각하겠다. 태워줄까?
공부하는 방법을 몰라서, 어쩌면 마음이 아파서 꼴찌를 했을 수도 있는 아이들을 내 칠 수가 없었다. 꼴찌를 하면 성격까지 이상할 것이라는 편견 가득한 부모들을 설득해서 받아들인 나의 공부방은 정말 다양한 아이들이 존재했다.
-선생님, 제가 비밀이 많습니다. 선생님에게만 털어놓을게요.
커피를 마시고 들어오는 것처럼 보이지만 그 카페를 지나 저 깊숙한 곳에 위치한 계단을 타고 올라가면 나의 은밀한 상담실이 나온다. 아이들 가르치는 일을 그만두고 상담일을 하는 나는 그곳에서 방법을 모르기 때문에 찾아온 마음이 아픈 자를 단지 먼저 경험했던 이유로 안아주고 있다.
-선생님!
-선생님!
혹시, 나를 찾고 있나요?
그런데 말이다.
에니어그램의 하위 유형은 세 가지, 자기 보존적 유형, 사회적 유형, 일대일 유형이 있다.
상담은 일대일로 진행되는 것이니, 내담자의 비밀을 들어주고 그들을 위해 치유하는 시간을 넘어 기도하는 시간을 갖기까지 친밀감을 주는 그 일대일 유형을 나의 하위 유형으로 삼고 살았다.
무대에 서도 떨리지 않았고, 사람들을 리드하는 자리, 오너의 자리도 잘 해냈는데도 나는 탐닉에 반하려고 노력하면서 다른 사람을 위해 탐닉을 버리는 고행자 역할을 하는 사회적 유형은 나와 맞지 않다고 생각했다.
왜 그랬을까?
같이 산을 가고 바다를 가는 여행의 자리, 무대를 오르기 위해 단상으로 가는 그 불편한 느린 걸음의 자리가 싫었다.
나는 같이 걸어야 하고, 단상으로 걸어가는 그 자리에서 내가 아닌 나의 목발이 보이는 것이 싫었던 것이다.
사실 인간은 자기 보존적이며, 사회적이며, 일대일이어야 해서 그 세 가지 하위 유형을 적절하게 맞추어 살아가면 행복한데 말이다.
-나는 자기 보존적이며 일대일 유형이에요.
그렇게 규정 지어야 하는 모순된 상담사로 살아갔던 것이다.
그런데
이제야 보인다. 신발장 구석에 세워 놓은 목발이 말한다.
웅변할 때 손처럼 사용했던 목발 아니냐고, 질퍽거리는 땅에서 넘어지지 않도록 지지해주었던 목발 아니냐고, 결혼 이야기만 나오면 도망갔던 그렇게 따스한 손길을 주었던 남자들 대신에 너의 손을 끝까지 잡아주고 있는 목발 아니냐고...
이제야 목발이 사랑스러워진다. 나의 몸의 일부가 되니 닦아주고 쓰다듬어주는 목발에게 습관처럼 말을 건다.
-고생했다 고생했다...
가끔은 신발을 신고 가방을 메고 그냥 걸어가려고 한다, 목발 없이.
가끔은 운전석에서 시동을 끄고 내릴 때 그냥 내리려고 한다, 목발 없이.
-아, 미쳤나 봐. 나 장애인 이잖아. 바보...
고개를 돌려 목발을 찾는다. 그 목발이 말한다.
혹시, 나를 찾고 있나요?
그렇다. 나는 장애인이다.
내면의 뿌리를 찾아 에니어그램 7번임을 인정하자 중독성이 사라지고 암이 치유된 엄마가 있고, 내면의 뿌리를 찾아 장애인인 것이 부끄럽지 않은 딸이 있다.
이제 나는 나의 경험을 토대로 삶이 공허하고, 마음이 아픈 사람들에게 말해 줄 것이다.
-저와 함께 내면의 뿌리를 찾아갑시다. 아픈 이유를 찾아 행복을 찾아 줄게요. 저의 손을 잡으세요...
어디서든 불러주세요. 언제든 대답할게요.
혹시, 저를 찾고 있나요?
저.. 여기 있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