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가의 사물
책-알랭 드 보통『왜 나는 너를 사랑하는가』
1. 줄 글의 행과 행 사이를 행간이라고 한다.
직접적으로 글이 쓰여있지 않으나 행간에는 그 글을 통하여 나타내고자 하는 숨은 뜻이 있다.
[왜 나는 너를
사랑하는가.]
2. 쉼을 나타내는 쉼표는 끊어 읽으라는 암묵적 사인이지만 나는 생각이 쉬어가는 공간으로 쓴다.
말줄임표는 말을 줄이거나 할 말이 없을 때 쓰지만,
나는 머뭇거릴 때 쓴다.
[왜, 나는 너를, 사랑하는... 가.]
스위스에서 태어나서 프랑스식 이름을 가졌다고, 알랭 드 보통이다. [이하 보통이라고 칭하고 씁니다]
지적 탐구 제대로 자극하는 책에서 보통을 읽었다. 주인공 남자는 생각이 깊은 보통이다.
그가 만들어 놓은 생각의 깊이에 빠지면 헤어 나올 수가 없다.
이 책이 청년의 나이 25세에 처녀작으로 출간했다니...
그는 사랑을 논하는 수필 같은 소설을 던져 놓고 자기의 사유의 공간으로 블랙홀처럼 나를 끌어당겼다.
스토리가 도전적이고 재치가 있다. 밥을 먹을 때도, 화장실에서 볼 일을 볼 때도 손에서 책을 놓지 못 헸다.
케케 먹은 연애 이야기에서 남자의 사랑을 받는 클로이의 매력을 찾기로 했다. 이유가 있을 것이다.
제목이 [왜?]이지 않은가.
클로이라는 여자를 만나서 사랑하고 뜨거워지는 과정까지 남자가 사랑하는 여자의 이유를 찾기에 급급했다.
내가 찾고자 한 것은 클로이를 사랑하는 이유, 그래서 [나는 너를] [사랑하는가] 사이에 행간을 띄어놓고 책의 구절구절 줄을 치고 위트 넘치는 구절에서 탄성을 자아내며 남자가 사랑하는 이유가 보편적 이유, 얼굴이 예쁘고 몸매가 좋은 비율이 탁월하거나, 돈이 많고 재능이 많아서 좋은 그 보편적 이유를 찾아내고 싶었다.
공항이라는 단어는 피부와 뼛속까지 새겨진 고통의 상형문자를 지워주는 곳이다.
어두운 그림자 말끔히 해결해줄 미지의 세계로 나를 데려다주는 비행기를 타면 우연히 만나는 팔뚝 힘줄 가득한 남자가 나의 가방을 들어주고 나의 휠체어를 밀어줄 것 같은 판타지가 가득한 곳이 비행기를 타는 공항이다.
"내 짐이 사라지지 않았으면 좋겠는데" 비행기가 히드로 공항을 향해서 고도를 낮추자 클로이가 말을 꺼내더니 덧붙였다. "그런 걱정 해본 적 없어요? 짐이 사라져 버릴 거라는 걱정?"
"그런 걱정은 안 하지만, 실제로 일어난 적은 있습니다. 두 번, 한 번은 뉴욕에서, 또 한 번은 프랑크푸르트에서"
"맙소사, 난 여행이 싫어."
클로이는 한숨을 쉬더니 집게손가락 끝을 잘근잘근 씹었다.
공항에서 우연히 새로운 남자를 만나지는 않더라도 헤어진 연인과 동선이 겹치는 아름다운 공간이 공항이며 비행기 창가인데 말이다.
로맨틱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 남녀의 대화에서 보통은 무엇을 전하고 싶었을까? 첫눈에 반하면 손톱을 잘근잘근 씹어도 예쁘단 말인가
더 찾아봐야겠다. 남자가 사랑에 빠지게 된 이유가 있을 것이다.
대화는 두서없이 이어져나가면서 서로의 성격을 흘끔거릴 수 있는 기회를 주었다.(...) 나는 이미 클로이를 사랑하고 있었다.
자, 비행기에서 만난 여자를 사랑한다고 한다.
[왜 나는 너를
사랑하는가.]
그 행간에 숨겨 놓은 사랑의 이유는 내게는 그렇다. 두서없는 대화를 나누는 공간이 비행기 안이다. 구불구불한 산악도로에서 잠깐의 경치를 구경하는 것처럼, 그녀의 장점이 언뜻 보였다고 했다. 비행기 바퀴가 활주로에 닿자 엔진에는 역추진력이 걸리고... 아마 남자는 거대한 비행기가 주는 엔진의 과열된 소리에 툭툭 내뱉는 애교 하나 없는 클로이의 문장이 역추진력으로 이끌렸을 것이다. 아마 그랬을 것이다. 콩깍지라고 하지 않는가. 비행기는 이성을 감성으로 바꾸는 판타지가 있는 것이 분명하다. 그럴 수 있다.
전화번호 적어두지 않고 머리로 기억한 그가 [071] 다음으로 전화번호를 기억해 내지 못 했을 때 클로이가 감미로운 여자라고 규정지으면서 그는 나열했다.
비행기 창틀을 배경으로 한 그녀의 얼굴
물기가 촉촉한 그녀의 녹색 눈
순간적으로 아랫입술을 깨물던 그녀의 치아
하품을 할 때 그녀의 목의 기울기
그녀의 두 앞니 사이의 간격
그리고 그는 알아냈다. 071 다음에 이어지는 수많은 확률적 전화번호를 기억해 냈다.
비현실적인 전화통화를 끝내고 그와 그녀는 연인이 되어갔다.
연인이라 하면 침대에서 뜨거운 관계 나누기 전까지 보편적으로 [썸]이지 않을까. 손끝만 닿아도 설레고 입가에 묻은 카푸치노 거품에 키스하고 싶은 드라마 설정이 [썸]이지 않을까.
보통의 연애는 다르다. 지극히 평범하고 진부하기까지 한 그의 스토리가 블랙홀인 이유는 규정하기 어려운 묘한 사랑의 감정을, 그냥 좋다는 막연하고 추상적인 사랑학 개론을 명쾌하게 풀어냈기 때문이다.
청량음료 먹은 것처럼 온탕과 냉탕을 오갈 때처럼 탄성이 지나쳐 책을 덮고 생각했다.
'이런 남자 어디 없나요...'
플라톤이 정의한 사랑의 이념이 스탈당의 정의로 넘어갈 때 내가 의도적으로 비워놓은 행간에 적었다.
이빨이 벌어져도, 엉덩이 살의 비율이 달라도, 약간은 틀어져 앉아도, 퉁명스러운 말을 해도, 사랑받을 수 있는 비 보편적 이론이 있다는 것을, 그 이론은 뮐러-리어 착시처럼 똑같은 길이인데도 더 길어 보이는 착각을 줄 수 있다는 것을 나의 행간에 기록했다.
남자는 완벽함에는 오히려 압제가 있어 싫증이 난다고 했다. 매력과 비뚤어짐 사이에서 동요한다고 했다.
그렇다면, 나는 왜 이 책의 제목에 쉼표와 말줄임표를 부여했을까.
왜 나는 너를, 이어야 할까?
썸에서 연인으로 발전하고 동거하듯 잠을 자면 보편적 사랑학 개론은 말한다.
권태기가 오거나, 단점이 보이거나, 지루하다고 말이다.
이 책도 영락없이 싸우고 헤어지기를 반복한다. 심지어 맛있게 먹었던 음식이, 그녀가 흘린 머리카락이, 숨 막힐 정도로 아름다운 여행지에서 혼자만의 시간을 갖자는 독불이 남자를 지치게 한다.
여자와 헤어지고 [자살]이라는 키워드로 정리한 문장은 이별 이후의 보편적 감정을 보통의 해석으로 철학이 들어가 있었다. 왼벽 하게 헤어지고 알약을 준비하고 자살을 시도하기 전에 그가 적어 내려 간 감정은 평이한 이별을 숭고하게 만들어주기에 충분했다.
그리스 신들의 저주와는 달리, 심리적 운명론에서는 적어도 운명으로부터 탈출할 가능성을 제시해준다. 이드가 있는 곳에는 에고도 있을 가능성이 높다. 나에게 침대에서 일어날 힘만 있었어도 긴 의자까지 갈 수 있었을 것이고, 그곳에서 콜로노스이 오이디푸스처럼 나의 고통을 끝내기 시작했을 것이다.
자살을 시도할 알약이 비타민이었다는 해프닝조차 가볍지 않은 것은 보통이 사유하는 연애론이 피아노 선율에 맞추어 건반에서 춤을 추는 손가락이기 때문이다. 보통이 펼쳐내는 글은, 죽은 남자를 찾아오는 여자의 당연히 놀라는 반응을 상상하는 글조차 유머가 지나친 위트였다. 햄릿의 대사처럼 사느냐 죽느냐 묻는다면 그는 사는 동시에 죽어야 한다고 했다. 오렌지 거품이 일어난 알약을 먹고 다시 살게 된 에피소드 끝에 그는 클로이에게 죽어있는 자신을 보는 관객이 되는 것을 상상하지 않기로 했다. 오히려 화를 내기 위해 살기로 했다.
내가 쉬어 가는 공간이라고 표현한 쉼표가 [왜 나는 너를,]에 멈춰있는 것은, 남자가 사랑한 여자가 클로이어서가 아니라 남자가 사랑한 것이 삶이었기 때문이다. 보통이 그려내는 주인공 남자는 삶을 사유하는 방식이 독특하고 특별해서 우리가 보지 못 하는 삶의 단면을 피사체로 만들고 다시 풍경으로 만들어 낸다. 심지어 내면에 숨어있는 그림자를 직면하게 해 준다. 제목에서 주는 너는, 나였고 우리였고 삶이었다.
책의 결말은 뻔하다. 헤어진 여자를 잊어가는 과정, 우리가 알고 있는 보편적 사랑이다.
그런데, 나는 왜 [왜 나는 너를, 사랑하는... 가]라고 말줄임표를 넣었을까?
삶을 사랑한 철학적인 주인공은 사랑하는 이유인 [왜?]의 답을 보바리 부인의 심리 치료 과정으로 설명했다.
오! 보바리 부인이라면, 금욕주의 문학의 대표인데, 엠마라는 유혹적인 여인이 등장하는 소설로, 결국 자살로 생을 마감하는 권선징악의 뻔한 이야기인데 보통은 다르게 해석한다.
금욕주의 안에는 뭔가 비겁한 면이 있는 것은 아닐까? 금욕주의의 핵심에는 다른 사람에게 나를 실망시킬 기회를 주기 전에 스스로 실망해 버리고 싶은 욕망이 있었다
남자는 말했다. 그들의 연애가 비현실적이라는 사실을 알았다고 해서 그것이 클로이와 본인에게 도움이 된 것은 전혀 없고, 바보일 수도 있다는 것을 알았다고 해서 현자가 되지는 않는다는, 이중적 메시지를 툭툭 건네주는 영리한 문장들로 독자의 사유를 열어 놓았다.
엠마가 등장하는 보바리 부인 책을 언급하면서 금욕을 거부하는 내용은 그에게 새로운 사랑을 암시하는 것이다. 그는 다시 사랑에 빠질 것을 알고 있는 것이다.
다시 새로운 사랑에 빠지기까지 연애학으로만 한 권의 책이 만들어지듯, 다른 사랑의 에피소드들은 두 권이 될 수 있고 세 권이 될 수도 있다.
우리가 사랑하고 있는 지금, 아니면 아무도 없어서 외로운 지금이 다시 사랑할 미래를 준다는 것, 긍정의 힘으로 끝나는 책은 나에게, [사랑하는... 가]라는 문장에 말줄임표를 넣어서 수줍게 고개숙이는 여자가 머뭇거리는 고백이 되게 했다. 사랑...하고 싶다.
사랑은 [왜]는 없다. 인생을 알아가는 과정일 뿐이다.
중간중간 수많은 인생의 에피소드가 쉼표로 녹아있고, 가끔 내 앞에 펼쳐질 아스라한 공항의 안개처럼 나는 잠시 머뭇거릴 뿐이다.
나는 너를 사랑하는... 가.
사랑하면 예뻐진다는 말을 듣고 싶은 지천명의 여자는 세 번을 읽고서야 이 책의 진가를 파악했다.
작가가 되어서 책의 구절구절의 행간의 의미를 이제야 깨닫는 작가의 사물은 책이고 책이어야 하고, 다시 사랑할 수 있는 용기이고 진보여야 한다.
장애인이면서 이혼녀인 나는 누군가를 사랑할 준비가 되었다.
바란다면 행간의 숨어있는 의미를 나눌 그 남자가 공항에서 힘들게 밀고 있는 내 휠체어를 힘줄 가득 들어간 팔뚝으로 밀어주기만을 바랄 뿐이다.
나는 지금 금욕을 이겨 낸 엠마처럼 욕망이 터져 나오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