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거진 언어 유희

안개가 걷히는 시간, 비로소 보이는 것들.

남이섬은 남의 섬이 아니었다.

by Sabina

보고 싶은 사람을 육지에 두고 왔다.


하필 노란 은행나무가 붉은 나뭇잎을 토해 내는 나무 옆이라서 섬 전체가 진한 노란색을 바닥에 흩뿌리고

붉다 못해 진홍빛 피를 토해내는 나뭇잎은 거친 바람을 못 이겨 날리고 있다는,

파란 하늘 사이로 붉은 나뭇잎이 언뜻언뜻 눈 앞을 가린다는 11월, 이른 아침에 나는 그곳으로 가고 있었다.


배를 타야 들어가는 곳, 휠체어를 밀어 줄 사람이 필요한 곳이라 나에게는 남의 섬이었던 그곳,

나는 남이섬 선착장에서 휠체어를 밀고 있었다.


언제까지 우리를 우리라고 부를까.

살이 닿고 지척에서 호흡하면, 찡그려서 생긴 주름살인지 웃어서 생긴 행복 주름살인지 다 보이는데,

우리를 우리라고 불렀던 시간이 끝났다.


그의 주름살이 행복 주름살이었던가?

손만 대면 전율이 일던 따뜻한 온기도 잊힐까?


에스프레소 커피 한 잔에 뜨거운 물이 부어지는 그 짧은 시간에도 그가 보고 싶은데, 나는 남의 섬에 있었다.

그는 아직도 우리일까?

에스프레소 위에 부어지는 뜨거운 물 위로 쓸쓸한 사색이 데워진다.

따뜻한 아메리카노 한 모금을 마신다.

제각각 출렁이던 생각이 침잠되고, 육지에 두고 온 그가 아득하게 멀어진다.

눈 앞에 펼쳐지는 섬도 아득하다.

안개가 물살 깊은 곳까지 들어갔다.


하늘과 산의 경계는 어디쯤일까?


눈을 감아야 선명해지는 남이섬 앞에서 생각했다.

실눈을 뜨고 먼 산을 바라보면서 생각했다.


등을 돌린 사람들에게 명확하게 말하지 못했다.

흰자위 보이지 않는 실 눈을 뜨고 살았다, 뿌연 안개처럼.


가까운 곳은 진하고 먼 곳은 흐린 게 이치인데,

나는 찾았다.

흔적을. 그리고 과오를.


뱃고동 소리가 요란한 기적소리를 내면서 깨운다.


나는 이제 섬으로 들어간다.


묵직한 휠체어 밀어주는 여전히 우리인 그녀에게 기댄 채,

경계가 없는 하늘과 산을 바라보았다.


어쩌면 뿌연 안개 저 너머에 우리가 있지 않을까?


육지에서 그는 말했다.

꼭 다시 만나자는 약속을 하면서 창문을 닫을 때,

닫힌 창문이 그의 마음이고 약속은 허상이라는 것을 알았다.


언제까지 우리가 우리일까?

나는 그를 육지에 두고 섬으로 간다.




안개가 서서히 걷히고 언뜻언뜻 보였던 붉은빛이 선명히 보이기 시작했다.

여행을 자주 갔던가? 풍경이 가득한 지도를 보고, 색의 선명도가 강한 화소 높은 텔레비전을 보면서 picture element를 터득했는데...


나는 보았다.

텔레비전 화면을 구성하고 있는 최소 단위의 명암의 점이 가득해서 선명도가 너무 진한 풍경이 내 눈앞에 그림처럼 펼쳐져 있는 것을.


안개가 걷히고 노란 길이 끝도 없이 펼쳐져있는 것이 한눈에 다 보일 때 생각했다.

붉은 단풍이 춤을 추고 노란 은행나무가 끝도 없이 펼쳐지는 메타세쿼이아 길에서 [겨울연가] 배용준과 최지우는 행복했는데,

사각거리는 노란 은행나무잎 위로 휠체어 바퀴 힘들게 밀어주고 있는 그녀는 왜 안쓰러울까.


그녀는 우리일까?

"아, 너무 행복해... 힘들지?"

"언니가 행복했으면 됐다. 나도 좋다"


언제까지 우리는 우리일까?


꿈에서는 참 수월했는데,

약속이 마침내 이루어지고 닫힌 창문이 열리고

그의 말이 나의 살갗에 따뜻한 입김으로 뿌려지니 따뜻한 온기에 취해

풍경처럼 그에게 안기면 되는,

꿈은 참 수월했는데.


그는 육지에 있고

나는 섬에 있다.


장애인으로 태어나 뜨거운 살갗 비비며 행복한 주름살인지 찡그려서 생긴 주름살인지 확인했던 남자가 여럿인데, 그들은 육지에 있고 나는 섬에 있다.

안개처럼 흐려진 그들의 언어에 여전히 취해있는 나에게

안개가 걷히고 선명해진 풍경이 다가온다.

여전히 우리였던 그녀들이 보인다.


엄마가 나의 그녀였고,

친구들이 나의 그녀였다.


휠체어가 끝도 없이 굴러갔다.

강가를 구르고, 낙엽 위를 구르고 진흙 위를 구를 때 나는 물었다.

"힘들지?"


"언니가 행복하면 됐다. 나도 좋다"


언제까지 우리가 우리일까?

안개가 걷혀야 보인다.


햇살이 물 위에 잘게 부서져 물살이 움직일 때마다 작은 파편이 입자를 더 잘게 쪼개고 마치 하얀 보석이 물 위에서 반짝반짝 빛나는 잔 물결.

그녀는 잔 물결처럼 늘 옆에 있었는데...


눈을 가린 안개가 걷혀야 보이는 그녀는 윤슬 같은 보석이었다.


잡을 수없는 허상을 손가락을 걸고, 달콤한 호흡으로 나를 잡아두기만 했던 그는 육지에 있는데

그녀는 내 옆에 있다.


몸이 허하면 마음도 허해진다며 5만 원짜리 6장을 한 장처럼 주머니에 넣어주는 엄마는 말했다.

"엄마가 죽기 전까지는 너는 막내고 나는 너의 엄마다...."


익스트림 거친 여행을 좋아하고 캠핑을 좋아하고 차박을 하고 싶다는 나에게

"카라반 여행 하자"

나는 돈 한 푼 들이지 않고, 휠체어 바퀴 힘들게 밀지 않고, 빛깔 선명한 가을을 선물 받았다.


나는 기도했다.

안락한 카라반에서 기도했다.


"그녀가 우리여서 감사합니다.

뿌연 안개 뒤에 낙원은 없고

지금 내 눈앞에 펼쳐진 선명한 가을이 내 것이고

내 옆에 있는 그녀들이 우리라는 것을 잊지 않겠습니다."


'

섬 곳곳에 휠체어 타이어 바퀴 자국이 선명하게 찍혀간다.

꿈처럼 걸어보자.

지금, 이 순간을 살자.


그는 육지에 있고 나는 섬에 있다.


이제 남이섬은 남의 섬이 아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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