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 4.

거짓도 사랑할 수 있는가.

by Sabina


[일러두기:본 소설은 실화에 근거를 둔 허구입니다. 창작 소유권은 황정미에게 있습니다]


그 무렵, 내가 좋아하는 단어가 있는데, 어슬렁 거리기, 다리 꼬기, 책보다 졸기, 그리고 맨드라미, 맨드라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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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때 마침 승진 시험이 코 앞이고, 또 때마침 바쁜 시간를 쪼개서 간 곳이 도서관이니 빽빽한 도서 열람실에서 읽어주기를 기다리는 책들은 외면해야하고 연두색 형광 줄은 리듬을 타야 하는데...졸립다.

변명을 해보자면 책을 보다가 졸린 것은 좋아하는 책이 아니라 승진을 위한 시험서였기 때문이고, 그가, 표정없는 그가 없기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맞은편 자리에는 하필 그가 없고, 노트북으로 얼굴을 가리고 히히덕 대는 연인이 있었다.

그래, 다리를 꼬면 덜 졸릴 거야.

아니 어슬렁거려야 해. 서가에 꽂힌 책 한 권을 꺼내야겠다.


독일인이고, 독일인의 사랑을 논하고, '독일인의 사랑'을 쓴 막스 뮐러는 페이지마다 그의 숨결을 넣었다. 그리고 그가 사랑하는 마리아를 활자 밖에 있는 나로 환생 시켰다.

'훗, 이런 사랑은 존재할리가 없어. 이렇게 아름답고 순결한 남자가 있겠냐 말이다.'


{우리는 서서 걷는 법, 읽고 말하는 법을 배운다. 하지만 어느 누구도 우리에게 사랑을 가르쳐 주지는 않는다. 한 송이의 꽃도 햇빛이 없으면 만개하지 못하듯, 인간도 사랑없이는 한 순간도 살아갈 수 없다.]


'사랑없이도 살아갈 수 있다. 두 번의 이혼을 하고도 코 앞에 닥친 승진 시험만을 생각하고 표정은 숨기며 곁에는 있고 싶어할 수 있다고.'

'독일인의 사랑'에서 소년은 감격했다. 자기를 타인이라는 울타리 밖의 사람으로 보지 않아서, 사람이 떠나도 내 마음 속에 사랑하는 사람이 여전히 남아있다면 그 또한 사랑이라고 말하는 마리아 때문에 소년은 감격했다. 나는 순결한 마리아가 될 수 있을까? 이렇게 말해주면 남자들은 감동할까?


시험서에 밑줄을 그었던 내 형광 펜은 도서관 서가에서 잠시 빌린 책에 소년이 감격해서 뱉은 그 문장에 진한 연두색 빛을 물들였다.

[이 반지를 나에게 주고 싶거든 차라리 네가 가지고 있어. 네 것은 모든 게 다 내 것이니까.]


모른척 해야 한다. 손으로 지은 죄를 무마하기 위해 서가에 '독일인의 사랑'을 다시 꽂으며 최대한 조용히 어슬렁 거려야 한다.

높은 서가 저 편, 높다란 창문 위쪽부터 태양 빛이 쏟아져 들어왔다. 나가야겠다. 최대한 어슬렁거리면서.


회색 건물, 그나마 독특한 건물을 지향하는 듯 한 쪽 벽면에는 벽화가 그려져 있고, 도서관 옥상부터 사람들이 밟는 땅까지 굵은 철 기둥이 조형물처럼 꽈리를 틀고 내려왔다. 멋진 건물이다. 책을 읽는 곳이 아니라 웅장한 오케스트라 반주에 맞춰 소름끼치게 잘 부르는 성악가에게 앙코르 박수를 보내는 공연장 같은 곳, 그 꽈리를 틀어서 내려 온 철 기둥아래 맨드라미가 있다.


회색과 금속, 그 아래 붉은 빛을 토해내는 맨드라미가 나를 반기고 있다. 끝이 뾰족하고 원 줄기 끝에 닭의 볏 처럼 생긴 꽃이 흰색, 홍색, 황색으로 피어 있는 맨드라미 정원이 있다. 오늘은 그가 없다. 내 앞에 맨드라미가 있다.


건조에 강해서 물을 자주 줄 필요가 없다고 들었다. 작열하는 태양아래 숨이 더 살아나서 더 건조해져도 더 빛을 발하는 맨드라미, 그 맨드라미가 내 눈앞에 있다.


-안녕하세요.

아...건조한 목소리다.

-아, 안녕하세요...

놀라야 하는데, 분명 놀랬는데 반색하는 촉촉함이 내 인사에 들어가 있다.

-맨드라미를 좋아하시나 봅니다.


보고 싶었다고 말할까?

-오늘은 늦게 오셨네요...


그는 대답하지 않았다.


언젠가 나는 쇠창살 넘어 고색창연한 건물 안을 훔쳐 본 적이 있었다. 안은 텅 비어 있었고 사람의 흔적이 보이지 않아 냉기가 돌고 을씨년스러웠다.

다시 질문했다. 용기가 필요했는지는 모르겠다.

-무슨...공부하시나 봐요...?

그는 대답하지 않았다. 그 순간에도 냉기가 돌았던 그 건물이 떠오르고, 그 건물이 고색창연했다고 기억하는 이유는 뭘까?

표정이 없는 남자의 얼굴에서 왜 하필이면 삐죽대는 입꼬리가 미소를 짓고 있고, 날카로운 눈매는 생각이 깊은 지적인 남자 만의 특권이라고 생각했을까.


-먼저 들어가겠습니다.


어슬렁거려야 한다. 바로 따라갈 수 없다.


기온이 떨어지면 꽃색이 더 강해지고, 20°C이하에서 일장이 필요한 맨드라미가 14시간 이상 일장을 해주면 개화가 늦어진다는 그 상식이, 느리게 걸어가는 그의 걸음마다 박혔다. 내가 맨드라미를 좋아한 이유는 무엇일까. 이미 풍부한 상식으로 알고 있는 꽃이고, 닭의 볏을 닮아 눈 길을 끌고, 회색 건물 아래 노랗게 하얗게 빨갛게 모여 있어서 시선을 끌기 때문일까.

어쩌면

그가 있는 곳에 맨드라미가 있기 때문일 거다.


이 무렵 내가 좋아하는 단어는 맨드라미였고, 나는 그를 생각하고, 그를 보기 위해 도서관으로 갔다.

막스 뮐러의 아버지는 슈베르트의 《겨울 나그네》를 썼다.

마리아를 사랑한 막스 뮐러는 순결한 사랑을 예찬하면서《독일인의 사랑》을 썼다.

나는 승진 시험이 코 앞인데, 그를 보고 그를 쓰고 있다. 그리고 그를 사랑하기 시작했다.


내 기억의 처음은 말한다.


"거짓도 사랑할 수 있는가?"


[네이버카페 힐링스페이스에서 연재했던 소설입니다. 퇴고 중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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