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짓도 사랑할 수 있는가.
[일러두기:본 소설은 실화에 근거를 둔 허구입니다. 창작 소유권은 황정미에게 있습니다]
시작은 커피 한 잔, 그리고 책 이야기.
다시 커피를 리필하고 그는 살아 온 이야기를 시작했다.
누구나 하나쯤, 애착 소품이 있다지. 손에서 떠날 줄 모르는 휴대폰, 그는 반복적으로 카카오톡 메시지를 확인했다.
'좋아하는 사람이 있나 봐...기다리는 메시지가 있나봐...'
마셔버린 커피 잔에 생각없이 손이 간다는 건, 앞에 있는 나는 이차적 대체물일 수 있다는 생각으로 소외감이 들자 답답했다.
창문을 열어 환기 하듯 휴대폰 액정화면에 고정되어 있는 눈을 나에게 돌리려면 환기가 필요했다.
-그래서요?
빽빽한 줄이 가득한 책에 연두색 형광 펜으로 줄을 치며 혼자 중얼거리는 사람이 아니던가. 그는 혼자 이야기했고 그의 눈은 초점이 없었다.
-부모님의 지원없이 컸습니다. 혼자 공부했고 혼자 돈을 벌었고 혼자 지내고 있습니다.
안심이다.
혼자 지낸다는 그가 의미없이 빈 커피 잔으로 손을 갖다댈 때,나는 보았는데... 하얀 손가락, 그것도 네 번째 손가락에 끼고 있는 반지를.
아, 잠시 생각해보자.
왼 손 네 번째 손가락에는 고대 시대부터 약혼이나 결혼반지를 낀다고, 그 네 번째 손가락 약지에는 사랑이 흐르는 정맥인 베나아모리스가 심장에 직접 연결되어 있기 때문이라고.
그리고 오른 손 네 번째 손가락에 반지를 끼면, 원하는 모든 일에 의연하게 대처를 할 수 있기 때문이라고...그렇게 읽었다.
다행이다.
아마 기다리고 있는 메시지는 여자의 메시지가 아닐 수도 있다.
-그래서요?
이런, 같은 질문으로 반응을 보이자 과거 내면 여행으로 들어가려고 미간을 찌푸렸던 그가 나를 한번 쳐다보고는 다시 표정이 사라졌다. 형광 펜으로 밑줄을 치며 중얼대면서 공부하는 그런 사람에게는 적어도 그가 말한 단어의 꼬투리라도 인정했어야 했다.
'그랬구나...'정도 말이다.
잠시 침묵이 흘렀다.
-와인 할래요?
이때는 말이다. 흐릿한 청각으로 끈적거리는 눈 빛으로 머리카락 사이로 손가락 몇 개를 집어넣고 쓸어 넘기면서 이야기해야 한다. 왜 그런지는 모른다.
-와인 이요?
맨드라미가 흐드러지게 핀 그날, 그를 따라 들어간 도서관 맞은편 그 자리에서 다시 그가 밑줄을 그으려고 한 그날 말이다. 그는 내게 다가와 물었다.
-혹시 형광 펜 있나요?
사람은 마음을 느꼈거나 가치를 알 때 인연이라고 한다. 그는 그가 가진 형광 펜을 나도 가지고 있다는 것을 아는 거다. 그는 내가 형광 펜으로 밑줄을 긋고 입으로 중얼거리며 암기를 한다는 것을, 결국 우리가 인연이라는 것을 아는 거다.
그렇게 만났다. 그리고 나는 그걸 인연이라고 규정하고 표정없는 그 남자가 가지고 있지 않은 것을 채워주기 시작했다. 벤츠 e 클래스 익스클루시브 조수석에 앉은 그에게 슈베르트 '겨울 나그네'로 그의 마음을 열어주면 그는 말했다.
-슈페르트는 다가 올 죽음을 예감하고 가난에 시달리다가 고독하게 죽어갔습니다. '겨울나그네'를 완성한 다음 해에 죽었습니다. 사랑에 실패한 청년이 추운 겨울 연인의 집 앞에서 이별을 고하고 눈과 얼음으로 뒤덮힌 들판으로 방랑의 길을 떠났고...
이쯤에서 나는 청각이 흐려졌다. 마음을 느끼고 가치를 알아가는 것이 인연이라고 하지 않았나. 그가 가진 지식을 알고 싶은게 아니다. 폭풍치는 격정을 노래 한 가사나, 나뭇잎에 흔들리는 느낌까지 전해지는 그런 분위기에 취하고 싶은 건데.
그런데 말이다. 그 날 나는, 그렇게 건조한 목소리로 알고 있는 지식을 나열하는 그에게 운전대를 잡고 있던 나의 오른 손을 그의 허벅지 위에 포개면서 물었다.
-그래서요?
나의 눈은 이미 뜨거웠고, 그의 몸은 이미 뜨거워졌다.
그때 '겨울나그네'의 고뇌하는 청년은 한밤중에 불어닥친 돌풍 속을 뚫고 있었다. 슈페르트의 가곡 '보리수'가 흔들리고 있었다.
-와인 할래요?
몸이 뜨거워지고 있었다. 단정하게 입은 와이셔츠 단추를 두개 쯤 풀어 헤치고 얼굴이 붉어진 뜨거운 얼굴로 다시 물었다.
-한잔 더 할래요?
붉은 색 얼굴이 어두운 얼굴로 바뀌는 건, 토하듯 털어내는 과거의 아픔 때문은 아니다. 그는 습관적으로 미간을 찌푸리고, 작은 입술로 중얼거렸다.
땅에 떨어진 나뭇잎에 자신의 마음을 투영한 겨울 나그네 처럼, 그는 극적인 고조를 원하는 것이 맞다. 그렇지 않다면 아픈 이야기를 하는 그 와중에도 와인을 권하고 더 가까이 내 옆으로 다가올 리는 없다. 현실에 대한 절망이 환상을 불러 온다고 한다. 그는 절망을 이야기 하면서도 그만의 세계를 보여주고 있었다. 나는 그 절망 속에서 환상을 보고 있었다. 그가 말하는 과거가 아팠지만 그가 보여주는 행동이 모든 일을 의연하게 대처하는 자신감으로 보였다. 마치 오른쪽 네 번째 손가락에 낀 반지 처럼 그는 나란 여자가 연약한 나뭇잎이라는 것을 알고 의연하게 말했다.
-자고 가도 됩니다.
단호하고 의연한 '...다'로 끝나는 그의 말이 내게는 우울한 그림자를 가장한 환상적인 귀족 같다고 생각했다. 심지어 그가 말한 모든 말이 거짓이라고 해도 상관없다고 생각했다.
순간, 그의 카카오톡 메시지가 오기 전까지는 말이다.
[네이버 카페, 힐링스페이스에 연재했던 소설입니다. 퇴고 중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