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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지수 Jul 31. 2023

8_기억의 시간

경애왕의 무덤으로 전해지는 경주 경애왕릉



유월엔 모녀투어를 신청해 주신 분이 계셨다.


경주와는 반대편, 광주에서 오신 분들이었는데 정말 즐겁고, 유쾌하게 시간을 보냈다. 

6월의 테마는 ‘기억’

3월엔 벚꽃, 4월엔 벚꽃 그 이후, 5월엔 봄을 테마로 투어를 진행했다면

6월은 기억이었다. 앞의 시간들과는 다르게 계절성을 좀 뺀 주제로 진행을 했는데 

6월은 1년의 절반인 시점이다보니 연초에 세웠던 계획들, 그리고 지나온 시간들을 돌아보는데 좋은 시점이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기억’이라는 것에 대해서 한번 생각해 보게 되는 계기가 될 것 같기도 했고. 

지나간 시간에 대한 흔적인 기억. 우리는 살면서 기억으로 갖고 있는 과거의 시간들을 정확하다고 생각하지만 사실 그렇지 않은 경우가 더 많다. 오히려 내가 보고 싶은대로, 듣고 싶은 대로, 기억하고 싶은 대로 기억하는 경우들이 더 많다. 


가령 내가 과거에 부끄러웠던 경험을 한 일이 있다고 가정해보자. 그 일을 겪을 당시엔 부끄러운 마음이 커서 기억하고 싶지 않은 경험으로 여겨지겠지만, 시간이 흘러보면 그때의 부끄러움보다 그 시간을 잘 지나온, 견뎌온 나 자신의 모습이 더 기억에 크게 남을 수도 있다. 이처럼 사람의 기억이란 정확하지가 않아서 (결국 기억에는 나의 주관적인 판단이 들어가기에 애초에 불완전 할 수 밖에 없다. 어떤 현상에 대한 사실과 그 현상을 보고 내가 내린 판단이 같을수도 있지만 다를수도 있으니까) 


역사도 그와 비슷하다. ‘있는 그대로를 기록한다’는 것이 역사를 기록하는 사람이 가장 중요하게 여겨야 하는 원칙이지만 어쩔수 없이 기록하는 사람도 사람이기에 그가 살고 있는 시대, 그가 속한 사회의 기준에 따라 시간을 기록하게 된다. 


조선시대의 기준과 지금의 기준이 많은 부분에서 다른것 처럼. 

지금의 기준으로 그때의 기록을 보면 고리타분하고, 이해가 안되는 것들이 많지만 그 시대엔 그게 일반적인 사람들의 사고방식이었고 통용되는 원칙들이었다. 


기록으로 남아 있는 것들도 그러할진데 우리의 기억은 또 어떨까. 

그래서 기억이라는 주제로 이야기 할 수 있는 곳들을 정해서 6월의 투어 코스로 운영했다.


첫번째 코스는 삼릉.


경주 남산의 서쪽편에 있는 경애왕릉에서 시작해 삼릉, 배리석불입상 그리고 지마왕릉을 거쳐 포석정까지 이어지는 코스다.


경주의 왕릉은 선덕여왕릉과 무열왕릉을 비롯한 일부 왕릉을 제외하고는 모두 묻힌 사람이 누구인지 알 수 없는 무덤들이다. ~왕릉이라고 이름 붙은 곳들은 모두 조선 후기, 당시 경주 지역에 남아 있던 구전을 바탕으로 정리했고 이후 경주 김씨, 밀양 박씨, 경주 석씨 문중에서 능을 관리해 오면서 굳어졌다. 그래서 어떤 왕릉은 가보면 명칭에 ’전‘ 글자가 붙어 있다. ~왕의 무덤으로 전해진다는 의미다. 


이곳 경애왕릉과 삼릉도 마찬가지로 무덤의 주인공이 경애왕과 세 명의 왕 (8대 아달라, 53대 신덕, 54대 경명)인지 확실하지 않다. 특히 삼릉의 경우 8대 임금인 아달라왕의 무덤과 53대 신덕왕은 700년 가까이 시차가 있다. 비록 신덕왕이 아달라왕의 후손으로 즉위한 박씨 성의 왕이긴 하지만 단지 그런 이유로 경명왕과 함께 능을 조성했다고 보긴 어렵다. 


경애왕릉의 무덤 역시도 마찬가지다. 무덤의 주인공이 경애왕인지는 알 수 없다는 것을 전제하고 바라보자. 


신라 55대 임금인 경애왕은 신라의 마지막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인물이다. 경명왕의 뒤를 이어 임금이 된 경애왕은, 그가 어떠한 정책을 펼쳤는가에 대한 부분보다 ‘포석정’ 이라는 공간과 이어져 망국의 군주로 우리에게 기억된다. 


삼국사기에 기록된 내용을 살펴보자. 



927년 가을 9월에 견훤이 고울부(현재의 영천시 일대)에서 우리(고려) 군사를 습격하였다. 왕이 태조에게 구원을 요청하자, 장수에게 명하여 정예 병사 10,000명을 내어 가서 구원하게 하였다. 견훤은 구원병이 아직 도착하지 않았으므로, 겨울 11월에 갑자기 왕경에 침입하였다. 왕은 비빈, 종실 친척들과 포석정에 가서 잔치를 열고 노느라 적병이 이르는 것도 깨닫지 못하였다. 갑작스러워 해야 할 바를 몰라 왕과 왕비는 달아나 후궁으로 들어가고, 종실 친척, 공경대부와 부인들은 사방으로 흩어져 달아나 숨었다. 적에게 사로잡힌 자들은 귀천을 가리지 않고 모두 놀라고 두려워하여 땅을 기면서 종이 되기를 구걸하였으나 죽음을 면하지 못하였다. 견훤은 또 그의 병사들을 풀어서 공사의 재물을 거의 다 협박하여 빼앗고, 궁궐로 들어가 차지하고는 좌우에 명하여 왕을 찾게 하였다. 왕은 왕비와 첩 몇 명과 함께 후궁에 있다가 군대 진영으로 잡혀갔는데, 견훤이 핍박한 왕을 자살하게 하고 왕비를 강간하였으며, 부하들이 왕비와 첩을 간음하도록 내버려 두었다. 곧 왕의 친척 동생을 권지국사로 세우니, 그가 경순왕이다.


   <<삼국사기>> 권 제 12 <신라본기> 12 경애왕




우리에게 포석정이라는 공간이 유흥의 공간으로 기억되는 이유다. 물론 삼국사기에 기록된 이 기록이 정말 진실일수도 있다. 하지만 교차 검증을 할 수 있는 다른 자료들이 많지 않기에 정말 유일하다고 보기는 어렵다. 경애왕이 왕위에 있었던 기간은 비록 4년으로 짧았지만, 즉위 첫해 고려에 사신을 보내 백제를 견제했고, 이후 중국 후당에 사신을 보내 조공을 하며 대외적으로도 신라가 건재함을 보여주려 노력도 했다. 또한 고려가 백제로 쳐들어갈 때 동맹군을 파견하기도 했다. 


고려와 후백제가 한반도의 패권을 두고 다투던 그 때, 지금의 경주시 전체도 아닌 경주 일부 외에는 전혀 영향권을 행사할 수 없었던 신라의 현실을 생각해 볼 때 왕이 된 경애왕이 할 수 있는 일은 많지 않았을 것이다. 나라의 운명이 기울어져 가는데 지도자 한 명의 힘으로 흐름을 바꾸기란 매우, 어려우니까. 

  그런 현실을 잊고자, 술로 현실을 외면하고자 정말로 포석정에서 잔치를 벌였던 것인지 아니면 신라왕실의 성지와도 같았을 서남산 일대에서 선대 왕들에게 위기를 헤쳐나갈 해법을 구하고자 제사를 지냈던 것인지 그 시대를 살았던, 눈으로 보았던 이들 중 현재까지 살아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기에 우리는 알지 못한다. 남아 있는 기록으로 ‘추정’해 볼 뿐. 


나 역시도 과거엔 그를 한심한 군주라고 생각했었다. 하지만 점점 삶을 살아가는 시간이 길어질 수록 왕이 아닌 한 명의 인간으로서의 삶을 생각하게 되면서 기록으로 남아 있는, 우리에게 기억되는 경애왕의 모습과는 다른 모습을 생각하게 되었다. 고조선부터 조선까지 여러 왕조가 들어서고 사라져가면서 많은 군주들이 거쳐갔다. 그 중에서는 광개토대왕이나 무열왕, 태조왕건, 세종대왕 같이 한국인이라면 누구나 아는, 후대에도 귀감이 될 만한 업적들을 남긴 군주들도 있었지만 그런 왕이 있었는 지 조차 이름도 알 지 못하는 (실제 고려의 2대 임금인 혜종은 왕건의 첫째 아들로 왕위에 올랐지만, 역사서에서 왕건 다음으로 대표적인 고려의 군주로 소개되는 인물은 4대 광종이다) 왕들은 물론 명종이나 인조처럼 본받지 말아야 할 왕들도 존재했다. 

  우리는 흔히 왕이라고 하면 일반 사람들과는 다른 뛰어난 능력을 가지고 있는 영웅적 면모를 가진 사람들이라고 생각하기 쉽지만, 사실 그들도 한 명의 인간이었고 어찌보면 자신의 삶을 스스로 선택할 수 없는 운명의 굴레를 평생 지고 가야 하는 사람들이었다. 나라를 통치하는 지도자의 길이 자신과 맞는다면 그 삶이 더할나위 없이 좋겠지만, 기본적으로 나라를 통치한다는 것은 사람과의 관계를 능숙하게 해낼 줄 알아야 하는 분야이기에 그것을 어렵게 느끼는 사람이었다면 왕이라는 역할을 해내기가 무척 어려웠을 것이다. 

  그런면에서 조선 태종의 첫째 아들인 양녕대군의 삶을 다른 시각에서 바라보면 새로운 모습이 보이기도 한다. 기록에서처럼 과연 양녕은 정말로 방탕하고 성격이 괴팍했을까. 어릴적 부터 보아왔던 왕실에서의 피바람과 한 집안에서 지낸 외삼촌들이 아버지의 손에 죽어나가는 그 상황들을 성인도 되지 않았던 청년이 오롯이 견뎌내기엔 어렵지 않았을까. 


경주의 왕릉을 다녀보면, 그리고 기록에 남아 있는 그들의 흔적을 살펴볼 때마다 한 사람으로서 무탈하게 왕위를 다음 계승자에게 물려준 것 만해도 참 대단하다는 생각을 많이 한다. 외부의 침입을 막아내는 것은 물론 호심탐탐 왕의 권한을 넘어서려고 하는 신료들과의 치열한 힘겨루기를 해야 하는 것은 웬만한 정신력이 없으면 버티지 못할 일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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