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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오뉴 Jan 31. 2020

견딘다는 것은 오로지 마음 떨리는 일

육교를 건너며 - 김정환


육교를 건너며

나는 이렇게 사는 세상의

끝이 있음을 믿는다

내 발바닥 밑에서 육교는 후들거리고

육교를 건너며 오늘도 이렇게 못다한 마음으로 

나의 이 살아있음이 언젠가는 끝이 있으리라는 것을 

나는 믿고

또 사랑하는 것이다

육교는 지금도 내 발바닥 밑에서 몸을 떤다

견딘다는 것은 오로지 마음 떨리는 일

끝이 있음으로 해서

완성됨이 있음으로 해서

오늘, 세상의 이 고통은 모두 아름답다

지는 해처럼

후들거리는 육교를 건너며

나는 오늘도 어제처럼 의심하며 살 것이며

내일도 후회 없이

맡겨진 삶의 소름 떠는 잔칫밤을 치를 것이다

아아 흔들리는 육교를 건너며

나는 오늘도, 이렇게 저질러진 세상의

끝이 있음을 나는 믿는다

나의 지치고 보잘것없는 이 발걸음들이

끝남으로, 완성될 때까지

나는 언제나 열심히 살아갈 것이다


_김정환



이 시를 처음 읽었던 건 5년 전 초가을쯤이었다. 


퇴근하고 마음이 어려울 때마다 역삼역에서 쭉 걸어 내려가면 있는 강남역 알라딘에 들러 시집을 뒤적이곤 했었다.

그날도 평소처럼 시집이 있는 곳을 서성이다 "딸아, 외로울 때는 시를 읽으렴"이라는 눈에 띄는 제목의 시집을 발견했다. 제목이 마치 "아프니까 청춘이다" "미움받을 용기" "언어의 온도"가 주는 느낌과 비슷해서, 괜한 반항심에 펴보지도 않았던 시집이었다. 그 당시의 나는 인문학이 fad가 되어 소비되는걸 정말 싫어했었다. 또한 엮은 시집이라면 장영희 교수님처럼 시를 통해 본인의 삶에서 비롯된 통찰력을 뿜어내는 것만 좋아하는 나에게 그저 엮여있기만 한 이 시집은 매력적이지 않았었다.


하지만, 수록된 시의 목록을 보며 나의 생각은 완전히 바뀌었다. 이 시집은 바로 사야겠다고 결심했고 그 목록에 있던 리스트 중 하나는 바로 이 "육교를 건너며"였다.  이 외에도 이문재 시인의 농담, 릴케의 젊은 시인에게 주는 충고, 그리고 칼릴 지브란의 함께 있되 거리를 두라 등의 나만의 명시들이 있었다.


그때의 나는 "견디는 것, 살아내는 것"에 대한 고민이 있었다.

일을 하는 것, 그리고 불확실한 앞날을 견디고 살아내는 것에 대한 두려움과 좌절이 있었고 계속 답을 찾고자 발버둥 쳤었다. 그런 내게 김정환 시인이 명쾌하게 말해주었던 것이다.

견딘다는 것은 오로지 마음 떨리는 일이고, 내가 견디는 하루들은 나에게 맡겨진 삶의 소름 떠는 잔칫밤인 것이다. 견디는 삶이 (아이러니하게도) 잔칫밤이라니! 그리고 끝이 있으니 열심히 살아가 보겠다!라는 약간 자조적이면서 희망이 조금 담긴 메시지라니. 

처음엔 조금 허탈했다. 뭔가 어마어마하게 큰 의미가 있지 않을까 싶었다. 그런데 계속 생각하다보니, 그래 내 의지와는 다르게 주어져있는 삶의 끝이 있음을 믿고 견디며 열심히 살자!라는 간단한 메시지를 일상적으로 풀어냈지만 너무 너무 아름다운 표현들이었다. 그리고 이 시를 몇번씩 읽고 나서,  견뎌야 하는 모든 상황에서 한 번씩 이 문장을 되뇌곤 했다. 거짓말처럼 효과가 있었다.


김정환 시인을 찾아보니, 서울대 영문과를 졸업하였고, 1980년 창작과 비평을 통해 등단하였다. 그리고 그는 "시를 폭포처럼 쏟아”낸다는 평을 받을 정도로 다작하는 시인이라고 한다. 

하, 이렇게 종종 영문과를 졸업해 활동하는 시인들을 보면 마음 깊은 곳에 좌절감이 오면서 동시에 괜한 뿌듯함이 있다. 지금이야 영문학과 전혀 상관없는 길을 걷고 있지만, 마음 깊은 곳에는 50살이 넘어서 자식들이 좀 자리 잡으면 다시 한번 영시를 공부해보고 싶다는 생각이 아직까진 있어서 그런가 보다. 


2019년의 다사다난했던 열두 달을 잘 견뎌내다 보니 끝이 왔고, 어느덧 2020년 1월의 또 끝이 와버렸다.

2020년의 1월도 끝날 것 같지 않았는데, 금세 견디며 소름떠는 잔칫밤을 보내다 보니 끝나버렸다. 

이렇게 모든 것에는 끝이 있으니 그냥 한번 좀 열심히 살아봐야겠다, 2월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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