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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지선 May 14. 2018

선배와 병맥주

금주 또는 음주 일기 03

옛날 기억을 떠올리자니 갑자기 나이를 실감하겠다. 불과 몇 년 전 같은 그때의 기억은 벌써 수십 년 전으로 멀어졌고 그 이야기들은 '호랑이 담배 피우던 시절'에나 있었던 고리타분한 고전이 되었다. 무튼 시작했으니 달려 본다. 어디가 끝일 줄 모르겠지만...


대학을 계열별로 입학해서 '영문과'에 진학한 것은 2학년 때였다. 당시 4학년 선배들은 우리에게는 하늘에 떠있는 별들과 같은 존재였는데 별들을 그리 자주 보기도 어려웠다. 4학년 정도 되면 그다음을 준비해야 하기 때문에 대학원 준비를 위해 공부를 하거나 군대를 준비하며 밖으로 놀러 다니거나, 과사무실에서 알현 가능한 선배들은 많지 않았다. 그중에 빨간 셔츠에 청바지를 즐겨 입고 다니던 L 선배가 있었는데 뛰어난 웅변가였다. 그때 선배들 중에는 말 잘하는 사람들이 유독 많았다. 물론 운동권이었다.


선배들은 늘 존경하면서도 두려운 존재였는데, 나는 특히 L 선배를 좋아했다. 한 학년 윗 선배들은 '선배'임을 강조하기 위해서였는지 목에 힘이 들어가고 늘 우리들에게 공부 안 한다고 잔소리를 해대었다. 더군다나 우리 학번은 졸업정원제 이후에 최대 인원이 몰려 들어가 이름 외우기도 힘들고, 쪽수는 많은데 유독 놀기 좋아한다는 소리를 늘상 선배들로부터 들었다. (물론 우리는 선배들을 '똥파리'라며 놀렸다. 그것도 어쩌다 술자리에서나 가능한 일이었지만)


반면 4학년 선배들은 좀 더 여유가 있었다. 3학년들에게는 그들도 잔소리 많은 선배였겠지만, 우리에게야 뭐 그럴 필요까지 없었으니까.


특히 L 선배가 기억에 남는 것은 졸업하기 전 12월에 술을 사주었기 때문이었다. 그땐 누구든 밥 사주고 술 사주는 사람에게 충성했다. 겨울방학에 우연히 과사무실에서 만났는데 술을 사주겠다고 해서 놀라고 감사한 마음을 가지게 되었다. 그것도 신림사거리에 있는 카페에서 무려 '병맥주'를 사주었다.


지금 생각하면 당시 세상은 어디나 '딱딱했다'. 융통성이라고는 찾아보기 어려웠고 교조적인 데다 흑백 논리가 사람을 판단하는 기준이 되었다. 운동권이냐 아니냐 남자냐 여자냐 공부를 잘하냐 못하냐 등등으로 나눴고 그중 하나는 좋은 것 그 나머지는 안 좋은 것으로 가르려 하는 분위기였다.


술은 막걸리나 소주를 마셔야 '민중의 삶'을 이해하는 인간으로 인정받을 수 있고 맥주를 마시는 것은 학생 신분에 맞지 않는 것으로 이미 기준이 정해졌다. 사실 말은 맞았다. 학생들이 무슨 돈이 있어 맥주를 마시겠나.. 자연스레 선택하면 소주나 막걸리를 마시는 게 당연했다. 그럼에도 친구들 몇 명 모여서 맥주 마신 것이 선배들 귀에 들어가면 '너네는 맥주 마시고 다닌다며?' 비아냥을 견뎌야 했으니... 애주가의 입장에서 보자면 술에 대한 극심한 불평등 시대를 살아야 했던 것이다.


어쨌든 L 선배가 술을 사주겠다고 한 것도 고마운데 그것도 병맥주라니! 보통 선배가 술을 사주는 것은 흔한 일이 아니어서 일을 시키기 위한 미끼인 경우도 종종 있었는데, L 선배는 그저 술잔을 채우며 남은 동안 대학 생활 잘 보내라며 덕담을 해주었다.


사람의 인연이란 참 무서운 것이, L 선배가 술 사준 은혜를 몇 년이 지나고서야 갚을 수 있었다. 졸업을 하고 전자신문에 입사한 후 노조위원장으로 열일 하시는 L 선배를 보좌하여 열심히 노보를 만들었다. '병맥주'의 고마움은 노보에 고스란히 담겨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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