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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지선 Dec 23. 2018

‘숭늉’이 있는 삶

나의 리틀 포레스트 (1)

먹는 재미로 살아온 나의 미식 생활에 빨간 등이 켜졌다 . 어느때부터인지 간절히 먹고픈 것이 별로 없어졌다. 더욱 심각한 것은, 식당에서 밥을 먹었을 때 만족도가 그리 높지 않다는 것.


인테리어에만 잔뜩 힘을 준 프랜차이즈 식당의 맛은 대체로 ‘중간’에 맞춰져 감동이 없다. 예전엔 식당 아주머니의 아무렇게나 차려내는 밥상에도 기본을 잘 지킨 정갈함, 혹은 손맛이 살아 있었는데 요즘 식당의 계산된 상차림은 먹고 돌아 서면 허전할 때가 많다.


외식이 별로 내키지 않으니 집에서 밥해먹는 일이 늘었는데 ‘밥’ 맛에 집착하게 됐다. 사실, 오래 전부터 흰쌀밥을 좋아했다. 밥이 맛있는 식당은 무조건 인정하는 성향이 있었다.


기술이 발달해 전기밥솥의 성능이 휘황찬란해졌지만 맛있는 밥을 먹는 것은 그리 쉬운일은 아니다. 밥솥의 성능은 훌륭하다. 어느 밥솥으로 해도 대체로 막 지은 밥은 맛있다. 문제는 아무리 좋은 밥솥도 오래 보관하면 맛이 있을 수가 없다는 것이다.


최선을 다해 맛있는 밥을 먹기위해 밥솥을 바꿔 보려고 쇼핑몰을 이잡듯 뒤졌다. 과감한 선택과 지름을 무기로 수십년 온오프라인 쇼핑을 즐겨온 나였지만 전기밥솥을 고르면서 심각한 결정장애에 빠졌다. 기능이 뭐가 그리 다양한지, 그리고 모델명은 왜 또 그렇게 많은 건지, 복잡한 영문자와 숫자 조합으로 이루어진 모델명에 따라 어떤 차이가 있는건지, 가격 차이는 왜 그렇게 많이 나는 것인지 아무리 봐도 이해할 수가 없었다. 페이스북 친구들에게 의견도 구해 보았지만 결론을 내릴 수가 없었다.


대체로 의견을 모아 IH 6인용 밥솥을 사기로 마음 먹고 한 두달 쇼핑몰 특가가 뜨기를 기다리던 중에, 부엌 한 켠에서 먼지만 쌓여가던 하리오 냄비를 발견했다. 돌솥과 압력 기능이 조금씩 합쳐진 엄청 무거운 냄비였다. 쇼핑몰 특가 뜨기를 기다리며 어차피 전기밥솥에 보관된 밥을 먹을 것은 아닌지라  냄비 밥을 해먹어 보기로 했다.


묵직한 돌냄비에 밥을 하니, 밥 맛이 예술이었다. 쌀 한 알 한 알이 모두 탱탱하게 살아나는 느낌이랄까. 조금 되게 해도 맛있고 물을 더 부어 진 듯한 밥도 좋았다. 밥 그릇에 담았다가 전자렌지에 데워 먹어도, 전기밥솥 밥 보다 더 나았다.



가장 좋은 것은 바닥에 누룽지가 생긴다는 점이었다. 밥으로 어느 정도 배를 채운 후 구수한 누룽지와 숭늉을 후식으로 먹는 호사는, 한정식 집에서나 가능한 줄 알았는데...

집에서 ‘숭늉이 있는 삶’을 누리게 될 줄이야!



3년 전쯤 산 냄비를 부엌 한 켠에 밀어 두고 먼지만 쌓아 둔 것은, 너무 무겁기 때문이었다. 심지어 어느 순간에는 당근마켓에 팔아 버릴까 생각도 했었는데.. 사람이든 사물이든 인연이 닿는 시기는 따로 있는 듯했다.


주말마다 밥 해먹는 재미에 푹 빠졌다. 밥이 맛있으니 반찬은 김치에 젓갈만 갖춰도 부럽지 않게 먹을 수 있었다.


오늘은 노량진 수산시장에서 사온 반건조 우럭을 쪄서 흰 쌀밥과 함께 먹었다. 들러리로 식탁에 나와 있던 젓갈이며 호박나물, 미역줄기 볶음은 그대로 다시 냉장고로 들어갔다. 돌솥에 지은 고슬고슬한 밥에 짭조롬하며 부드럽고 담백한 우럭 살이 환상의 조합이었다. 물론 밥 한그릇 뚝딱 치우고 딱 맞게 누른 누릉지와 숭늉을 피날레로 장식했다.


아, 이렇게 나 만의 리틀 포레스트를 만들어 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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