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동자들에게 주말은 평온과 안식의 상징이다. 직장인들이 일주일 내내 주말을 기다리며 사는 이유다. 하지만 나의 주말은 더 바쁘고 힘들다. 포케몬고 레벨 37. 이 게임을 해본 사람이면 알아주는 정도의 레벨이다. 게임에서 상급으로 올라간다는 것은, '이쯤이면 충분하다'며 멈출 수 있는 수준을 넘어섰다는 의미인 듯하다. 어쩌다 게임에 빠져 주말을 온통 휘둘려 다니다니... 차라리 이건 중노동이다.
주말의 중노동이 시작된 건 카카오톡에 레이드 배틀 참가자들의 오픈 단톡 방이 생기면서부터이다. 물론 지역별 레이드 배틀 단톡 방이 만들어진 것은 정말 획기적인 일이다. 나이언틱이 전설의 포케몬들을 체육관에 뿌리며 시들해지는 포케몬고 열풍에 불씨를 다시 댕긴 것은 좋았는데 각자 하던 게임을 우르르 몰려다니게 했다. 비이성적인 집단행동을 조장한 셈이다. 처음엔 전설의 포케몬고가 체육관에 뜨자 그 위용에 매료되어 체육관 주변을 배회했다. 열 명은 모여야 전투를 해볼 만한데 사실 열 명 모으기가 말처럼 쉽지는 않다. 체육관 주변을 어슬렁 거리다 싸움도 못해보고 철수하기를 반복하다가 실망할 무렵 IT 강국 시민답게 자발적으로 이런 멋진 방법을 찾아낸 것이다.
영등포-여의도 레이드 배틀 오픈 단톡 방의 방장은 뚜벙님이다. 선유도역 루기아 배틀에 참여하면서 만난 적이 있었다. 전설의 포케몬 루기아를 잡기 위해 스무 명이 넘는 사람들이 순식간에 모였다. 뚜벙님의 지도력으로 사람들은 파란 팀-빨간. 노란 팀으로 나뉘었다. 단톡 방 닉네임으로만 통하는 사람들을 실제 만나는 것은 참으로 신기한 일이다. 하이텔-천리안 동호회 때부터 시작되어 미투데이 SNS 벙개로 이어졌던 모임이 이제는 포고 레이드 배틀 팀으로 번졌다. 익명의 이웃을 만나는 신기함이라니...
전설의 초케몬을 잡기위해 모인 포케몬 트레이너들
우르르 모이다 보니 한 곳 배틀에 참여하다 보면 꼬리에 꼬리를 물고 바로 옆 어디, 그다음 어디로 이어진다. 바로 이 때문에 중노동이 되는 것. 남편과 나 둘이 었다면 고작 여의도에서나 돌아다녔을 것을 당산, 영등포, 선유도 일대를 휩쓸고 다니게 되는 것이다.
그래도 특별한 경험도 하게 된다. 지난 토요일. 영등포-여의도 지역 레이드 배틀 오픈 단톡 방에 가입한 남편 따라 여의도 한강공원에서 벌어지는 [썬더] 레이드 배틀에 참여했다. 우리처럼 부부가 함께 다니는 마이클 님과 함께 참여했는데 젊은 청년 2명과 뒤늦게 헐떡이며 뛰어온 젊은 여성분, 그리고 한강공원에서 가족들과 놀다가 합류한 초등학생 2명이 더해졌다. 초등학생의 입장에서는 횡재한 셈이다. 그들 힘으로는 절대 잡을 수 없는 썬더 배틀에 참여하게 되었으니 말이다. 그들은 심지어 '메타몽'을 전투병으로 앞세워 싸움에 참여했다. -_-
오, 예~! 배틀이 끝나자 환호성이 터지기가 무섭게 초등학생 한 명이 '아, 씨!' 하며 울음을 터뜨렸다. 배틀에서 승리하면 대가로 아이템들이 주어지는데 도구함이 다 차셔 아이템을 하나도 못 받았다고 한다. 너무 웃겨서 빵 터지는 것을 간신히 참았다. 그 아이는 진정으로 분하고 원통해 울고 있었으므로... 아이를 겨우 달래고 다음 장소로 이동하면서 도구함을 정리했다. 아이니까 울음을 터뜨렸을 테지만 같은 일을 당했더라면 나도 낙담했을 것이 분명하니까.
어제는 오전에 강남역을 뛰었다. 한두 명이 전설의 레이드에 참가하는 방법은 사람이 북적이는 곳으로 가는 수밖에 없다. 언제라도 15 ~ 20명의 용사가 포진하고 있는 곳 - 대표적인 장소가 강남역 일대다. 루기아 배틀에 세 번 참가했다. 두 번은 격파는 했으나 포획은 못했고 그나마 한 번은 격파에도 실패했다. 참가인원은 13명이었지만 그중에는 레벨 8, 18도 있었다. 나중에 보니 3-4명이 싸우고 있는 격이었다. 이럴 수가...
강남 일대는 사람이 많아서 배틀 참여가 쉽다는 점은 있지만 역설적으로 그래서인지 오픈 채팅방의 역할은 영등포 채팅방 만 못했다. 우선 시간을 정해도 사람들이 다 도착하기까지 기다려 주지 않고 와서 바로 배틀에 참여하는 그런 식이다. 따라서 채팅방에서의 약속이 뭐 그리 중요하지도 않다. 도착해서 배틀을 할 수 있으면 바로 하고 떠나 버리는 식이다. 그런 면에서는 영등포가 역시 정겹다.
레이드 배틀을 통해 포고에 빠진 사람들과 만나게 되는 것도 은근 재미있다. 4050 남성들은 청바지에 티셔츠 차림이 많고 2030 남성들은 포케몬고 휴대폰 커버 등 액세서리를 챙기는 마니아 스타일이다. 그리고 나름 분석적이다. 뭐는 어떻고 뭐는 어떻고 설명하기를 좋아한다. 젊은 여성들 중에는 은근 패션 센스를 자랑하는 층들도 많다. 티 내지 않게 멋 내는 스타일이랄까. 무엇보다 엄마 아빠와 아들 딸이 많다는 것이 재밌다. 애들 데리고 와서 전설의 포케몬을 잡게 해 주고 뿌듯해하는 엄마 아빠의 미소는 언제 보아도 정겹다.
아, 이 눔의 레이드 배틀 언제나 끝날 런지... 나도 좀 휴일에 쉬어 보잔 말이다. (그러면서 속마음은 곧 나올 칠색조를 꼭 잡아야지.. 다짐하고 있다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