데미안에서 분열된 자아를 하나의 인격으로 통일해가는 한 인간의 성장기를 보여줬다면 황야의 이리에서는 하리 할러라는 자신을 대변하는 인물을 내세워 고뇌하는 인간의 정체기를 보여준다.
편집자의 서문으로 시작된 소설의 구조가 하리 할러라는 캐릭터를 구축하는데 좋은 역할을 한 것 같다. 중간 하리 할러의 끝나지 않을 것 같은 독백은 사실 읽기 너무나 힘들었다. 형이상학적인 단어의 반복과 지난한 문장들이 책을 펴놓고 그 앞에서 몇 번을 꾸벅꾸벅 졸게 만들었다. 아마 많은 사람들이 저 지점에서 책을 덮지 않았을까, 이 작품이 내 머리를 도끼처럼 찍기 위해 잠시 날을 갈았던 것이라고, 긍정적으로 여기고 넘어갔다.
헤세를 상징하는 하리 할러는 '살 수 없음'과 '죽을 수 없음' 사이에서 줄타기를 하는 내면의 탐구자이다. 중년에 이른 그는 예술, 철학, 종교에 박식하며 모차르트와 괴테를 사랑한다. 스스로의 삶에 뚜렷한 가치와 의미가 있을 것이라 믿는다. 그것을 위해 행동하고 괴로워하고 희생할 각오가 되어있다. 하지만 세상은 그런 희생 따위를 요구하지 않는다. 그가 사는 세상은 특정한 영웅의 역할이란 필요하지 않아 보인다. 그저 먹고 마시고 노는 시민들의 장인 것이다. 그래서 하리는 매일이 고통스럽다. 내면의 이리에 먹히지도 못하고 이리를 쫓아낼 수도 없다. 그 가운데 헤르미네를 만난다. 그녀의 인도에 따라 기존 전통 질서에 반하는, 스스로 진리가 있다 믿어 의심치 않았던 가치들과 정반대의 것들을 체험하는 과정에서 자신 안의 또 다른 자아에 눈 뜨게 된다.
헤세는 인간의 삶이 고통으로 변할 때란 두 시대 사이에 끼었을 때라고 이야기한다. 두 개의 생활양식이 뒤섞여 어떠한 것이 진짜 인간의 삶인지 모르는 세계에서 방황하는 모습이 100년 후인 지금의 모습과 별반 다르지 않다는 것에서 헤세의 통찰력에 다시금 놀랐다. 하지만 인간의 행동방식이 결국 반복된다는 점에 더 생각이 쏠려 찝찝한 기분이 들게 하였다.
소설의 결말부에서는 파블로의 <마술 극장>으로 대변되는 유머에 의해 이리로 대변되는 수많은 분열된 자아를 끌어안고 살아갈 수 있다고 말하는 하리 할러의 모습을 보여준다. 진지함을 벗어던지고 유쾌함을 입어야만 이 지옥 같은 세상을 견디고 살아갈 수 있다고 말하는 것인가. 먹고 마시고 노는, 대중의 향락과 값싼 만족에 길들여진 세상에서 쾌락을 추구하는 일반 시민으로 살 수 없지만, 그렇다고 성자의 반열에 오르지도 못하는 인간들에게 남은 길은 유머의 길 뿐이다. 유머만이 내면의 탐구를 찾아 떠난 순례자들의 휴식처라고 말한다.
인간이란 이미 창조되어 있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정신의 요구이며, 그 실현을 갈구하면서도 또 겁내는 하나의 먼 가능성이다.
대중의 향락적인 소비문화와 인문학적 감수성, 낭만, 사색의 문화 이 두 가치 사이에의 고민은 현재의 삶이 끝나기 전까지 우리 스스로에게 끊임없이 던져지는 질문이다. 대중적인 문화, 예술들을 무가치하다 폄하했지만 그것들을 토대로 한 가치에 파묻혀 살아가는 하리 할러는 거울에 비친 내 모습이었다. 하지만 내 삶은 거기서 끝나지 않았다. 거울에 비친 이리를 결국 받아들인 하리처럼, 내 인생에 앞으로 존재할 수십만 개의 유희가 내 행동에 의해 달라질 것이라는 그 가능성을 믿고 싶다.
p.182. 내 마음속에서는 매일 예전의 모든 영혼 곁에 새로운 영혼들이 나타나 자기주장을 하며 소란을 피웠다. 그리하여 나는 이제 눈앞에 있는 그림을 보듯 지금까지의 나의 개성이라는 것이 하나의 망상에 지나지 않음을 똑똑히 보았다. 나는 우연히 잘할 수 있었던 서너 가지 능력과 수양만을 정당화하면서 하리라고 하는 사내의 상을 그려내어 본래 문학, 음악, 철학에 지극히 빈틈없는 교양을 갖춘 전문가인 그자의 삶을 살아왔던 것이고, 그러면서 내 개성의 나머지 부분, 즉 그 밖의 모든 능력과 충동과 노력의 카오스를 부담스럽게 느껴 <황야의 이리>라고 불러왔던 것이다.
p.200. 내 인생은 고난과 방황과 불행이었고, 체념과 부정을 향해 내달렸다. 내 인생은 인간 운명의 소금에 절여져 쓰디쓴 것이었으나 또한 풍성하고, 자랑스럽고, 부유한 것이었다. 그것은 고난 속에 있었다 해도 왕과 같은 품격을 지닌 인생이었다. 가련하게도 결국 몰락의 길을 갈지라도, 내 인생의 핵심은 숭고했고, 나의 용모는 훌륭했고, 혈통도 좋았다. 내 삶에서 중요한 것은 돈 몇 푼이 아니라 별이었다.
p.308. 인생이라는 유희의 수십만 개의 장기짝이 모두 내 주머니에 들어있다는 것을 알았고, 충격 속에서 그 의미를 어렴풋이 깨달았다. 다시 한번 그 유희를 시작해 보고, 다시 한번 그 고통을 맛보고, 다시 한번 그 무의미 앞에서 전율하고, 다시 한번 더 내 마음속의 지옥을 이리저리 헤매고 싶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