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양은 과거고 세상은 현재고 달은 미래다’
이미 패를 다 보여주고 포커를 치는 것처럼 독자는 이미 알고 있는 내용을 실제 이야기를 풀어나가는 소설 속 인물만 모르고 있다. 주인공이 그것을 찾아가는 과정을 서술함으로써 역으로 독자가 이야기에 흠뻑 몰입하게 만든다. 몰입되는 힘은 가히 스트레이트 플러시 같다.
달의 궁전은 우연의 연속으로 서사가 이어진다. 이야기 전개의 중심이 되는 인물 포그는 우연으로 인해 아버지의 존재를 모르고 태어나고, 어릴 적 어머니를 잃었으며, 정신적 지주인 외삼촌마저 스무 살이 되기 전 떠나보낸다. 오로지 홀로 남은 포그는 가난에 떠밀려 노숙자에 가까운 삶을 살게 되면서 생의 끝자락까지 다다르게 된다. 그 끝에서 우연히 키티 우를 만나 사랑에 빠지고, 우연히 토머스 에핑의 비서(말동무?) 일자리를 구하고, 우연히 거액의 돈을 상속받는다. 하지만 우연히 얻은 이 모든 것들은, 터무니없이 알량한 자존심에 의한 자기혐오에 의해, 한 순간의 도둑맞음으로 인해 우연하게 사라져 버린다.
우연, 우연 또 우연… 때문에 달의 궁전을 좋아하지 않는 분도 있다고 들었다.(그래서 폴 오스터가 해외의 명성에 비해 한국에서 인기가 없는 것인가?) 하지만 우리 실제 삶도 우연의 연속으로 조직된 것이 아닌가! 우연에 의한 허구적 이야기가 실제 삶에 큰 파동을 주는 것, 그 아이러니가 주는 쾌감을 끊을 수 없어 계속해서 소설을 읽게 된다. 결국 내 경우에는 허구의 이야기들이 내 삶을 돌아보게 만드는 원동력이다. 달의 궁전은 이 조건을 완벽하게 만족시켜 주었다. 그리고 이미지화되는 문장들의 힘이 대단하다고 느껴졌다. 문장을 읽는 것만으로 장면 장면이 파노라마처럼 그려지는 듯하다. 주인공 포그가 에핑의 사망기사를 쓰기 위해 그의 일대기를 듣는 부분은 이야기의 힘에 이끌릴 수 밖에 없는 이 책의 백미이다. 도저히 중간에 멈출 수 없게 만드는 부분이었다.
모든 인간의 삶은 달과 같은 것이라고, 지구라는 세상 주변을 배회하며 끊임없이 차고 기우는 것을 반복하고, 태양이라는 과거에 의존해 자신을 비추는 달이라고 말하는 것 같았다.
우리의 삶이 고통으로 얼룩져 있을 때도, 행복의 에너지에 둘러싸여 가장 밝게 빛날 때도, 달은 항상 그 자리에 있었고, 있을 것이다. 계속해서 차고 기울고, 다시 차고 기울 것이다. 언제까지나 계속 반복될 것이다. 언제부터 그랬는지는 정확히 아무도 모른다. 그것 역시 우연이니까.
p.136. 엄밀한 의미로 따진다면 사물을 정확하게 서술하려는 노력은 바로 내가 가장 배우고 싶어 했던 것을 배울 수 있는 그런 원칙이었다. 겸손함, 인내, 정확성. 나는 그 일을 단순히 하나의 의무로 생각하는 대신 일종의 정신적 훈련, 마치 세상을 처음 발견한 것처럼 세상을 보는 눈을 기르는 훈련의 한 과정으로 생각하기 시작했다. 나는 무엇을 보는가? 그리고 보이는 것을 어떻게 말로 표현할 것인가? 세상은 눈을 통해 우리에게로 들어오지만, 우리는 그 이미지가 입으로 내려가기 전에는 뜻이 통하게 할 수 없다. 나는 그 거리가 얼마나 먼 지를 올바르게 인식하기 시작했고, 어떤 사물이 한 곳에서 다른 곳으로 옮겨 가기 위해 얼마나 멀리 여행을 해야 하는지 이해하기 시작했다.
p.171. 누구도 달이나 별을 보지 않고서는 자기 위치가 어디쯤인지를 알 수 없어. 천문학이 먼저 오고 지도는 그 덕분에 따라오는 거지. 그런데 바이런 얘기는 내가 생각했던 것과는 정반대였어. 거기에 대해서 아주 오래 생각을 하다 보면 머리가 뒤죽박죽이 되고 말 거야. 여기는 저기와 관련해서만 존재하고 다른 길이라고는 없는 거니까. 여기가 있는 건 단지 저기가 있기 때문이야. 위를 올려다보지 않으면 밑에 뭐가 있는지 절대 알지 못해. 그걸 생각해봐. 우리는 우리가 아닌 것을 봄으로써만 우리 자신을 발견하게 돼. 하늘을 만지기 전에는 땅에 발을 댈 수 없어.
p.274. 우리는 언제나 잘못된 시간에 옳은 곳에, 옳은 시간에 잘못된 곳에 있었다. 언제나 서로를 놓쳤고, 언제나 간발의 차이로 전체적인 일을 알지 못했다. 우리의 관계는 결국 그렇게, 잃어버린 기회의 연속이 되고 말았다. 그 이야기의 조각들은 처음부터 모두 거기에 있었지만 누구도 그것을 어떻게 이어 붙여야 할지 몰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