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든 사람은 스스로의 의지로 태어난 것이 아니다. 태어나졌기 때문에 삶이 주어진 것이다. 이것을 사회적 가장 약소 계층이라 볼 수 있는 계급에, 그중에서도 일반적인 궤도를 이탈한 10대들에게 적용하게 되면, 삶은 아름다운 것이라고, 모든 사람은 사랑받기 위해 태어난 소중한 존재라고, 과연 말할 수 있을까?
그렇다면 삶의 과정에서 겪는 고통은 무엇인가? 그것은 필멸자인 인간의 숙명인가? 아니면 사회적 계급에서 기인한 결과인가? 제이와 같은, 태어나면서부터 버려져 살아가는 이들이 겪는 고통은 그럼 어디서부터 오는 것이란 말인가? 작가는 책을 읽고 수없이 떠오르는 질문들에 대한 답을 정의하지 않는다. 작가는 다만 보여줄 뿐이다. 단순한 메시지를 확장해서 입체적으로 보여주는 역할, 에필로그 속 ‘나’는 그것이 작가의 역할이라고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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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이야기는 먼저 가출한 10대 청소년들의 고통에 대해 집중한다. ‘인간이 상상할 수 있는 모든 일은 일어날 수 있다’는 본문 내용처럼, 평범한 10대의 삶에서는 생각해 본 적도 없는 끔찍한 삶의 현장이 지금 현재 어딘가에서는 실제로 일어나고 있을 것이다.
1,2장까지 읽으면 마치 청소년 문제에 대한 르포소설처럼 느껴진다. 이어 3,4장을 읽으면 뒤틀린 성인의 이야기, 본문에도 나오듯 싯다르타 같은 구도자와 그를 따르는 추종자, 신도들의 이야기를 떠올리게 된다.
대부분 길지 않은 문장들로 구성되어 전체 이야기가 빠르게 전개된다. 중간중간 시점도 바뀌지만 이야기의 묵직함이 떨어진다는 느낌은 전혀 들지 않는다. 묵직하다기보다 날카롭다. 마치 날이 매섭게 선 자검으로 폐부를 찌르듯이, 건조하고 간결한 문장들이 이야기에 더 큰 힘을 보태었다는 느낌이 들었다. 소설 속 10대 청소년들의 살아가는 장면들이 너무나 생경하게 느껴져 불편하다. 하지만 그것에 고개를 돌려 외면하고 싶지 않다. 묵묵히 지켜보게 한다. 책을 덮은 후에 한동안 먼지처럼 흩어진 생각들을 정리하는 시간이 필요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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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 속 제이는 마치 고행길을 걷는 구도자처럼 보인다. 이름이 공교롭게 제이인데, 이는 위대한 개츠비의 제이를, 그의 주변을 배회하고 관찰자 역할을 하는 동규는 닉 캐러웨이를 떠올리게 만든다.
또, 간신히 생을 유지하는 삶을 살면서 자신만의 깨달음을 얻은 제이와 그를 추종하면서도 시기하는, 마지막에 결국 그를 배신하는 선택을 한다는 내용에서는 예수와 유다의 관계로도 보인다. 이런 장치들이 이 소설을 넘어 다른 소설 속 이야기를 빌려와 재해석한다는 느낌이 살짝 들었다. 그래서 소설 전체 이야기가 단순하게 느껴지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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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적 약자 계층에 대한 현실,
10대 비행청소년들의 지옥 같은 삶,
구도자의 일대기와 그의 추종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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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 주제처럼 다양한 방식으로 읽히고, 해석될 수 있는 소설이다. 하지만 에필로그가 없었다면 그냥 그런 소설로 느껴졌을 것이다. 에필로그는 이 책을 보지 않은 분들을 위해 따로 설명하지 않기로 했다.
무엇보다 이 소설이 대단하게 느껴지는 이유는 소설을 읽고 단순한 어떤 교훈, 판단, 결심이 아닌 복잡한 마음으로 앉아 생각을 정리할 수 있게 만드는 이야기의 입체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