레몬 – 권여선

by HJ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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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살인 사건이 일어난다. 주변에 존재하는 다른 사람을 그녀 외 ‘나머지’로 만들 정도로 아름다웠던, 특별해 보였던 한 소녀의 죽음은 ‘나머지’ 사람들의 삶에 균열을 일으킨다. 이 사건으로 인한 후유증, 혹은 가시, 혹은 보이지 않는 낙인이 그녀 주변의 인물들에게 박힌다.


피해자의 가족은 제일 먼저, 그리고 가장 크게 사자의 빈자리를 체감한다. 그 공허함은 본래 딛고 있던 자신들의 삶을 뒤흔들 정도의 강한 충격이다. 며칠간 잠을 자지도, 먹지도, 쉬지도 못하는 생활에서 가까스로 벗어났다 싶다가 그 사건을 떠오르게 하는 아주 작은 단서는 이내 다시 그들을 나락으로 떨어트린다.


사건을 추적하는 동생 다언은 당시 범인으로 추정된 한만우를 찾아가 저주의 말을 쏟아낸다. 하지만 삶의 가혹한 무게에 짓눌린 그의 모습과 그날의 진실은 다언을 혼란스럽게 만든다. 다언 스스로를 죽여가며 언니의 빈자리를 매우려 했던 그녀의 수고로움은 다 무엇이란 말인가. 신의 존재조차 부정하게 하는 그녀의 단호한, 혹은 체념한 것 같은 모습은 섬뜩하다.


p.198. 우리 삶에는 정말 아무런 의미도 없는 거냐고, 아무리 찾으려 해도, 지어내려 해도, 없는 건 없는 걸까. 그저 한만 남기는 세상인가. 혹시라도 살아 있다는 것, 희열과 공포가 교차하고 평온과 위험이 뒤섞이는 생명 속에 있다는 것, 그것 자체가 의미일 수는 없을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시시포스처럼 바위를 밀어 올리듯 남은 이들은 살아간다. 가난한 집안에 태어난 남자아이, 돈이 없어 항상 어린 나이부터 돈을 벌어야 했던, 자라는 몸에 맞출 신발 살 돈이 없어 신을 끌고 다녔던, 동생이 좋아하던 꽈배기를 사기 위해 정해진 시간에 퇴근을 했던, 살인 누명을 쓰고 주변의 온갖 오명과 폭력을 그대로 견뎌야 했던, 그러다 군대에서 육종에 걸려 다리를 절단해야 했던, 그럼에도 먹고살기 위해 세탁공장에서 화상과 수포를 달고 죽는 날까지 일을 하다 전이된 육종으로 생을 마감한 남자. 그에게 삶이란 무슨 의미였을까.


한만우와 함께 용의 선상에 있던 남자, 아이비 버튼 다운 셔츠를 입고 다니고 회계사 아버지를 둔, 렉서스를 몰며 동년배들과는 다른 선상에 살았던 신정준. 그와 결혼한, 사건에 대해 단서를 쥐고 있던 윤태림. 그들은 과연 행복했을까. 아이를 잃어버렸다던,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그 아이를 상실한 후에 그들의 삶 또한 또 다른 나락으로 던져진다.


사건과 전혀 무관해 보이는 상희는 어떤 사건을 바라보는 제삼자의 시선을 대변한다. 고등학교 문예반에서 호시절을 보낸 다언의 뒤틀림을 보며 그녀는 괴로워한다. 형식적인 위로를 건네려다 자신의 알량한 진심을 까발려낸 다언에게 적의를 품은 자신을 부끄럽게 여긴다. 감히 상상할 수 없는 그 남겨진 자의 무게를 그녀는 알지 못한다. 그녀는 다만 짐작할 뿐이다.




평범하게 태어나, 평화롭게 살다, 평온하게 죽고 싶은 거의 모든 인간의 소망을 품은 현실의 삶에서 우리는 매일 어떤 사건과 사고를 접한다. 이 책은 크고 작은 사건 속에서 견디기 힘든 당사자와 남겨진 가족들의 아픔을 그대로 이해하자고 말하는 것이 아닌, 그 고통을 바라보는 시선의 온도와 태도에 대해 이야기한다. 갈수록 삭막해지고 서로에 대한 이해가 소멸하는 사회에서 우리는 어떤 시선을 담고 타인을 바라봐야 하는가. 어떤 의미도 없어 보이는 우리의 삶에 가치를 부여하는 것은 결국 우리 자신이다.


범인이 결국 누구였고, 또 다른 범죄의 범인은 누구였다.라고 명명백백히 밝히지 않는다. 모래사장에 넓게 흩뿌려 놓고 자신의 역할은 여기 까지라는 듯 높은 전망에서 뛰노는 아이들을 바라보는 부모처럼, 작가는 다만 썼을 뿐이다. 그리고 작가의 말에서 작게 이야기한다. 평범한 생을 살기를 바라는 당신을 상상한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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