섬뜩한 비극의 원인은 결국 이해와 소통

<플래너리 오코너 단편선>

by HJS

책의 두께만큼 묵직하게 느껴지는 주제의식과 작품들의 어두운 무드는 수록된 31편의 작품들을 읽는데 시간이 필요하게 만들었다. 마냥 낄낄거리며 볼 수 있는 블랙코미디 같은 작품들도 있었지만 대부분은 인물 간의 갈등이 폭발하는 시점에서 무방비 상태로 배트로 뒤통수를 얻어맞은 듯한 감정의 낙폭을 경험하게 한다. 이런 작품들은 페이지를 여러 번 왔다 갔다 할 수밖에 없었다.


단편들의 공통분모는 쉽게 눈에 띈다. 미국 남부, 하층 백인 계급, 소통의 단절, 부모(혹은 조부모)와 자식 간의 갈등, 흑인에 대한 차별, 독실한 프로테스탄트 교도 등 위 주제들 중 몇 가지를 뽑아 다양한 이야기를 변주한다. 같은 국적의 레이먼드 카버와 비교하면 좀 더 거칠고 하드 하다. 오히려 카버의 단편들이 따뜻하게 느껴질 정도랄까. 해설 등에서 나오는 고딕적이라는 표현이 딱 적합해 보인다. 인간에 대한 희망을 버렸다는 느낌이 들 정도로 등장하는 인물들 대부분은 비루하며 고지식하고 답답하다. 그들 서로 간의 소통은 너무나 요원하며 각자가 경험한 좁은 우물 속 세상에 갇힌 처연한 삶은 초라하기 그지없다.


노인을위한나라는없다.jpg 단편 <좋은 사람은 드물다>에서 연상되는 영화 <노인을 위한 나라는 없다>


이전까지 자신이 살아온 세상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부모(혹은 조부모) 세대와 그것이 마냥 한심해 보이고 답답한 자식 세대 간의 갈등은 갑작스러운 인물의 등장 혹은 우연한 방문자에 의해 끔찍한 비극으로 번진다.

자신의 무지함, 상대에 대한 몰이해가 어떤 비극을 초래할 수 있는가? 기존에 익숙한 세계(가족)가 의문의 방문자에 의해 무너지는 섬뜩함은 인간과 인간 사이의 진정한 이해란 가능한 것인가? 스마트폰 덕분에 실제 마주 보며, 서로를 이해하는 대화가 급격히 줄어가는 현재 우리에게 상대에 대한 온전한 이해란 가능한 것인가? 우리는 얼마나 얄팍한 연결 고리에 의지해 살아가는 것인가?라는 좀 더 넓은 차원의 질문을 되새기게 한다.


<이발사>는 흑인과 백인간의 갈등을 압축적으로 보여준다. 이발소를 방문한 흑인이 백인 이발사와 지지하는 정치인에 대해 이야기한다. 주인공은 자신이 지지하는 흑인 후보를 비꼬는 백인 이발사와 그의 친구에게 맞서 납득할만한 논리적인 반박을 하지 못한다. 대학 강사로 일하는 그는 누구보다 논리적이며 상식적이라 자부하며 살았지만 상식 이하의 비판과 비꼬기를 시전 하는 이발소 패거리에게 농락당한 자신이 분하고 억울하다. 만반의 준비를 갖추고 다시 찾아간 이발소에서 그는 이성을 잃고 만다.

명절에 친지들 간 정치 이야기를 했다가 연을 끊고 산다는 어디서 들어본 인터넷 유머(혹은 현실)가 떠올라 재미있게 본 단편이다. 상식 이하의 발언, 혹은 상대의 의견을 비꼬는 방식이 논리적인 의견을 얼마나 무력하게 만드는 가에 대해, 너무나 우스꽝스럽게 묘사되어 있다.


<좋은 시골 사람들>은 갈등이 있는 모녀 집안에 성경책 판매원이 방문하면서 일어나는 이야기이다. 엇나가는 딸과 어떻게든 딸을 좋은 남자에게 시집보내고픈 엄마는 딸과 비슷한 처지의 성실해 보이는 남자를 이어주고 싶어 한다. 그런 엄마에게 반항적인 마음반, 자신에게 치근대는 남자에 대한 호기심반을 안고 그를 따라간 여자에게 일어나는 결말의 상황은 황당하고도 웃기면서도 어이없게도 공포스럽다.


<절름발이가 먼저 올 것이다>는 제 자식이 갖지 못한 능력을 엉뚱한 아이에게 발견했다는 착각을 한 부모에게 찾아오는 비극에 대해 이야기한다. 역시 가족 바깥의 인물에 의해 기존 구성원의 갈등이 증폭되며 끝내 찾아오는 참혹한 여운을 느끼게 한다.


<파커의 등>은 실제로 낄낄거리며 보게 된 단편이다. 어릴 적 온몸을 문신한 남자를 보고 느낀 열락(悅樂)은 파커에게 문신에 대한 강한 집착을 갖게 한다. 이성에게 잘 보이기 위해 하나둘씩 더해진 문신은 그것을 쓰레기 취급하는 아내에겐 한낯 낙서일 뿐이다. 독실한 종교를 가진 아내를 굴복(혹은 감복)시키기 위해 우연히 계시를 받은 파커는 자신의 등에 예수 그리스도 문신을 하게 된다. 할머니가 옆집 아저씨에 대해 들려주는 이야기처럼 술술 읽힌다. 자신의 세상 속에서 할 수 있는 최선을 해낸(등에 문신하기) 그에게 결말에서 던지는 아내의 말은 그를 나락으로 떨어트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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