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종실에서 보는 세상 1-3
2011년 글을 2022년에 다시 쓰다.
2010년 5월의 어느 날 김해 공항. 나는 부산-방콕 비행을 하기 위해 공항에서 비행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부산 날씨가 좋지 않아 연결 항공기가 아직 도착하지 않았다. 30분 늦게 비행기가 도착했는데, 비바람 때문에 바로 착륙하지 못하고 고 어라운드(Go-around)를 한 번 한 것 같았다. 승무원들은 서둘러 출발 준비를 했다. 비 오는 날마다 느끼는 것이지만, 우리 우비(Rain Coat) 좀 어떻게 해줬으면 좋겠다. 야광 띠도 달고 회사 마크도 새겨 넣고, 좀 프로페셔널해 보이는 걸로. 비행기에 비치된 우비가 유치원 노랑 우비라 걸을 때마다 삐약삐약 소리가 나는 것 같다. “기장님 귀여워요!”라고 말하는 사람이 있지 않을까? 상상하며 혼자 쑥스러워 하지만 아무도 관심을 주지 않는다. 관종은 외로운 법이라 생각하며 계단을 내려와 바깥으로 나갔다. 비가 억수같이 내리고 있었다.
"오늘 전국에 비가 많이 왔는데 하루 종일 국내선 다니느라 수고가 많았다. 고 어라운드까지 했으니... 얼른 따듯한 나라로 가자."
비행기 여기저기를 만지며 아픈 데는 없는지 살펴보았다. 흠뻑 젖은 것 외에 평소와 다른 것은 없어 보였다.
"7710(항공기 고유 등록번호 HL7710을 말한다), 이 아이가 벌써 열 살이 넘었지? 다 컸네. 좀 멋있는데? 억수 같은 비 속에서도 씩씩하구나!"
기분이 좋아 1번 타이어를 딱 내리쳤다. "아야!" 이런, 너무 세게 내리쳐서 손바닥에 멍이 들게 생겼다. 주먹으로 퉁퉁 쳐도 될걸.
미친 사람처럼 일인극에 심취하여 외부 점검을 했다. 믿거나 말거나지만 이것이 백 퍼센트 허세는 아니다. 비행을 하다 보면 이런 감정이입이 도움이 된다. 손으로 만져보면 묘한 스킨십도 느낄 수 있는데, 차가운 동체에서 웅웅 거리며 느껴지는 자연스러운 진동이 마음을 안정시킨다. 눈감고 가만히 있으면 잔잔한 기계 진동 속에 맥박 같은 것도 느껴진다. 아마도 내 심장이 뛰는 것을 착각했을 것이다. 내가 봐도 좀 돌아이 같지만, 조심스럽게 이것을 교감이라고 말하고 싶다.
비행기 연결 시간이 빠듯해서 우리도 30분 늦게 부산을 출발했다. 브리핑 때 약속한 대로 오늘은 부기장이 PF(Pilot Flying)를 맡고 내가 PM(Pilot Monitoring)이 되어 그를 돕기로 했다. 다시 말해, 부기장이 비행기 조종과 이착륙을 할 것이다.(비행기는 조종사 한 명이 조종을 하고 나머지 한 명은 서포트를 한다. PF가 조종을 하는 동안 PM은 체크리스트 수행, 무선 교신, PF가 지시하는 것을 해주는 보조역할까지 하는데, 동시에 비행 상황을 크로스 체크하여 PF의 조종을 감시한다.) 빗속을 헤치고 드디어 힘차게 이륙했다. 나는 랜딩기어를 올리고 열일하는 와이퍼를 껐다. 부기장이 왼쪽으로 날개를 기울이자 비행기는 돛대산을 피해 서서히 선회하며 상승했다. 잠시 후 구름을 뚫고 날아오르자 비행기는 고요한 우주를 유영하듯 평화롭게 날기 시작했다. 보름이 가까웠는지, 한 오 프로쯤 모자란 보름달이 우리를 차갑게 비추고 있었다.
비행은 순조로웠다. 난기류가 예보된 지역도 별문제 없이 지나갔다. 승객들은 일찌감치 식사를 마치고 단잠에 빠졌으며, 객실 승무원들도 여유롭게 뒷정리를 끝냈다. 4시간의 지루한 순항 끝에 드디어 방콕 관제 공역에 진입했다.
부산을 출발할 때 방콕은 기상이 좋을 것으로 예보되어 있었다. 이 지역은 보통 하루에 한 번 스콜 라인(Squall Line)이 지나가며 짧게 국지성 폭우를 쏟아붓는데, 오늘은 그런 경보도 없었다. 그러나 고도 강하를 요구했을 때 항로 관제사의 반응이 이상했다. 한밤중에 비행기도 별로 없는데 고도를 잘 내려주지 않았다. '이거 뭔가 있나 보다.'라며 기상 레이더를 살펴보는데, 심상치 않은 예감이 곧 눈앞에 현실로 나타났다. 레이더에 썬더 스톰 덩어리들이 빨간 괴물처럼 스멀스멀 몰려오고 있었다.
“이거 뭐야? 엄청난데. 방콕 기상 다시 받아 보자.”
ACARS(기내 Data통신장치)로 ATIS(공항이 기상을 포함하여 이착륙에 필요한 정보를 제공하는 것)를 다시 받아보았다. 하지만 갑작스러운 기상변화 때문인지 아직도 정보는 업데이트되지 않았고, 접근 관제 공역으로 들어와서야 비로소 상황을 알 수 있게 되었다. 접근 관제사는 공항이 썬더 스톰으로 온통 뒤덮였으며, 강풍과 번개를 동반한 소나기로 모든 활주로에 이착륙이 중단되었다고 했다. 앞서 몇 대의 비행기가 체공비행(Holding)을 하고 있었고, 우리도 기상이 나아질 때까지 체공하며 기다리도록 지시받았다.
FMS(Flight Management System, 비행기의 경로, 연료, 무게, 성능 등 비행 계획 전반을 계산하고 관리하는 컴퓨터)에 체공 경로를 입력하고 연료 계산을 해보았다. 예상하지 못한 상황이라 출발할 때 추가 연료도 싣지 않았다. 10분 후에도 날씨가 나아지지 않으면 교체공항인 유타파오 공항으로 가야 할 것 같았다. 그때 서울 본사에서 위성 전화(SATCOM)가 왔다. 이미 상황을 파악한 와치 듀티(Watch Duty) 운항관리사가 필요한 정보를 제공해 주었다.
“기장님, 가까운 돈무앙 공항에 날씨가 좋으니 교체공항을 유타파오에서 돈무앙으로 바꾸면 남은 연료로 30분 정도 더 홀딩(Holding, 체공)할 수 있습니다. 교체공항 바꿔서 최대한 기다려 보시죠. 이 지역 썬더 스톰이 원래 그렇듯 금방 사라질 것 같습니다.”
“잠깐만요, 돈무앙 위치 좀 확인하고요.”
돈무앙 공항은 방콕 시내에 있는 구 공항으로, 목적지 스완나폼 공항과 아주 가까이 있다. 인천공항과 김포공항의 거리와 비슷하다고 보면 된다. 거리가 가깝다 보니 두 공항이 동시에 스콜(Squall) 영향권에 들어갈 수 있다. 지금은 돈무앙의 기상이 괜찮지만 혹시라도 더 나빠지게 되면 목적 공항과 교체 공항 둘 다 착륙하지 못하는 심각한 상황이 될 수도 있다. 그러므로 광범위하게 형성된 스콜 영향권 속에 돈무앙 공항이 어디쯤 위치하는지 확인하고, 더 나빠질지, 좋아질지를 판단해야 했다. 레이더 화면으로 보니 다행히도 돈무앙 공항은 썬더 스톰의 풍상 쪽에 있었으며, 빠르게 이동하는 썬더 스톰의 영향권에서 서서히 멀어지고 있는 중이었다.
“예, 동의합니다. 돈무앙 기상 좀 불러주세요, 교체공항 바꿔서 홀딩하겠습니다.”
운항관리사는 준비해 놓은 기상정보를 불러주었고, 돈무앙으로 교체공항을 바꾸면 얼마나 더 체공할 수 있는지 물어보았다. 나는 FMS에 교체공항을 바꾼 후 연료를 다시 계산해보았다. 긴장한 운항관리사가 오래 기다리지 못하고 반복해서 물어보았다.
“루트를 짜 보니 돈무앙으로 회항하는데 1,500파운드의 연료가 필요한 것으로 계산됩니다. 나머지 연료로 홀딩 가능한 시간이 얼마로 계산됩니까?”
자꾸 보채니 계산이 더 안된다. 침착하게 따져보자. 교체공항을 돈무앙으로 바꾸면 유타파오 공항으로 가는 데 사용할 7,000파운드의 연료 중 돈무앙으로 가는데 필요한 1,500파운드를 빼고 나머지 5,500 파운드가 여유분으로 남는다. 대략 30분 정도의 연료이다. 부산에서 여기까지 오면서 세이브한 연료가 추가로 약 1,800파운드 있으니, 합하면 대략 40분 동안 체공할 수 있다는 계산이 나온다. FMS의 계산도 비슷했다. 43분이 나왔다.
7,000 lbs - 1,500 lbs + 1,800 lbs = 7,300 Ibs
7,300 lbs / *180 lbs/min = 40.6 (min)
* 인스턴트 계산을 위한 대략적인 연비이다. 무게, 고도, 속도에 따라 실제 연비는 달라 짐.
그러나 현실적으로 생각해봐야 한다. 1,500파운드로 스완나폼 공항에서 돈무앙 공항까지 가서 착륙할 수 있을까? 거리상으로는 맞다. 그런데 시간으로 따져보면 이야기가 달라진다. 1,500 파운드면 약 8분간 비행할 수 있는 연료소모량이다. 회항 결정과 동시에 타임 스타트해서 8분 안에 착륙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회항이 시작되자마자 다음의 일들을 최소 2-3분 안에 모두 끝내야 한다.
관제사에게 목적지 교체 허가를 받고;
FMS에 변경된 목적지로 새로운 비행 계획을 짜고;
FMS에 새로운 비행경로와 착륙 정보를 입력하고;
필요한 차트(항로 지도)도 다시 세팅하고;
착륙 브리핑, 체크리스트 모두 다시 하고;
본사 종합통제센터에 회항을 알리고;
사무장에게 회항 준비를 시키고;
기내 방송도 해야 함.
너무 바쁘다. 서두르면 실수한다. 게다가 시간 내에 모든 준비가 다 끝난다 해도, 현실적으로 비행기가 8분 내에 착륙할 수 있을지 의문이다. 날씨가 안 좋으면 뭐든 자꾸 지연되기 때문이다. 내가 아무리 잘해도 상황이 자꾸 밍그적거리면 결국 늦어지게 된다. 사실 비상시에만 사용하도록 남겨두는 히든 연료가 있다. 자동차에 연료 경고등이 켜진 채로 더 달릴 수 있는 것과 같다. 경고등이 켜져도 20분~30분 더 비행할 수 있지만, 자동차와 달리 비행기는 탱크 안에 연료 수위가 너무 낮으면 좋지않다. 공중을 날다 보니 자세가 바뀔 때마다 탱크가 기울어져 연료 공급이 원활하지 않을 수 있기 때문이다. 비상연료를 미리 고려하여 계획할 수는 없다.
이 시점에서 내가 좋아하는 'R.O.T. 즉, 룰 오브 썸(Rule of thumb)'을 꺼내 들었다. 이 방식을 적극적으로 추천하지는 않는다. ‘대~충’이란 뜻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잘 업데이트해서 관리하면 의사 결정에 매우 요긴하게 쓰인다. 오늘의 ROT는:
날씨 나쁘거나 트래픽 복잡할 때, 한 번 접근과 착륙에 연료 4,000 파운드!
심플하지만 빠르고 믿을 만하다. 공항 공역 안에서 한 번 접근하여 착륙하는데 보통 연료 2,000 파운드 정도면 문제없다. 하지만 상황이 나쁠 때는 보수적으로 그 두 배인 4,000파운드를 적용하는 것이다. 계산은 대충 아래처럼 떨어졌다.
A = 현 위치에서 목적 공항(수안나폼)까지 가는 연료(Trip Fuel) = 2,000 lbs
B = 목적 공항(수안나폼)에서 교체 공항(돈무앙)까지 가는 연료(Alternate Fuel) = 4,000 lbs
C = 비상 연료(Final Reserve Fuel) = 5,500 lbs
D = 현재 연료(FOB) = 16,500 lbs
E = 체공 가능 연료(Extra Holding) = D - (A + B + C) = 5,000 lbs
F = 체공 가능 시간(Holding Time) = 5,000 lbs / 180 lbs/min = 28(min)
새로운 계산에 따르면, 5,000 파운드의 여유분으로 약 28분 동안 체공이 가능한 것으로 계산되었다. FMS에 회항 연료를 4,000 파운드로 입력하니 컴퓨터는 29분으로 계산했다.
장사하는 것도 아닌데 갑자기 ‘네고’ 본능이 발동했다.
“네, 계산해보니 한 20분 홀딩 가능합니다!”
내 연료도 아닌데 손해 안 보려고 뒤에 8분을 잘라낸다. 운항관리사가 실망할것 같다. 적어도 30분은 기대했을텐데. 사실은 한 5분 더 할 수 있다고 말하려다 말았다.
“네... 여유가 그리 많지는 않군요. 어쨌든 알겠습니다. 방콕 지점에도 우리 운항관리사가 팔로우업하고 있으니 컴퍼니 라디오(Company Radio, 비행기와 회사 간 VHF 무선통신) 주파수를 모니터 하면서 홀딩해 주십시오!”
“네, 고맙습니다!”
통화가 끝나고 바로 체공비행에 들어갔다. 한밤 중이라 비행기가 별로 많지 않아 내 착륙 순서는 세 번째였다. 우리 앞에는 에미레이트 항공과 에어차이나 항공이 있었고, 뒤에는 타이항공이 있었다. 회항에 대비하여 돈무앙 공항의 절차도 살펴보았다. 착륙 준비를 마치고 도착 지연에 대한 기내 안내 방송을 했다. 늦은 밤이라 승객들이 거의 자고 있어서 작고 짧게 방송했다. 요새 방콕 도심에 시위가 잦아 치안이 불안하다고 한다. 그 영향으로 손님이 많이 줄었는데, 주말이라 그나마 비행기가 텅텅 비지는 않았다. 주로 신혼여행을 떠나는 새신랑, 새신부들이었다.
화장실에 다녀오면서 커튼을 살짝 걷어 승객들을 보았다. 가운데 자리는 모두 비어있고 창가 쪽에만 커플 티를 입은 남녀가 쌍쌍이 앉아 얼굴을 비비며 자고 있었다. 화장도 못 지우고 헤어도 단단하게 세팅된 채 입 벌리고 자는 커플이 눈에 들어오자 웃음이 나왔다. 비행기 놓칠까 봐 얼마나 서둘렀길래.
‘모두 피곤하지만 행복하구나. 방콕에서 좋은 추억 만들어야 할 텐데.’
어느새 이들의 행복을 빌고 있었다. 정말 진심이었던 것 같다. 거친 하늘 속에 비행기와 한 덩이가 되어 있으니, 모두 내 형제, 가족 같았다. 사무장이 조용히 뒤에 와서 격려해 주었다.
“손님들 모두 주무시니 객실은 걱정 마세요. 날씨가 나쁘지만, 믿어요 기장님. 안전운항 부탁해요.”
“힘내셔요, 기장님! 빠샤!”
나 바보인가? 감동적인 장면은 맞지만, 이 부분에서 목이 메면 좀 찌질하지 않나? 눈길을 피해 조종실로 돌아가는 나에게 따듯한 커피를 손에 쥐어주는 승무원들. 미소 짓는 표정 속에 하나같이 피곤이 가득하다. 하지만 이보다 더 멋질 수 없었다. - 공익 광고 같은 이 장면을 남들은 믿지 않을 것이다 -
조종실에 돌아와 커피를 한 모금 마시며 바깥을 보았다. 거대한 썬더 스톰이 우리가 체공하는 곳에 더욱 가까이 다가왔다. 부기장이 간단히 상황을 브리핑해 주었다.
“스콜 라인이 점점 가까워지니 좀 피해야겠습니다. 여기서 뒤로 물러나면 공항으로부터 점점 멀어지니 썬더 스톰이 미약한 부분으로 통과해 반대쪽으로 가서 체공하는 것이 낫지 않겠습니까?”
“오케이!”
이런 훌륭한 부기장이 있나? 정확한 지적이었다. 우리는 연료를 아껴야 한다. 스콜 라인의 풍하 쪽에 있으니 썬더 스톰을 피해 자꾸 물러나면 수완나품과 돈무앙 두 공항 모두 점점 멀어진다. 어차피 접근하기 위해서는 이 썬더 스톰을 건너가야 한다.
나는 접근관제소에 레이더 백터(Radar Vector: 관제사가 레이더를 보며 항공기 진행 방위를 지시해 주는 것)를 요구했다. 대충 번역하자면 이렇게 말했다.
“방콕 접근관제소, 대한항공 661편. 썬더 스톰을 건너도록 벡터를 달라. 썬더 스톰이 가까워져서 체공 경로를 유지할 수 없다.”
그런데 내 영어가 어설펐는지 관제소가 오해를 한 것 같다. 버럭 화를 내며 말하길(느낌 조금 섞어 한국어로 쓰겠다),
“지금 활주로는 헤비레인(heavy rain)에 측풍 풍속은 거스트(gust) 포함해서 최고 52노트다, 아무도 접근 못한다. 그냥 가만히 홀딩하고 기다려라!”
아마도 착륙시켜달라고 떼쓰는 줄 알았나 보다. 상황이 이렇다 보니 관제사도 정신이 없어 보였다. 예민해진 관제사에게 더 이상 말을 걸지 않고 좀 더 기다리기로 했다. 세 바퀴 째 체공을 했으니 15분 정도 지났다. 계획한 체공시간까지 5분 남았고, 꼬불쳐 놓은 시간까지 합하면 13분 정도 여유가 있었다.
스콜 라인은 마치 검은 장막 같았다. 밝은 달에 비친 거대한 검은 커튼이 오른쪽에서 다가오고 있었다. 정말 어마어마하게 컸다. 썬더 스톰은 섬광을 뿜으며 꿈틀거리고 있었고, 섬광이 번뜩일 때마다 근육질이 선명하게 드러났다. 마치 하늘에 떠있는 것을 모두 삼켜버릴 기세였다. 이제는 너무 가까워져 정말 피해야 했다. 다시 한번 라디오 마이크를 잡으려는 순간, 때마침 관제사가 비행기들을 차례로 부르기 시작했다.
“에미레이트 XXX 편, 지금 활주로는 측풍 거스트 19노트이다. 접근을 시도하겠는가?”
“노 땡큐, 우린 연료 여유 있다. 좀 더 체공하겠다.”
“알겠다. 에어차이나 XXX 편, 접근을 시도하겠는가?”
“네거티브, 우리는 그만 유타파오로 회항하겠다. 유타파오로 가는 항로를 지시해 달라.”
“알겠다. 기다려라. 대한항공 661편, 접근하겠는가?”
드디어 썬더 스톰이 공항 상공에서 조금씩 멀어지나 보다. 중국 항공사들은 회항 결정을 참 잘한다. 내릴 수 있는 기상 조건이라도 쉽게 포기한다. 에미레이트 항공은 연료를 많이 싣고 왔나 보다. 나도 더 체공하고 싶지만, 겨우 10분의 연료만 가지고 순서를 반납하면 언제 다시 내 차례가 올지 모른다. 고민스러웠지만, 결정은 빨리 내려졌다. 어쩌다 보니 내가 '넘버 원'이 되었다.
“접근하겠다.”
“로저(Roger), 대한항공 661, 방위각 010으로 선회하고, 6,000피트로 강하하라.”
상황이 바쁘게 돌아갔다. 일단 업데이트된 기상을 받아보았다. 강풍이 조금씩 누그러들어 최대 풍속이 착륙 제한치보다 약해졌다. 활주로 노면 상태에 대한 보고는 없었으나 강수량이 모더레이트(Moderate)로 보고되어 측풍 속 제한치는 20노트를 적용했다. 풍속이 줄어들어 이제 자동 착륙을 할 수 있는 조건에 가까워졌다.
“그래 조금씩 좋아지는 것 같다. 오토 랜딩 제한치 안에 들어오면 오토 랜딩을 하는 게 어때?”
“예, 지금 90도 방향 정측풍 19노트에 모더레이트 레인이니 오토 랜딩 할 수 있습니다.”
검은 커튼을 왼쪽에 두고 끝자락을 향해 힘차게 날아갔다. 가까이서 보니 이제는 거대한 파도처럼 보였다. 안전한 거리를 유지하기 위해 오른쪽으로 비행기를 기울일 때마다 거대한 파도를 타는 서퍼가 된 것 같았다. 기상 레이더를 뚫어지게 바라보며 파도를 넘어갈 기회만 노리고 있었다. 드디어 썬더 스톰 사이로 적당한 틈이 보였다. 창밖과 레이더를 손가락으로 번갈아 가리키며 부기장에게 말했다.
"이쪽으로 빠져나가자!"
"네, 알겠습니다."
좌석벨트 시그널을 여러 번 울리고 사무장에게 인터폰을 했다.
“이제부터 많이 흔들릴 테니 모두 앉으세요!”
“벌써 착륙 준비 다 마치고 앉아 있어요, 기장님. 걱정 마세요!”
부기장이 썬더 스톰의 틈을 향해 비행기 방향을 돌렸다. 거대한 파도는 전보다 더 가까워졌다. 흩어진 구름 사이를 들락날락하더니 급기야 파도의 벽 속으로 풍덩 다이빙했다. 구름 속을 날아가며 비행기가 심하게 흔들렸다. 세인트 엘모의 불(Saint Elmo's Fire, 뇌우가 발생하기 전에 구름 속에 정전기가 강해지며 동체 표면에 불꽃처럼 전기가 튀는 현상)이 조종실 유리창을 타고 오르내리며 번쩍거렸다. 타는 냄새가 조종실에 스며들었다. 구름 속에 전기장이 강해질 때 나는 전기구이 같은 냄새이다. 굵은 빗줄기와 쌀알 같은 우박들이 으르렁대듯 유리창을 때렸다. 사람에게 허락되지 않은 영역인가? 금지된 정원에 들어온 것인가? 성난 하늘은 불청객에게 한 것 텃세를 부리고 있었다.
꽤 오랫동안 구름 속을 헤매고 나서야 마침내 세상이 뻥 뚫리며 하늘과 땅이 보였다. 나는 관제사에게 곧바로 우리의 위치를 보고하고, 활주로를 향한 마지막 경로에 접근할 수 있도록 허가를 요청했다. 관제사는 고도와 방위각을 지시하며 접근을 허가해 주었다. 새로운 활주로 기상을 보니, 바람은 270도 방향에 14노트였고, 거스트가 23노트까지 불고 있었다. 활주로 방향이 190도 이므로 80도 방향의 측풍이었다. 구름 속에서 빠져나왔지만, 엄청난 에너지는 썬더 스톰 후면에도 멀리까지 영향을 미치고 있었다. 비바람의 방향과 세기가 심하게 변화하며 폭력적으로 비행기를 흔들어댔다.
마지막 접근 단계에 들어서자, 활주로를 밝히는 불빛이 희미하게 보였다. 공항 위를 휩쓸고 지나간 스콜 라인은 활주로 동쪽 5마일 정도까지 이동했지만 아직도 비행기 왼편에 거대한 장막처럼 하늘을 가리고 있었다. 높은 곳에서부터 무시무시하게 내려다보는 것이, 금방이라도 거대한 파도가 되어 나를 덮칠 것 같았다. 비바람은 멈출 줄 모르고, 비행기는 계속 춤을 췄다. 이것은 비행이 아니라 마치 거친 바다를 항해하는 것 같았다.
자연은 웅장했다. 자연은 강렬했다. 그리고 화려했다. 검은 장막은 위엄 있게 꿈틀거리며 끊임없이 번개를 내리꽂았다. 땅에 명중한 번개는 뽀얀 연기를 내뿜었고, 대지는 무방비 상태로 번개의 섬뜩한 에너지를 꾸역꾸역 소화해내고 있었다. 천둥은 감히 대꾸할 수 없는 위력으로 나에게 고함을 치고, 거센 비바람은 우리의 비행을 조롱하듯 요란하게 창문을 때려댔다. 마치 제국의 모함을 침몰시키는 스타워즈의 장면 한가운데 있는 것 같았고, 십자포화 속에서 고향 땅을 향해 전진하는 시빌 워의 병사가 된 것 같기도 했다. 압도적인 위력에 겁조차 나지 않았다. 인간의 감정, 생각, 이런 게 다 무슨 소용이람. 도저히 저항할 수 없이 나는 얼음이 되어가고 있었다.
그러나 아주 짧은 순간, 내 몸속에 부드럽고 따듯한 무엇이 흐르는 것을 느꼈다.
그리고 마술에 홀린 것처럼 무시무시한 하늘의 파도가 갑자기 전혀 다른 모습으로 보이기 시작했다.
어머니 자연은 절대로 우리를 버리지 않을 것이다.
나는 내 비행기를 사랑하고, 내 동료를 믿으며, 내 승객의 아름다운 미래를 존경한다. 지금 여기 ‘날개 달린 기계’와 ‘사람이란 유기체'가 서로 한 덩이가 되어 어머니 품속을 모험하고 있다. 그들은 어머니를 닮아서 서로 믿고, 의지하고, 작용하며, 사랑하고 있다. 약해빠진 날개에 티끌 같은 인간들이지만 어머니는 결코 우리를 파괴하지 않을 것이다.
우리는 지금 장난스러운 기류에 맞춰 춤을 추며, 화려한 레이저 분수쇼에 박수를 치며, 어머니 자연이 만들어준 놀이터에서 대축제를 즐기고 있다. 검은 장막은 든든한 울타리였다. 떨어지는 번개는 화려한 불꽃놀이였으며, 천둥은 우리를 환영하는 팡파르였다. 돌풍은 계속 우리를 헹가래 쳐주고 있다. 비바람은 수다스럽지만 참 살가운 친구다. 스킨십을 좋아하니 말이다. 나는 두 팔을 옆으로 뻗어 어머니가 가리키는 곳을 향해 천천히 헤엄 쳤다. 화려한 축제는 이제 절정이고, 고향길은 밝게 빛나고 있다.
천 피트 정도에서 착륙 허가를 받았고, 관제사는 마지막으로 활주로 기상을 불러주었다. 바람은 우측풍 15노트가 불고 있었다. 자동착륙을 할 수 있는 조건이었다. 빗줄기는 많이 가늘어진 것 같았다. 이제 라이트(Light) 레인이다. 나는 자동착륙을 결정했고, 조종을 맡은 부기장도 자동착륙에 동의하였다. 바람은 15노트밖에 안되었지만, 아직도 기류가 불안정했다. 갑자기 강한 돌풍이 불면 언제든 착륙을 중단하고 고 어라운드(Go-Around) 해야 한다. 만약 고 어라운드를 하게 되면 두 번째 시도는 없다. 여기서 고 어라운드는 딱 한 번 만이다. 두 번째 착륙에서 돌풍이 또 불지 않으리라는 보장이 없기 때문이다. 연료가 타이트한 만큼, 모든 것은 계획대로 이루어져야 한다. 이번에 실패하면 지체 없이 돈무앙 공항으로 가야 한다.
그런데 이상했다. 보고받은 활주로의 바람은 우측 풍인데, 계기에 나타난 바람은 좌측 풍이 었다. 실제로 비행기도 좌측풍을 받고 있었고, 바람의 방향이 불규칙적으로 변화하고 있었다.
‘조금 있으면 바람 방향이 오른쪽으로 돌아가겠구나.’
바람의 방향이 급하게 바뀌면 비행기 자세가 흐트러져서 자칫 착륙할 수 없는 상황이 될 수 있다. 잠시 후 결심 고도인 200피트가 되었다. 경보기는 기계음으로 "미니멈(Minimum)!"이라고 외쳤고, 나는 코앞에 활주로를 노려보며 “랜딩!”이라고 외쳤다. 비행기는 뒤뚱거리며 활주로 목표지점을 향해 날아갔다.
‘도대체 언제 바람 방향이 돌아가는 거야?’
아직도 바람은 좌측 풍이다. 착륙 직전에 바람이 바뀌면 더 위험하다. 나는 창 밖 활주로와 계기들을 정신없이 스캔하였다. 언제든 위험하면 고 어라운드 해야 한다. 나는 평소보다 몇 배나 빠른 스피드로 눈을 돌려 댔다. 마치 REM(Rapid Eye Movement)처럼.
‘하하 램(REM) 수면? 그렇다면, 나 꿈꾸고 있는 거야?’ 나는 눈이 빨리 돌아가는 상황이 웃겼다. 개그맨 이경규의 눈 돌리기 신공도 생각났다. 코웃음이 나오더니 이번에는 미국의 록밴드 ‘REM’이 생각났다. '그 노래 제목이 뭐더라...'
땅은 점점 다가온다. 아직도 바람 방향은 바뀌지 않는다.
“피프티(Fifty), 포티(Forty)……”
비행기가 갑자기 좌측으로 기울어진다. 한 6~7도 정도. 드디어 바람이 돌아가나 보다. 쓰러스트 레버(Thrust lever)를 꼭 쥐고 있는 부기장의 손에 내 손을 얹었다. 여차하면 직접 고 어라운드 하기 위해서였다. 부기장도 손을 빼지 않았다. 따듯한 온기가 느껴졌다.
“써티(Thirty), 트웬티(Twenty)……”
비행기가 용을 쓰며 기어이 중심을 바로 잡는다. 바람 방향이 꽤 많이 돌아갔지만 용감한 7710이 ‘으랏차차’ 하면서 자세를 잡아내고야 만다. 올림픽 체조 경기였다면 10점 만점에 10점이다!
“리타드(Retard)!”
이제 엔진을 줄여도 좋다는 말이다. 부기장이 녀석의 말을 믿고 쓰러스트 레버(Thrust Lever)를 천천히 뒤로 뺐다. 7710은 흠뻑 젖은 활주로위에 가볍게 내려앉았고, 바닥이 미끄러운지 균형을 잡으려 꼬리를 흔들었다. 바퀴가 바닥을 꾹 누르고 엉덩이 아래로 접지력 느껴지자, 부기장은 리버스 쓰러스트(Reverse Thrust, 엔진 역 추진 장치. 착륙할 때 감속을 위해 사용함)를 과감하게 열었다. 소나기가 내린 활주로는 미끄러웠고 평소보다 느리게 속도가 줄었다. 요란한 역추진 굉음과 함께 속도가 천천히 줄어들자 빠져나갈 유도로가 눈에 들어왔다. 그때 나도 모르게 갑자기 기합이 나왔다.
“이얍!! 그렇지!!”
타이밍도 못 맞추고 뒷북을 치며 소리를 지르자 부기장이 엉뚱하게 쳐다봤다. 나는 크게 웃었고, 부기장도 웃었다. 서로 눈을 마주 바라보니, 아직도 우리는 한 덩어리, 한 몸이었다.
게이트까지 천천히 택시(Taxi) 하는 동안 비가 다시 억수같이 내렸다. 시야가 잘 보이지 않아 엉금엉금 기어가듯 택시 했다. 빗줄기가 다시 가늘어지자 고개를 들어 다시 하늘을 바라보았다. 아직도 번개가 떨어지고 있었고, 그 사이로 또 한 대의 비행기가 땅으로 귀환하고 있었다. 내 다음 순서인 타이 항공이었다. 타이 항공 뒤로 꼬리를 물고 접근하는 비행기의 행렬이 별처럼 빛났다. 거센 기류에 하나같이 뒤뚱거리고 있었지만, 이제는 걱정되지 않았다.
‘7710아, 네 친구들 봐라. 멋지지 않니? 하지만 오늘은 네가 대장이다!’
하늘은 여전히 검었지만, 더 이상 성난 얼굴이 아니었다. 우리들이 그렇게 기특한지, 어머니의 환영은 도무지 멈출 줄을 몰랐다.
비행기가 게이트에 도착했고 승객들이 내리는 모습이 보였다. 허무하게 헤어지는 것이 아쉬웠지만, 그냥 속으로 인사했다.
‘행복하세요...’ 진심이었다.
승객이 모두 내리자 승무원들은 서로에게 “수고하셨습니다!”를 기운차게 외쳤다. 방콕 지점장도 직접 나와 반갑게 환영해 주었다. 나도 인사말을 외치며 빠짐없이 하이파이브를 했다. 가방 정리를 하다 문득 후레시 라이트를 꺼내 들었다. 다시 유치원 우비를 입고 나가 비행기를 만나보기로 했다.
'미안했다, 7710. 부산에서도 고생했는데 여기 와서 더 개고생 했네.'
하지만 과묵한 7710의 얼굴에서 왠지 자랑질하고 싶은 능글능글함 느껴졌다. "까짓 뭐 대단하다고."라고 말하는 것 같았다. 나는 미소를 지으며 간단히 목례를 한 후 비행기를 떠났다.
힘든 비행이었던 만큼 또 한 번 배웠다. 나는 믿게 되었다. 대자연은 순응하는 우리를 절대 버리지 않을 것이라고. 서로 믿고, 존중하고, 의지하며 사랑하는 것이야말로 우리가 어머니 자연에 순응하며 사는 유일한 길이라 생각했다.
바람이 불면 나무가 흔들리고, 나무가 흔들리면 열매가 떨어지며, 열매는 다른 동물을 먹여 살리고 씨앗을 맺게 한다. 나무를 흔들리게 한 바람은 결국 새로운 생명을 탄생시키는 에너지가 되는 것이다. 이 에너지는 언제나 우리 곁에서 물 흐르듯 순환하고 있다. 아무리 과학이 발전하고 인간이 스스로의 한계를 넘어도, 이 경이로운 대자연의 에너지를 멈출 수는 없다.
거대한 하늘 속에서 날개 달린 기계는 그저 약하고 하찮은 존재이다. 날개 달린 기계는 서로를 믿고 사랑하는 사람들의 손에 날려져야 한다. 그래야 그는 외롭지 않게 날 수 있을 것이며, 대자연은 마음 것 헤엄치도록 그를 품어줄 것이다.
오늘 아낌없이 받은 어머니 자연의 에너지는 아마도 저기 떠나는 신혼부부들의 사랑 속에 흠뻑 스며들었을 것이다. 앞으로 그 에너지가 새로운 생명으로 꽃핀다면, 그리고 그중에 미래의 조종사가 탄생하여 언젠가 오늘의 하늘과 다시 만나 -데자뷔를 느끼며- 어색하게 인사를 나누게 된다면. 만약 그렇게 된다면 정말 멋진 대자연의 순환이 아닌가?
어머니 자연은 날개 달린 기계를 멋지게 날게 해 준다.
그녀의 따듯한 품 속에서 서로를 믿고 사랑하는 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