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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신지수 Feb 10. 2022

기억(Memory)

조종실에서 보는 세상 1-2

2011년의 글을 2022년에 다시 쓰다.

고 박본석 기장을 추모하며.




1999년 4월 14일 오후, 나는 회사 OC(Operation Center) 빌딩 8층에 있었다. 복도에 나란히 붙어있는 게시물들을 성의 없이 훑어보고 있을 때, 귀에 익은 목소리가 나를 불렀다.


"지수야!"


"아, 형 오랜만이에요, 비행 나가요?"


같은 MD-11을 타는 선배 부기장이었다.


"아니.  비행은 내일이고, 미리 공부 좀 하려고."


"오, 대단한데, 너무 열심히 하는 거 아냐?"


나는 빈정대며 그의 어깨를 툭 쳤다.


"무슨…… 처음 가보는 곳이라서. 너 혹시 상해 가봤니?"


"상해? 지난주에 갔다 왔는데. 저번 달에도 갔었어."


그는 어린애 같은 표정으로 내 팔을 잡아끌었다.


"잘됐다. 나 브리핑 좀 해줘라."


"중국은 정말 짜증 나. 형도 조심해요. 여긴 정말 잘해야 본전이야. 글쎄, SID(Dtandard Instrument Departure) 출발 절차가 말이야, 6마일까지 1000피트로 가게 되어있어(이륙하자마자 아주 낮은 고도로 꽤 오랫동안 비행해야 한다는 뜻이다.) 진짜 어이없어!"


나는 자질구레하게 상해 홍차오 공항에 대한 경험담을 이야기해주었고, 그는 하나라도 놓칠까 이면지에 깨알 같은 글씨로 적어나갔다.


브리핑을 마치고 그는 캔 커피를 사주었다. 나는 담배도 안 피우는 그를 억지로 옥상으로 데려가 얘기를 나누었다.


"형수님 병원 다시 나가세요(부인이 간호사였다)? 둘째는 이제 백일 지났어요?"


"백일 거의 다 됐지. 야, 둘째 나오니까 첫째랑 또 다르더라. 너무 예뻐. 너도 빨리 둘째 낳아라. 애 엄마가 좀 힘들겠지만……."


"사실 저도 둘째 생겼어요. 몇 주 안됐어요."


"야! 축하한다. 너 닮은 놈 나오면 안 되는데!"


"크크크. 그건 맞는 말씀이네요!"


쓸데없는 잡담을 너무 많이 한 탓인가? 마지막으로 그가 무슨 말을 했는지, 마지막 그의 얼굴이 어떤 모습이었는지 도무지 기억이 나지 않는다. 그것이 너무 원통하다.


다음날 오후, 토요일. 나는 집에서 한가롭게 TV 리모컨을 들고 방바닥 위를 굴러다니고 있었다. 오후 4시쯤. 갑자기 모든 방송에서 차임 소리와 함께 뉴스 속보가 떴다.


"대한항공 화물기 상해에서 추락"


"……"


한 동안 TV 화면 아래에 나타난 글자를 멍하니 바라보고 있었다. 뒷머리가 쭈뼛 서고 등골이 오싹해졌다. 잠시 후 두 번의 차임 소리와 함께 다시 새로운 자막이 나타났다.

 

"대한항공 MD-11 화물기 상해에서 이륙 직 후 추락, 기장 홍성실 부기장 박봉석 탑승자 3명 전원 사망"


오, 하느님 정말 ‘박봉석’이었으면 좋겠다! 하지만 기대는 몇 초도 버티지 못하고 무너졌다. 원통하게도 MD-11 부기장 중에‘박봉석’이란 사람은 없다. 그렇다면, 어제 만났던, 둘째가 예쁘다고 팔불출같이 자랑하던 바로 그 ‘박본석’ 선배가 상해에서 죽었단 말인가?


잠시 후 전화기가 시끄럽게 울어대기 시작했다. 부모님, 친구, 친척들이 차례로 나의 안부를 물었다. 뉴스를 보고 놀란 그들에게 나는 괜찮다며 위로를 하고 있었다. 누가 누구를 위로하고 있는 것인가? 머리가 어지러웠다.


곧이어 한 대학 선배로부터 연락이 왔다. 본석 형 집으로 어서 오라고. 대학 선배였던 형이 결국 이렇게 대학 동문들을 한자리에 모았다. 내가 도착했을 때에는 이미 해가 떨어져 어둠이 깔려있었다. 허름한 빌라 앞에 벌써 하얀 천막이 쳐 있었고, 테이블 위에는 대한항공 마크가 붙은 생수와 종이컵이 세팅되어 있었다. 낯익은 회사 사람들도 많이 있었다. 눈치 살피며 이 사람 저 사람 대충 인사를 나눈 후, 형수를 찾아보았다.


좁은 집에서 형수를 찾는 일은 어렵지 않았다. 하지만 그녀는 이미 실신해 안방에 누워 있었고, 나를 알아보지 못했다. 그리고 그 옆에는 아무것도 모르고 두 손으로 장난감을 조몰락 거리는 세 살짜리 아이와 배냇저고리에 둘둘 감긴 갓난아기가 누워 있었다. 참았던 눈물이 왈칵 쏟아져 나왔다.        


‘어쩌란 말인가? 도대체 어쩌란 말인가!’


돌아가신 홍성실 기장도 함께 비행한 적이 여러 번이었다. 몇 달 전에는 나와 함께 파트너로 정기 시뮬레이터 훈련을 받기도 했다. 그분의 죽음 역시 매우 충격적이고 슬픈 일이었지만, 워낙 친하고 따랐던 본석 형의 죽음은 도무지 받아들이기 어려웠다.


그는 열정 있고 똑똑한 조종사였다. 강하고 확신 있는 모습 뒤에 어수룩함과 촌스러움이 숨어있어서 더 매력적이었다. 약 올리면 금방 발끈하고 칭찬하면 어느새 아이 같은 표정을 숨기지 못한다. 함께 술 마신 적도 여러 번인데, LA에서 치킨에 맥주를 마시면서 나에게 비행 못한다고 마구 야단쳤던 기억이 난다. 겨우 닭 한 마리 사면서 갑질한다며 나도 지지 않고 대들었는데.




사건이 터진 지 몇 주 후,  나는 안전보안실로 발령이 났다. 사고와 상관없이 이전부터 예정되어 있던 인사 발령이었는데, 나도 MD-11 조종사다 보니 상해사고조사 TF팀에도 덩달아 합류했다. 일을 시작하자마자 우선 CVR(Cockpit Voice Recorder: 블랙박스의 조종실 음성 기록)부터 들어야 했다. 겁이 났다. 듣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결국 책상에 앉아 이어폰을 귀에 걸고 떨리는 마음으로 녹음기의 플레이 버튼을 눌렀다. 정적이 흐르는 동안 초조하게 연필을 돌려댔다. 이윽고 홍기장과 본석 형의 목소리가 흘러나오자, 오래 동안 헤어진 가족을 만난 기분이 들었다. 이런저런 잡담, 체크리스트 읽는 소리로 시작하여 비행기와 사투를 벌이는 대화들로 이어졌으며, 살기 위해 절규하는 소리로 끝났다. 마지막 추락 직전 절망적인 비명과 테이프가 끊어지는 순간 엄습한 적막은 공포스러운 반전이었다. 몇 번이고 다시 들었다. 열 번, 스무 번, 서른 번. 계속 듣다 보니 머릿속에 사고 당시 조종실의 모습이 그려지기 시작했다. 본석 형의 목소리는 메아리처럼 귓가를 맴돌았고, 마치 귓속말로 나에게 무언가 말하고 있는 것 같았다.


이어폰을 내려놓고 잠시 쉬었다. 옥상에 올라가 바람을 쐬었다. 귓속에서 맴돌던 메아리는 사라졌고, 파란 하늘은 무심하게도 대지를 따뜻하게 덮고 있었다. 아. 따듯한 봄날인데.




시간이 지나 그 해 겨울 12월. 기대와 두려움으로 새로운 밀레니엄을 준비하던 연말 어느 날, 나는 영국 런던 교외의 한 호텔에 있었다. 불행히도 12월 22일 영국 런던에서 또다시 화물기가 추락했고, 나는 사고 처리와 조사를 위해 현장에 파견되었다. 탑승자 4명이 모두 사망한 끔찍한 사고였음에도 불구하고, 새로운 밀레니엄에 흥분된 분위기 속에 이 사고는 큰 뉴스가 되지 못했다. 런던 시내에서는 익숙하지 않은 숫자인 ‘2,000’을 환영하는 축제가 연일 벌어졌고, 현장사무실의 컴퓨터 장비에는 ‘Y2K Proof’라는 스티커가 여기저기 붙어있었다.


그 당시 현장의 동료 중에 사고 사진 촬영이 전문이던 S 과장이 있었는데, 상해 사고 때에도 현장에 있었던 분이다. 며칠째 사망자의 유해를 수습하기 위해 함께 사고 현장을 돌아다녔는데, 그날 지금까지 찾았던 유해 중 가장 큰 유해를 찾았다. 사람의 허벅지 부분으로 추정되었는데, 엄청난 충격에도 뼈가 분리되지 않고 온전하게 붙어있었다. 그날 저녁 S 과장과 함께 호텔 바에서 맥주 한 잔을 했다. 그는 텁텁한 기네스 한 잔을 쭉 들이켜더니 발그스레한 얼굴로 대뜸 이런 말을 했다.


"나, 박본석 씨를 봤어."


"네? 본석이 형을요? 언제요?"


"어젯밤에……."


"꿈속에서 말씀이세요?"


"응……. 지수 씨, 박본석 부기장이 오늘 시신을 찾아 준거야."


"……."


아 추워. 난방을 하긴 하고 있는 건지. 손님도 없어 썰렁한 바인데. 두껍게 껴입은 잠바 속으로 털이 쭈뼛이 섰다. 전부터 들어 알고 있었지만, S 과장은 상해에서도 본석 형 유해의 가장 큰 부분을 찾았던 분이다. 뒷머리와 목덜미에서 어깨와 등 위쪽까지의 상체 뒷부분이었는데 넥타이까지 그대로 매어져 있었다고 했다.


잊고 있었던 본석 형이 다시 생각났다. 그동안 지지부진하던 상해사고 TF 일들이 서서히 걱정되었다. 본석 형이 원통한가 보다. 내가 최선을 다하지 않은 것 같아 마음이 아팠다.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왜 나한테 오지 않고 S 과장님한테 가셨나…….’


길게 한숨을 쉬며 기네스를 연거푸 들이켜는데, 도무지 취하지도, 잠이 오지도 않았다.




서울로 돌아와 런던 사고 처리가 어느 정도 정리되었을 무렵, 나는 다시 상해사고 TF팀에서 바쁘게 일을 했다. 2000년 1월 4일에는 형이 축복해 주었던 둘째 아이도 세상에 나왔다. 하지만 예정일보다 몇 주나 일찍 나와 런던에서 아가가 태어난 소식을 들어야 했다.  어쨌든 둘째 아이는 나를 닮지 않아 얼굴도 예쁘고 마음도 착하다. 모두 형 말대로 되었다.

 

상해사고는 FDR(Flight Data Recorder, 블랙박스의 비행 데이터 기록)이 파괴되었고, 중국 자료의 신뢰도가 떨어져 매우 풀기 어려웠다. 공항의 낡은 군용 레이더가 기록한 레이더 트랙과, 일부가 손상된 CVR(Cockpit Voice Recorder) 만으로 사고 당시 비행 경로를 재구성하는 일은 불가능에 가까웠다. 어느정도 이론적이고 과학적인 추정은 가능했지만, 증거 기반의 사실 규명에는 한계가 있었다.. 미국으로 건너가 MIT 교수의 도움도 받고, 항공 전문 변호사의 컨설턴트도 받았다. 서울대학교도 찾아보았다. 하지만 뚜렸한 성과없이 결국 사고는 미스터리로 남았다. 그 와중에 상해에서 나쁜 소식이 들려왔다. 우려했던 것처럼 사고의 원인을 조종사 과실로 결론짓는 분위기였다. 중국 CAAC(중국 민항 총국)와 미국 NTSB(미국 교통안전 위원회)는 박본석 부기장이 남긴 "천오백 피트요!"라는 말 한마디를 끈질기게 물고 늘어졌다. 미터법을 사용하는 중국에서 관제사의 고도 지시를 피트로 착각하여 비행했다는 것이다. MD-11 비행기의 경우, 미터를 사용하여 비행하기 위해서는 비행 전에 미리 조종실의 고도계와 고도 입력장치를 미터법으로 변환해 놓아야 하는데, 중국에서 비행 도중에, 그것도 이륙하자마자 피트 단위로 변환 장치를 바꾸는 것은도저히  납득할 수 없었다. 중국의 사고조사는 전혀 과학적이지도 합리적이지도 않았고, 손해 볼 것 없는 미국은 입을 다물었다.   


우리는 반박을 위해 방대한 자료를 만들었고, 상해에서 열렸던 최종 한-중-미 합동회의에 이 모든 자료를 들고 참석하였다. 우리는 열심히 우리의 주장을 폈지만, 이러한 노력은 결국 모두 물거품이 되었다. 중국은 조종사 과실을 사고 원인으로 한 사고조사보고서를 발표하여 ICAO(국제 민간항공기구)에 제출하였다. 우리의 주장은 오직 ‘기체 고장의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는 짤막한 문장으로 보고서 한 구석에 추가되었다. 전문가들은 대부분 중국 조사 보고서의 결론을 믿지 않았다. 지금도 원인 불명의 미스터리 사고로 다루어진다. 그래서인지, 중국 정부는 우리에게 어떤 제재도 내리지 않았다. 하지만 3년 사이에 연달아 일어난 사고들 때문에 건설교통부(지금의 국토교통부)는 고민이 컷다. 결국 중국의 보고서를 내세워 노선 취소라는 무거운 처벌을 내렸고, 회사는 노선을 다시 찾기 위해 행정 소송에 들어가기로 결정했다.

 

상해에서 맡은 마지막 일은 중요한 증거물을 골라 따로 보관하고, 나머지 잔해를 처리하는 것이었다. 나는 사고가 난 지 1년이 지나 처음으로 직접 비행기 잔해를 보게 되었다. 그러나 공터에 모아놓은 잔해 더미는 초라하기 그지없었다. 대형기인 MD-11이라 할 수 없을 정도로 잔해의 양이 줄어 있었다. 경비를 세워 관리했다고 하는데, 주민들이 몰래 잔해들을 훔쳐가서 고물상에 팔았다고 한다.


비참하게 누워있는 파란 꼬리 날개 위에 불에 그을린 태극마크와 HL7373 글자가 선명하게 눈에 들어왔다. 억울함에 다시 눈물이 흘렀다.


‘칠삼아! 도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거야? 그렇게 멋지고 아름다웠던 모습이 어떻게 이 꼴이 될 수 있는 거야?’

 

날카로운 알루미늄 합금과 컴포짓 조각이 손가락을 찌르는 것도 모르고 여기저기를 헤집었다. 눈물 글썽이는 모습을 다른 사람들에게 보이지 않으려 혼자 멀리 떨어져 작업을 했다. 들키지 않으려 노력했지만 나중에 거울을 보니 얼굴은 검은 얼룩으로, 손바닥은 상처로 말이 아니었다.




서울로 돌아온 후 우리는 곧바로 행정 소송에 들어갔다. 나도 정신없이 일했다. 홍기장과 본석 형의 명예도 찾고, 사기가 떨어진 회사 분위기도 바꿔야 했다. 재판정에서는 행정 조치의 당위성을 주장하는 공무원들과 옆에서 이를 지원하고 부추기는 경쟁사에게 적개심을 느낄 정도였다.


해를 넘기는 지루한 싸움이 계속되는 동안 고인들은 점점 잊혀 가고 있었다. 재판정에서 ‘조종사’라는 말은 수백 번 언급되었지만 그 ‘조종사’는 영혼이 없었다. 고인에 대한 그리움과 연민은 어디에도 없었다. 나는 분노했다. 하지만 분노로는 재판을 이길 수 없었다. 서로 물고 물리는 싸움 속에서 나는 서서히 동력을 잃어갔으며, 결국 재판에서도 패배하고 말았다. 나는 한계를 느꼈고, 탈진한 나는 TF팀에서 비상근으로 전환을 요청했다. 이렇게 점점 일로부터 멀어져 갔고 결국 안전보안실도, 상해사고 TF팀도 모두 떠나 버렸다.


나는 떠났지만, 남은 사람들의 노력으로 2심에서 판결을 뒤집었다. 동료들에게 진심으로 감사드린다. 정말 훌륭한 일을 해낸 것이다. 그러나 나는 재판장 밖에서 승리의 소식을 들어야 했고, 아무 역할도 하지 못해 지금도 형을 볼 낯이 없다. 지칠 대로 지친 싸움 속에서, 마음속으로 형을 편히 보내 드리지 못한 채 주저앉아 울고 말았던 것이다.

 

‘이해해 주세요……. 조사나 재판 따위 아예 처음부터 하지 말걸 그랬어요.’


그저 남들처럼 기억하고 기도하며, 시간 내서 형수님과 애들이나 한 번 더 보러 갈걸 그랬다. 그랬다면 오히려 마음속으로 형을 아름답게 보내 드릴 수 있었을 것이다. 명예도 노선도 찾았지만, 어째 내 마음은 더 많은 빚만 떠안은 것 같았다.   




너무나 오래전 일이다. 상해사고는 이제 12년이 넘었고, 2009년 12월 23일 회사는 기다리던 무사고 10년을 맞았다. 많은 사람들의 노력으로 이루어낸 값진 결과다. 서로 자신의 성과인 것처럼 우쭐해하며 축배의 잔을 드는 사람도 있을 것이고, 사고란 것 자체를 역사책 속 먼 옛날 선조들의 고난쯤으로 생각하는 신세대도 있을 것이다. 과장된 생각일지 몰라도, 이제는 ‘사고’하면 슬픔이나 연민 대신 주가 하락, 업무 과중, 혹은 휴가 일정 차질 등을 먼저 걱정하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안전 시스템, 안전 문화의 개혁을 위해 짧은 시간 동안 많은 투자가 이루어졌고, 그만큼의 눈부신 성과를 만들어 냈다. 우리들의 인내와 노력으로 깃발 꺾인 회사를 다시 세운 것이다. 하지만 생각해 보라. 뭐가 무사고 10년인가? 과연 기뻐서 축배를 들 일인가 말이다. 그 사람들은 죄인인가? 아니면 희생자인가? 왜 목숨을 내놓아야만 했는가?


1999년 4월 15일 운 좋게 비행기가 정상으로 돌아와서 홍 기장님과 본석 선배가 살았다면,


1997년 8월 6일 괌에서 ILS(정밀계기착륙장치)가 고장 나지 않고 정상적으로 작동하고 있었다면,


99년 12월 22일 런던에서도 그날 마침 밖이 훤히 내다 보이는 맑은 날씨였다면,


그랬다면 어땠을까? 그랬다면 지금도 많은 사람들이 살아있을 것이고, 이렇게 슬프지 않을 것이다. 아마도 형은 지금쯤 교관 기장이 되어 잘난척하며 나를 야단치고 있겠지.


그러나 만약 그랬다면, 지금 우리가 맘껏 누리고 있는 이 소중한 ‘안전’ 또한 결코 쉽게 이룰 수 없었을 것이다. 어려웠던 시절, 그들이 앞서 죽었기 때문에, 뒤에 가던 우리들이 겁에 질려 살기 위해 발버둥 친 것뿐이다.   


우리 일상 속에. 우리 기억 속에. 그들이 남긴 유산은 아주 가까이 빛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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