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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신지수 Feb 02. 2022

눈(Snow)

조종실에서 보는 세상 1-1

2010년의 글을 2022년에 고쳐 쓰다.




2010년 1월 4일. 나는 겨우 6개월 된 초보 기장. 나름의 순진한 다짐과 함께 2010년 새해 첫 비행을 했다. 인천과 삿포로를 왕복하는 기분 좋은 낮 비행. 그러나 해피 뉴 이어 기장 방송을 준비하던 전 날의 설렘은 온데간데없고 새벽부터 울렁증이 밀려왔다. 바로 눈 때문이다. 뉴스에서 몇십 년 만에 폭설이라고 호들갑을 떨어댄 바로 그 눈.


출근길. 허옇게 김서린 버스 창을 손등으로 문질러 보니 아직도 어두운 새벽이다. 채로 밀가루 털듯이 끊임없이 털어대는 하얀 눈은 고요한 고속도로를 삼켜버렸다. 여기저기 길 한가운데 멈춰있는 차들. 중앙차선 건너편에도 많이 있었는데, 깜빡거리는 비상등 사이로 퇴근하는 우리 회사 승무원들이 보이는 것 같다. 어이없겠다. 어서 집에 가서 자고 싶을 텐데.


버스 창 커튼을 치고 눈을 감았다. 오늘 같은 날에도 어미 새는 먹이를 찾아 춥고 눈 오는 하늘을 날아오르겠지? 내가 딱 그 꼴인가? 날개에 눈이 쌓이면 털어내고, 눈보라 속에서 눈을 가늘게 뜨고, 착륙할 때에는 행여 미끄러져 다리가 부러질까 조심 또 조심. 어떤 놈은 정말 미끄러지기도 할 거야. 내가 오싹해진다.


‘왜 하필 오늘이야?’

 

공항 도착. 비행 전 브리핑을 덤덤하게 했다. 어차피 비행이 취소될 것 같지 않았다. 좀 오래 지연될 뿐. 인천도 눈, 삿포로도 눈이다. 한숨이 나왔지만 어쩌겠나. 잘 준비해서 시간과 함께 흘러가는 수밖에. 파도가 거셀 때는 힘 빼고 리듬만 잘 타면 절대 뒤집히지 않으리라 믿었다. 객실 승무원과의 합동 브리핑은 분위기가 좋았다. ‘피할 수 없으면 즐겨라’ 마법에 취해 모두 함께 웃을 수 있었다.


10시 5분 출발 예정이던 비행기는 역시 오래 지연되었고, 우리는 출발 게이트에서 긴 시간을 기다려야 했다. 손님들과 함께 앉아 하얀 창밖을 바라보고 있으니, 비행기를 타는 이유는 서로 다르지만 한 배를 탄 동지애가 느껴졌다. 반복해서 들려오는 지연 방송은 이제 아무 의미가 없었다. 커다란 창 밖에 펼쳐진 파노라마 풍경을 바라보고 있으니, 동화 속 하얀 마을의 작은 사람들은 진짜가 아닌 것 같았다. 사람들은 여기저기서 삽을 들고 분주하게 움직이고 있었으며, 수하물을 나르는 토우카(Tow Car)들이 미끄러운 눈밭 위에서 헛바퀴를 돌고 있었다. 비행기들은 한대, 그리고 또 한대, 느릿느릿 출발하고 있었다.


어느새 나는 팔짱을 낀 채 꾸벅꾸벅 졸고 있었다. 모양새가 한심하지만, 짧은 꿀잠은 거친 슬로프 위에 오르기 전 긴장을 풀어준 특효약이었다.   

폭설이 계속 오는 중에는 시정도 매우 나쁘다. 노면 제설 작업을 해도 어느새 눈이 다시 쌓인다.





3시간의 기다림 끝에 드디어 내가 탈 비행기가 게이트에 도착했다. 조종실에 들어가 짐을 풀고 밖으로 나가 외부 점검을 했는데, 이것이 뜻밖에 즐거웠다. 무릎까지 눈이 쌓여서 영화 ‘러브스토리’의 테마 음악이 생각났다. 여기서 냅다 누워버리면 목 빠지게 기다리는 승객들이 분노하겠지.  


다시 조종실로 돌아와 기상과 활주로 노면 정보를 수집했다. 이 정보를 사용하여 이륙성능을 계산했는데, 눈으로 덮인 활주로에서의 이륙은 흔치 않은 일이라 실수할까 봐 몇 번을 다시 계산했다. 운항 교범을 펼쳐 놓고 관련 절차들도 꼼꼼하게 살펴보았다. 흠. 이륙 시 TOGA 출력을 쓰고(최대 엔진 출력), 스탠딩 테이크 오프를 해야 하고(Standing Takeoff: 이륙할 때 최대 출력으로 올리기 전 중간 정도의 출력으로 먼저 엔진 런업(Run-up)을 하고 이륙하는 것), 이륙하면서 날개와 엔진의 방빙 장치를 사용하고 (Wing & Engine Anti-ice system: 날개 앞부분과 엔진 입구를 뜨겁게 하는 장치. 이 부위에 눈이 쌓이지 않도록 한다), 이륙하기 전에 제빙, 방빙 작업도 하고(De-icing and Anti-icing fuid spraying: 비행기 표면에 달라붙은 얼음과 눈을 제거하고, 다시 쌓이지 않도록 화학 용액을 뿌리는 것), 홀드 오버타임 계산도 해야 하고(Holdover time calculation: 제빙, 방빙 용액을 날개에 뿌린 후 효과가 지속되는 시간을 계산하는 것) 등등, 많기도 하다.


조금 전까지 꾸벅꾸벅 졸던 나는 어느새 열정 넘치는 전문가로 변신해 있었다. 잘나고 멋져서가 아니다. 엄청 겁나기 때문이다! 조종사라면 누구나 느끼는 압박. ‘한방에 훅! 간다’라는 명언이 마음 한구석에서 날 째려보고 있었다. 물론 ‘실수하면’이라는 조건문이 생략되어 있지만, 이미 겁주기에 충분했다.




드디어 준비가 마무리되었고, 승객들도 모두 탑승했다. 거의 4시간 가까이 지연되었다. 승객들은 출발부터 이미 지쳤다. 관제탑으로부터 출발 허가를 받아 푸시 백(Push back: 출발할 때 비행기를 뒤로 미는 것)을 시작했다. 6번 게이트에서 비행기를 밀기 시작하여 엔진 시동 지점인 'Red 3'까지 꾸역꾸역 움직이고 있는데, 갑자기 그라운드 크루로부터 연락이 왔다. 여느 때보다 훨씬 높은 목소리가 심상치 않았다.


“기장님, 미끄러워서 더 이상 안 밀립니다. 터그 카(Tug-car: 비행기 견인차) 바퀴가 헛돌아요! Red 3까지 못 갈 것 같은데, 그냥 여기서 엔진 걸고 나갈 수 없나요?”


노면이 굉장히 미끄러운가 보다. 비행기는 도중에 삐딱하게 서버렸다. 곧바로 관제탑에 지금 위치에서 엔진 시동을 걸 수 있는지 물어보았다. 상황이 이렇다 보니 관제사도 얼른 허가해 주었다. 나는 그 자리에서 파킹 브레이크를 걸고 엔진 시동을 걸기 시작했다. 순조롭지 않지만, 그래도 진도를 하나씩 빼고 있었다. 한참 시동을 걸고 있는데, 지나가던 747-400 점보 한 대가 우리 비행기 바로 앞에서 멈추더니 꿈쩍도 하지 않았다. 이 비행기는 견인해서 이동 중이었는데, 끌고 가던 견인차(Tug-car)의 바퀴가 눈 속에 파묻혀 헛돌고 있다.  


‘이런, 난 어떻게 빠져나가라고…?’

 

사람들이 헛도는 바퀴 주변으로 몰려와 열심히 삽질을 하고 있는데, 거대한 점보는 이를 비웃듯 미동도 하지 않았다. 시간은 초초하게 지나가고 이륙은 더 늦어지게 생겼다. 어차피 기다리는 것, 이때다 싶어 기장 방송을 하기로 했다. 출발 지연에 대한 사과도 하고, 제빙, 방빙 작업에 관한 안내 방송도 해야 했다. 개나리반 초보 기장답게 책자를 꺼내 또박또박 방송을 시작했다.


"손님 여러분 저는 기장입니다. 오늘 폭설로 인하여 출발이 많이 지연된 점 여러분의 따듯한 양해를..."


그런데 갑자기 무선통신기에서 우리 비행기를 부르는 관제사의 목소리가 시끄럽게 들렸다.


"KAL765편! 관제탑입니다!"


웬 스피커 볼륨은 그리 크게 올려놨는지. 큰소리에 깜짝 놀라 머릿속이 하얀 눈밭이 되었다. 나는 얼떨결에 기내 방송에다 대고 대답을 해버렸다.


"KAL765편입니다. 말씀하세요."


“KAL765, 대답하세요! 점보기 우측으로  빠져나갈 수 있겠습니까?!”


"잠시만요. 너무 가까워서 공간이 없을 것 같은..."


"KAL765,  KAL765!"  


왜 자꾸 오디오가 겹치지? 하고 있는데, 갑자기 부기장이 손사래를 치며 말했다.


"기장님, 이거 방송이에요! 이거 누르고 다시..."


관제사의 다급한 외침과 나의 멍청한 대꾸가 방송 마이크를 타고 그대로 객실까지 생중계된 것이다. 하지만 나중에 사무장이 말하길, 이 방송사고를 계기로 '왜 빨리 안 가?'라는 승객들의 짜증 여론이 ‘아, 조종실이 지금 바쁘고 힘들구나.’라는 동정 여론으로 급 반전하게 되었다고 했다. 오늘 사무장님이 조금 센스 있는 것 같다.


창피한 것은 일단 접어두고, 나는 이렇게 미끄러운 노면에서 가로막은 비행기를 아슬아슬 피해 갈 생각이 추호도 없었다. 한 방에 훅~! 갈 수 있다. 나는 관제사의 제안을 정중히 사양하고 점보기가 빠져나올 때까지 기다리겠다고 했다. 시간 여유가 있으니 중단했던 기내 방송도 마저 했다. '방송 사정이 고르지 못했던 점 사과드립니다'도 빠뜨리지 않았다.


약 15분이 지난 후, 드디어 점보 기를 끌던 터그 카(Tug-car) 바퀴가 '쑤-욱'하고 빠져나왔다. 사람들의 영차영차 소리가 마치 귀에 들리는 듯했다. 나와 부기장이 결승골이 터진 것처럼 손뼉을 치며 환호했다. 기다림의 짜증을 잊고 우리 일인 것처럼 기뻐하며  드디어 택시(Taxi: 비행기의 지상 활주)를 시작했다.

  

지정된 제빙, 방빙 작업장(Deicing Pad)으로 가기 위해, 관제탑은 유도로 A와 A5를 지나는 경로를 지시했다. 하지만 A까지는 잘 갔는데, A5를 찾을 수 없었다. 거기서 우회전해야 하는데, 이거 원. 아무것도 안 보인다. 표면의 유도로 선(차선 같은 것)은커녕, 유도로 윤곽 자체를 알아볼 수 없었다. 제설차가 지나간 자리에 계속 눈이 쌓이다 보니,  온통 하얀 눈밭이었다. 유도로 갓길에 있는 표시 등과 표시 봉은 모두 눈에 묻혀 보이지 않았고, 유도로 표지판만 여기저기 서로 딴 데를 바라보며 대똑하게 서 있었다. A5, A6 표지판은 찾았는데, 우회전해서 들어가려고 해도 어디가 도로고 어디가 풀밭인지 구별이 가지 않았다. 자세히 보니 ‘A5’라고 쓰여있는 표지판 앞 바닥에 비행기나 제설차가 지나간 바퀴 자국 같은 것이 보였다.


‘여긴가? 이 바퀴 자국을 따라가면 되나?’


바닥에 유도로 윤곽이나 안내선이 잘 보이지 않고 표지판만 우뚝 서 있는 모습


하지만 무턱대고 바퀴 자국을 따라갈 수는 없었다. 함부로 우회전했다가 도로가 아닌 풀밭으로 들어가면 어떡하나. 비행기를 멈추고 관제사에게 물어보기로 했다.


“저희 택시 웨이(Taxiway, 유도로) 구별이 잘 안 되는데, 여기서 돌면 A5 맞습니까?”  


"아... 네... 거기가 A5 맞는 것 같습니다."


'맞는 것 같습니다'라니. 눈이 이렇게 펑펑 내리는데 '같습니다'라니! 그분의 잘못은 절대 아니다. 코앞에서도 안 보이는걸 멀리 있는 관제탑에 물어본 기장이나, 쌍안경으로 보면서 자신 없게 대답하는 관제사나 서로 의지할 데 없긴 마찬가지였다(주: 이 당시 인천공항에는 지상 이동 감시 시설이 없었다.)

  

‘표지판은 진행할 때 기장석 쪽에(왼쪽) 보여야 하니 표지판을 지난 다음에 돌아야 하는 게 맞나? 복잡한 공항에서는 사인 위치가 꼭 그렇지도 않던데. 가만있어봐, 표지판이 어디 어디야?’


장기판에 말을 올려놓듯이 머릿속에 표지판들을 배치해 보았지만 IQ의 한계만 뼈저리게 느낄 뿐이었다. 결국 찝찝한 기분으로 그냥 좀 더 직진해서 가보기로 했다

 

‘지나쳐버리면 한 바퀴 돌아 다시 와도 되잖아. 이대로 직진하고 있으면 풀밭에는 안 들어갈 거 아니야.’


추력을 올려 조금 더 전진해보았다. 쌓인 눈 사이사이로 바닥에 차선이나 안내 글자가 보이는지 살피면서 아주 천천히 움직였다. 목을 쭉 빼고 바닥만 뚫어져라 쳐다보니 내 눈이 눈 속에 빠질 것 같았다(진심 웃기려고 한 말이 아님!).


“여기다! 빙고!”


하얀 눈밭 사이로 가로지르는 노란색 차선이 살짝 보였다. 한 1m~2m 정도? 거기가 바로 A5와 만나는 교차로였다.

 

A5를 돌아 드디어 방빙, 제빙 작업장에 도착했다. 이제 겨우 여기까지 왔다. 엔진 시동을 끄고 스프레이 작업을 시작했다. 대략 20분 만에 작업이 끝났고, 홀드 오버타임(Holdover Time: 방빙 용액의 효과가 지속되는 시간)을 카운트하기 시작했다. 우리 비행기는 활주로 33R을 지정받았다. 원래 착륙 전용 활주로지만, 세 개의 활주로가 돌아가면서 제설작업을 하고 있어서 오늘 같은 날에는 이, 착륙 전용 구별이 없다. 33R은 방금 제설 작업이 끝났다고 하니 그나마 활주로들 중에 노면 상태가 제일 좋을 것이다.

 

제빙, 방빙 작업


시동을 다시 걸고 활주로로 이동하고 있는데 앞선 비행기가 가다 말고 멈추었다. 나도 속도를 늦추었다. 그 비행기는 바퀴가 눈덩이에 걸려 잘 안 움직이는지, 엔진 출력을 자꾸 높이고 있었다. 요란한 엔진 소리와 함께 비행기가 부르르 떨면서 다시 움직이기 시작하자 눈발이 뒤로 크게 날려왔다. 충분히 거리를 두고 있어서 눈 벼락은 맞지 않았지만, 유리창에 눈 덩이 몇 개가 달라붙었다. 이거 눈싸움 거는 건가? 하지만 나도 그 지점을 지날 때 똑같이 바퀴가 걸려 움직이지 않았다. 뒤에 오는 비행기까지 신경 쓸 여유는 없었다. 출력을 높이자 비행기가 옆으로 빙그르르 미끄러지는가 싶더니 똑같이 온몸을 한 번 부르르 떨고 눈 구덩이를 헤쳐 나왔다.     

 

이제 드디어 활주로 코앞까지 왔다. 객실에 곧 이륙한다는 신호를 보내고 이륙 순서를 기다리고 있는데, 갑자기 인터폰 벨이 울렸다. 객실에서 걸어온 콜이었다. 생각하지 못한 갑작스러운 콜이라 불안해하며 부기장에게 인터폰을 받게 했다. 곧 스피커에서 발랄한 여자의 목소리가 들렸다.


“기장님! 날개 표면에 눈 없습니다. 상태 양호합니다!”


비행 전 브리핑할 때 날개 가까운 R3에 근무하는 승무원을 불러, 이륙할 때 날개 위에 눈이 쌓이면 바로 알려달라고 부탁한 기억이 났다. 눈이 쌓이지 않았으면 굳이 보고하지 않아도 되는데. 하지만 그녀의 불필요한 콜은 완벽한 순간 나를 흔들어 깨웠다. 심하게 집중하여 비행을 하다 보면 내 뒤에 누군가 있다는 사실을 잊기 쉽다.         


몇 시간 전 처음 만나 함께 브리핑하던 승무원들을 떠올렸다. 오늘 음료수 모자랄까 봐 발을 동동 구르며 일했을 것이다. 자신들도 불안할 텐데. 그 와중에 R3 승무원은 끝까지 내 부탁을 잊지 않았다. 오른쪽을 돌아보니 부기장이 이제야 여유를 찾은 것 같았다. 입사한 지 얼마 안 된 부기장인데 오늘 허둥지둥 실수도 많이 했다. 게이트에서 만난 승객들도 떠올랐다. 불안과 불만에 지쳐 이제는 '이게 무슨 인연인가' 하며 가까이 있는 사람들과 서로 의지하고 있을 것이다. 나도 수고가 많았다. 무슨 생각을 할 여유도 없이 지금 이 순간 이 자리까지 달려왔다. 주위를 돌아보니 출발선상에 서있는 것은 나 혼자가 아니었다. 승객, 승무원 모두 합쳐 302명. 그 와중에 만석이다!

 

‘비행기야, 이런 날 날게 해서 미안하다. 하지만 오늘 한 번 더 힘차게 날아다오. 우리 모두 너를 믿는다.’


드디어 관제탑에서 이륙 허가가 떨어졌고, 천천히 비행기를 움직여 활주로위에 올라섰다. 이륙을 시작한다. 계획대로 브레이크를 밟은 채 출력을 반쯤 올려 엔진 속에 눈을 털어낸다. 엔진 회전의 진동이 부드러워지자  브레이크에서 발을 떼고 출력 레버를 쭉 밀어 넣는다. 비행기가 미끄러운 바닥 위에서 조금 비틀어대더니 드디어 굉음을 내며 눈밭 위를 뛰어간다. 속도가 빨라질수록 눈을 더 가늘게 뜬다. 잠시 후 바람을 가르며 하얀 눈밭을 박차고 올라간다. 뒤뚱거리며 중심을 잡고 다리를 접어 자세를 유지하니 거센 눈보라가 나를 더 힘차게 들어 올린다!


고개를 돌려 아래를 보니 동화 속 풍경이 점점 멀어지고 있었다. 역시 아름다웠다. 하얀 세상이 너무 아름다웠다. 그 속에서 배고픈 새끼들을 위해 날아오르는 한 마리 파랑새. 그가 제일 아름다웠다. 하얀 동화 속 풍경은 주인공 파랑새의 배경일뿐이었다.


‘가자! 먹이 찾으러.’


감동도 잠시. 순식간에 비행기가 구름 속으로 빨려 들어갔다. "털썩, 털썩"하며 기체가 흔들리기 시작했고, 앞은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하얀 동화 속 세상이 좋을 때였나? 기체 흔들림이 심상치 않았다. 기상 레이더를 보니 주변에는 피할 곳 없이 스노 스톰(Snow Storm) 구름이 빽빽하게 차있었다. 좌석벨트 사인을 요란하게 울렸고, 승객 승무원 모두 안전벨트를 단단히 매라고 방송했다.  



"이거 피할 데도 없는데! 여기 이쪽이 제일 나아 보인다. 방위 150으로 요청해줘!"


나는 기상 레이다에 그나마 제일 안전해 보이는 쪽을 손으로 가리키며 부기장에게 말했다.


"인천 디파춰(Departure), KAL765편, 헤딩(heading) 150를 요청합니다!"


"KAL765편, 여기는 인천 디파춰. 레이다에 잡혔습니다. 헤딩(Heading) 150 허가합니다."    


비행기가 선회하기 시작했다. 아직도 눈발이 거세어 창문에 얼음이 달라붙기 시작했다. 날개에 얼음이 쌓였다는 경고등이 뜨자 얼른 안티 아이스(Wing Anti-ice) 스위치를 눌렀다. 경고는 사라졌지만 비행기는 계속 흔들리고 있었다. 눈의 양이 엄청난 만큼 구름도 두꺼웠고, 꽤 오랫동안 구름 속을 날았다. 속도를 낮춰 상승각을 더 높였다. 속도계는 춤을 추었고, 조종간을 쥔 손에는 땀이 나기 시작했다.


"높이... 좀 더 높이... 좀만 더! "


그때였다. 범고래가 수면 위를 박차고 뛰어오르듯 순식간에 비행기가 구름을 뚫고 나와 버렸다. 언제 그랬냐는 듯이 기류도 순식간에 온순한 양이되었다. 그리고 그 위에는 눈부신 태양과 새파란 하늘이 기다리고 있었다. 햇살은 거부할 수 없는 따듯함으로 우리를 감싸 안았고, 하늘은 눈부시도록 파랗게 빛나고 있었다.  



갑자기 쏟아진 햇살에 눈을 뜰 수 없었다. 무슨 말을 해야 할 것 같은데 나오지 않았다. 당연한 것인데 이상했다. 냉탕, 온탕, 극과 극의 체험 때문인가?


어둡던 세상 위에, 거센 눈보라 위에, 이렇게 따듯하고 눈부신 태양이 있었구나. 어머니 품처럼 포근한 햇살이 배고픈 어미 파랑새를 기다리고 있었구나. 나를 기다려주는 태양이 반드시 길을 비추어 주리라.


‘아... 나 미쳤나. 왜 눈물이 나려고 하지?’

 

Photo by Jairph on Unsplash


힘든 새해 첫 비행을 마치고 저녁 늦게 인천으로 돌아왔다. 인천에 착륙할 때는 활주로가 썰매장이 되어 있었다. 미끄러운 바닥에서 중심을 잃지 않으려 애쓰는 비행기가 안쓰러웠다. 게이트에 도착한 후, 밖에 나가 비행기를 만져보았다. 랜딩기어, 엔진, 동체, 그리고 까치발을 세워 손이 닿는 제일 높은 데까지 장갑을 벗고 토닥거리고 어루만졌다.


'아이고 내 새끼... 수고했어. 고마워.'


차가 막힐 것 같아 지하철을 탔다. 그래도 집에 도착하니 밤 11시가 넘었다. 오늘이 아들 생일인데 생일 파티를 망쳤다. 그래도 아들은 졸음을 참고 날 기다리고 있었다. 늦은 저녁을 먹으면서 아내에게 오늘의 무용담을 이야기했다. 처음에는 관심 있게 들어주었지만 점점 지루한가 보다. 집사람이 하품을 한다. 행복했다.



높이 날 수 있다면, 어두운 구름 위에 눈부신 태양을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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