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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신지수 Feb 28. 2022

조종사는 왜 정복(유니폼)을 입고 일해요?

[질문 있어요! #7] 잡다한 비행 이야기 일문다답

잡다한 비행이야기 일문다답 [질문 있어요! #1]

"......(할 말 없음)"


이 질문 천재다. 정말로, 내가 왜 유니폼을 입는 거지? 유니폼이란 것이 원래 적군-아군, 두목-부하 구분하기 위해 입는 옷 아닌가? 전쟁하는 것도 축구하는 것도 아닌데. 그리고 옷에 아무런 기능도 없잖아. 비행기 타는데 왜 선장 복장이지? 혹시 코스프레?


"유니폼을 입는 제일 큰 목적은 식별하기 위한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승무원들이 서로서로 쉽게 알아볼 수 있어야 비상 상황에서 조직적으로 대처할 수 있고, 승객들도 승무원을 신뢰하고 따를 수 있을 것입니다. 조종사 유니폼에 대해 좀 더 이야기해볼까요?"


일단 뻔한 대답부터 해놓고 보자. 그런데 기능성 일도 없는 이런 유니폼을 전통이라는 이유로 입어야 하는 이유를 딱히 모르겠다. 군인이나 경찰, 소방관이면 시민을 위해 봉사한다는 프라이드라도 있지. 우리 같은 회사원이 왜? 요새는 은행도, 코스트코도 모두 유니폼 안 입는데. 우리 회사 과장 부장 모두 꽃분홍 유니폼에 스마일 계급장 달아주고 싶다.


불평 그만하고 이야기 시작. 큐.




민간 항공 운송이 처음 시작된 것은 1차 세계대전 이후이다. 처음에는 우편물 등을 실어 나르는 화물 운송으로 시작했는데, 조종사들은 딱히 복장에 신경 쓰지 않았다. 이들 대부분은 기능성 좋고 따듯한 공군 조종사 복장을 따라 입기 시작했는데, 가죽 봄버 재킷(Leather Bomber Jacket)과 카키 바지, 그리고 두꺼운 가죽 부츠가 민항 조종사 유니폼의 시초가 되었다. 장시간 고공을 날아가는 비행기에서는 추위를 이기기 위한 따듯한 복장이 필수였는데, 우리가 흔히 무스탕이라고 부르는 양털 재킷도 봄버 재킷의 일종이다. 어떤 조종사는 가죽으로 만든 장교용 트렌치코트를 입기도 했다. 봄버 재킷이나 트렌치코트는 바람을 막아주고 따듯했으며, 커다랗고 네모난 주머니가 달려있어 지도 등을 넣기 좋았다. 카키 팬츠는 튼튼한 군복 재질로 넓고 편하게 만들어졌다. 부츠도 발목까지 올라오는 두꺼운 가죽으로 만들어 춥고 거친 환경에 적합했다. 1차 대전 당시 전투기에는 캐노피가 없어서 전투기 조종사들은 두꺼운 오페라 스카프를 둘렀는데, 바람과 추위를 견디기 위한 것도 있었지만, 사실은 적기를 찾기 위해 전방위로 목을 많이 돌려야 하기 때문에 목 주위에 상처가 생기지 않도록 보호하는 목적도 있었다고 한다. "빨간 마후라"의 "마후라"는 일본군이 사용하던 말로써 스카프를 뜻하지만, 마후라(マフラー), 즉 머플러(Muffler)는 전혀 다른 뜻을 가진 단어이며 일본 군이 왜 이렇게 불렀는지 정확한 유래를 알 수 없다. "빨간 스카프"가 올바른 말이다.


WW2 영국 공군(RAF) 조종사 복장


화물 전문 항공사인 UPS나 FEDEX 조종사들은 지금도 항공재킷을 자주 입고 다닌다. 하지만 여객기 조종사들은 하나같이 해군 장교 정복 같은 유니폼을 입는다. 여객선 승무원이 해군 유니폼을 입는 것은 어느 정도 이해할 수 있지만, 어쩌다가 비행기에도 이런 전통이 생긴 것일까? 그것은 바로, 항공사의 선구자였던 미국의 팬암항공(Pan American World Airline)에 해답이 있다. 20년대 후반부터 플로리다 키웨스트에서 우편 배달로 성공을 거둔 팬암항공은 1931년 남미와 카리브 지역을 왕복하는 국제 여객 운송을 시작했다. 이때 처음으로 팬암항공은 항공기 등록번호 대신 '클리퍼'라는 애칭을 콜사인(Call-sign)으로 사용했다. 팬암이 운항한 시코르스키(Sikorsky) P-38, P-40 항공기가 수상에 이착륙하는 비행정(Flying Boat)이었기 때문이다. '클리퍼(Clipper)'는 원래 19세기 후반의 작고 빠른 쾌속선을 의미하는데, 이때부터 비행정을 대표하는 단어처럼 쓰였다. 이후에도 '클리퍼'는 팬암항공을 상징하는 별명이 되어 1991년 파산할 때까지 줄곳 콜사인으로 사용되었다. 팬암항공은 1937년 태평양 횡단과 대서양 횡단 노선을 각각 개척하고, 하와이와 유럽에 클리퍼 비행정을 띄우기 시작했다. 1939년에는 더욱 커진 보잉 B-314 클리퍼를 도입하여 일등석까지 갖춘 미국-영국 간 정기 여객 노선을 출범하였다. 드디어 본격적으로 여객기가 대양을 횡단하는 시대를 연 것이다.


Boeing 314 (Image by Axel Knoetig from Pixabay)


팬암 항공은 이때 처음으로 조종사들에게 해군 장교처럼 보이는 제복을 입게 했다.  당시 사람들에게 대서양 횡단 비행이란 빠르지만 위험해 보이는 것이었다. 부자들이 기꺼이 지갑을 열어 항공권을 사도록 유혹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그들을 안심시켜야 했다. 팬암항공은 조종사들에게 기능성 좋은 조종사 복장을 버리고 대신 댄디한 해군 장교 제복을 입게 하였다. 승객들이 마치 배를 타고(특히 군함을 타고) 여행하는 것처럼 느끼게 하고 싶었던 것이다. 불안한 신기술인 '비행' 전통 있고 신뢰를 주는 '항해' 비유한 일종의 이미지 마케팅이었다. 결과는  성공이었고 모든 항공사들이 팬암을 따라 승무원들에게 해군 제복을 입히기 시작했다.


팬암의 조종사 제복은 검은색 더블 블레이저 재킷(Double-breasted Blazer Jacket)과 검은 정장 바지, 흰색 셔츠와 검은 넥타이, 그리고 탑(Top)이 하얀 장교 모자였다. 정말로 미 해군 장교와 똑같았다. 항공사에 따라 네이비 색 제복이나 모자를 선택하기도 했지만, 이 색상도 - 이름에서 보면 알 수 있듯이- 미국 해군사관학교 제복에서 유래한 색이다. 80년대에 이르러서는 조금씩 변화가 생겨서 싱글 버튼 재킷을 입는다거나, 화려하고 다양한 넥타이를 맨다거나, 모자를 쓰지 않는 항공사도 생겼다. 하지만 지금까지도 기본적인 전통은 크게 변하지 않았다.


유니폼에는 여러 가지 휘장(Insignia)을 장식하는데, 이것도 해군과 거의 비슷하다. 가슴에 다는 흉장은 주로 군인의 주특기와 자격을 표시하는데, 미국 공군과 해군 조종사의 날개 모양 흉장을 흉내 내어 달았다. 양 날개 가운데 있는 부대마크 대신 회사 로고를 넣었고, 자격을 갖춘 조종사에게는 로고 위에 작은 별을 달아주었다. 특히 지휘 조종사(Pilot in command), 즉 기장에게는 별 주위에 월계수도 장식해주었다. 모자 앞면 가운데에도 흉장과 비슷한 휘장을 붙였다. 파일럿 인 커맨드(Pilot-in-command)를 상징하는 월계수는 모자에도 적용되어, 자세히 보면 기장 모자챙에만 월계수가 장식되어있다. - 그러나 어떤 회사 유니폼은 흉장도 모자도 기장, 부기장의 구분이 없다. 평등인가? 원가 절감인가? 어느 회사라고 말 못 한다. -



계급과 계급장도 해군의 것을 그대로 가져왔다. 재킷 소매에 장식하는 수장은 금색이나 은색 실을 꼬아 만든 줄을 달았고, 셔츠 어깨에 같은 재질의 줄로 장식한 견장을 달았다. 조종사(Pilot)를 해군의 함장처럼 캡틴(Captain, 해군 대령)이라고 부르며 네 줄을 달게 했고, 부조종사(Co-pilot)는 함장 다음 계급의 의미로 퍼스트 오피서(First Officer)라 부르며, 해군의 커맨더(Commander, 해군 중령급)와 같이 세줄을 달게 했다. 조종사가 아닌 ACM(Additional Crew Member)이라고 불리는 승무원들 -항공 기관사, 항법사, 통신사 등을 말한다- 에게는 해군의 루테넌트 커맨더(Lieutenant Commander, 해군 소령급)처럼 두꺼운 줄 두 개 사이에 얇은 줄을 하나 더 넣거나, 그냥 루테넌트(Lieutenant, 해군 대위급)처럼 두줄을 달게 했다.


이런 엉뚱한 배경으로 지금의 전통이 시작되었다. 하지만 운송용 비행기의 발전 과정을 보면 납득이 가는 부분이 있다. 기술의 발전으로 비행기는 더 긴 시간동안 더 많은 승객을 수송할 수 있게 되었고, 기내 환경은 점점 따듯하고 쾌적해졌다. 척박한 환경에 어울리는 오리지널 조종사 유니폼보다 댄디하고 믿음직해 보이는 지금의 해군 장교 유니폼이 더 설득력 있어 보이는 것을 부정할 수 없다.




항해와 비행은 유사한 점이 많다. 그래서 유니폼도 해군의 전통을 따랐을 것이라고 막연이 생각했었는데 알고 보니 그것과 별로 상관이 없었다. 하지만 유래야 어떻든 조종사가 장교 제복을 입는 것이 긍정적인 효과가 있는 것 같다. 조종사의 입장에서 보면, 비록 장사(Commercial)지만 어쨌든 사람들의 안전을 위해 봉사(Service)한다는 책임감이 생길 수 있고, 전문가의 자격과 경력을 표시할 수 있으니 승객들이 보면 좀 더 신뢰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아쉬운 부분은, 전통이라는 것이 알고 보면 꼭 명예롭지만은 않다는 것이다. '승리'와 '성공'이 전통을 만드나 보다. 90년 전 팬암 항공의 성공이 전통이 되었고, 공군 조종사가 해군 장교로 둔갑하는 것이 자연스러워졌다. 심지어 이제는 대형 버스, 모범택시까지 장교의 모습은 모든 운송 산업에 널리 퍼졌다. 기왕 이렇게 된 것, 나도 사관과 신사(An officer and a gentleman)처럼 당당함과 품격을 갖추도록 노력하면 좋지 않겠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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