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신지수 May 29. 2022

비행기가 출발할 때 승무원이 지각하면?

[질문 있어요 #15} 잡다한 비행 이야기 일문다답


아 이건 정말 궁금할 것 같다. 운전기사가 없으면 걸어가든가 지하철이나 버스를 타면 되지만 비행기는 어쩌나? 그런데 반전은 없다. 그냥 조종할 조종사가 없으면 비행기가 못 뜨는 거다. 방법이 없다. 조종사가 올 때까지 비행기를 지연시켜서 출발하거나, 비행 편을 취소시켜야 한다. 반면, 객실 승무원은 어떻게든 법적 요건을 갖춘 최소 인원만 충족되면 출발은 할 수 있다. 승객 좌석 50석 당 최소 한 명이 필요하므로, 300석 항공기의 경우 승무원이 6명만 있으면 출발할 수 있다. 그 비행기에 객실 승무원 8명이 배치되었다면, 그중 2명은 빠져도 법적으로 문제가 없다는 뜻이다. 대신 객실 서비스에 구멍이 생기는 것과 나머지 승무원들의 불만을 감수해야 한다.  


항공사가 이런 리스크를 무방비 상태로 두면 비행 지연과 캔슬이 비일비재할 것이다. 다른 직장과 마찬가지로 항공사도 갑작스러운 일들이 언제나 생긴다. 몸이 아프거나, 사고가 나거나, 집안에 급한일이 생기거나, 출근 날짜와 시간을 헷갈리거나, 늦잠을 잔다거나 등등. 비행 전날 연인과 헤어져 홧김에 회사고 뭐고 뵈는 거 없이 술을 퍼마셨을 수도 있다. 음주 비행하면 큰일 난다.  



그래서 항공사는 리저브(Reserve)와 스탠드바이(Stand-by) 제도를 운영한다. 원래 배정된 승무원이 비행을 할 수 없게 되면 대신 다른 승무원을 투입할 수 있도록 대기시키는 것이다. 항공사에는 전문 승무원 스케줄러가 있어서 자격, 근무, 휴식에 대한 법적 요건을 충족하는 범위에서 가장 효율적으로 승무원의 스케줄을 운영한다. 물론 승무원이 출근하지 않거나 지각하는 상황에도 대응한다.  


승무원들의 스케줄을 보면, 비행일, 휴일 외에 '리저브(Reserve)'와 '스탠드바이(Stand-by)'라는 것이 각각 한 달에 며칠씩 찍혀있다. 좀 더 이해하기 쉽게 스케줄러의 관점에서 설명하자면, '리저브'는 출발 12시간 이전에 승무원을 바꿀 수 있는 카드이다(시간에 대한 규정은 회사마다 다를 수 있다. 외국에는 24시간을 적용하는 경우도 있다). 예를 들어, 20시간 후 LA로 가는 비행기의 아무개 기장이 요가를 하다 햄스트링이 파열되었다고 치자. 스케줄러는 그날 '리저브'로 찍힌 기장들의 리스트 중에서 한 명을 골라 대신 비행에 투입할 수 있다. 승무원이 모자라는 성수기라면 리스트는 빈약할 것이고, 승무원이 남는 비수기라면 리스트는 풍족할 것이다. 요가에 진심이던 아무개 기장은 앞으로도 몇 주간 비행을 못할 것으로 보여 이번 달 남은 스케줄 모두 대타를 투입해야 한다. 이렇게 여러개의 스케줄을 변경하면 모든 기장들 스케줄을 흔들어 전체적으로 다시 손봐야 할 수도 있다.



그러나 '리저브'가 꼭 12시간 이전에만 사용할 수 있는 카드는 아니다. 12시간 이내라도 당사자가 오케이, 동의하면 투입할 수 있다. 예를 들어 10시간 후에 광저우로 출발하는 비행편의 모 객실 승무원이 조기 축구를 하다 눈에 공을 맞아 판다가 되었다고 치자. 12시간 이내이지만 스케줄러는 그날 '리저브'로 찍힌 승무원들에게 차례로 전화를 돌려 대신 비행 갈 수 있는지 알아볼 것이다. 그런데 하필 그 비행 편이 매우 매우 인기 없는 노선이라 선뜻 나서는 사람이 없다. 누구는 이미 술을 마셔서 갈 수 없다고 했고, 누구는 남편 생일이라 갈 수가 없다고 했다. 하지만 스케줄러는 진짜냐고 추궁해서 물어볼 수 없다. 다행히 한 승무원이 기꺼이 가겠다고 해주어 해결되었다. 스케줄러는 이 고마운 승무원에게 좋은 비행 스케줄이 나오면 꼭 넣어주리라 다짐하며 포스트잇에 이름을 적고 하트를 그려 넣었다.


만약 리저스 승무원 중 아무도 응해주지 않으면 스케줄러는 결국 스탠드바이 카드를 꺼내야 한다. '스탠드바이'는 스케줄러가 부르면 곧장 공항으로 달려가야 하는 '대기' 임무이다. 스탠드바이로 지정된 날짜에 몇 시부터 몇 시까지(보통 12시간)라고 시간이 찍혀 나오는데, 그 시간 동안에는 언제든 비행할 수 있는 상태로 대기해야 한다. 스탠드바이에는 보통 두 가지가 있는데, 홈 스탠드바이(Home-Standby)와 공항 스탠드바이(Airport-Standby)가 있다. 이게 뭔지는 이름만 보고 알 수 있을 것이다. 홈 스탠드바이는 집에서 대기하는 것인데, 옛날 휴대전화가 없던 라떼에는 아예 집 밖에 나갈 수 없었다. 행여나 전화를 받지 못하면 규정 위반이 되기 때문이다. 이제는 휴대폰만 받으면 집에서 가까운 곳 정도는 나가도 괜찮다.  


공항 스탠드바이는 유니폼 입고, 여권, 서류, 체류 가방까지 챙겨서 공항 사무실에 대기하는 것이다. 항공사가 호텔을 제공할 경우, 공항에서 가까운 호텔에서 대기할 수도 있다. 승무원이 출근 중 사고가 나거나, 출근 시간에 나타나지 않고 연락이 두절되거나, 출근했는데 여권을 안 가지고 온 경우 등등 주로 비정상 상황에 대응하기 때문에 어떤 항공사는 이것을 비상 스탠드바이(Emergency Standby)라고도 부른다. 그런데 모든 항공사가 공항 스탠드바이를 운영하지는 않는다. 출발 시간에 임박해서 급히 승무원을 변경해야 하는 경우, 홈 스탠드바이만 운영해도 비행기는 2~3시간 지연 후 출발할 수 있기 때문이다. 대신 홈 스탠드바이는 모든 항공사가 운영한다. 그런데 만약 집이 공항에서 너무 멀면 어쩌나? 인천 공항이 홈베이스인데 집이 제주라면? 아무리 집이 멀어도 예외는 없다. 스탠드바이도 비행 근무나 마찬가지로 임무(duty)이기 때문이다. 대신 그런 승무원은 미리 서울로 올라와 한두시간안에 공항에 갈 수 있는 곳에 머무르며 대기해야 한다.



비행 스케줄에 따라 불규칙하게 출근을 하다 보니, 승무원들은 누구나 조금씩 강박증을 갖고 있다. 혹시나 쇼업(Show-up) 시간을 잘못 알고 있는 것은 아닌지 스케줄 캘린더를 몇 번이고 확인한다. 나는 20년 넘게 비행하면서 딱 한번 지각을 한 적이 있는데, 좀 어이없다. 오래전 화물 전용기를 탈 때였는데, 화물기 스케줄이 항상 밤 10시, 11시에 출발하다 보니, 스케줄 캘린더에 11:30이라고 찍힌 출발 시간이 당연히 밤 11시 30분이라고 굳게 믿고 있었다. 진짜 밤 11시 30분 출발이었다면, 캘린더에는 23:30으로 찍혀 있어야 했다. 그날 오전 9시쯤 한가하게 아침을 먹고 있을 때 스케줄러가 전화를 했다.


"기장님 지금 어디세요?"


"집인데요."


"비행 안 나가고 뭐하세요?"


"오늘 밤 비행인데 벌써....? 헐.......!!"


"지금 빨리 나오세요. 비행기가 지연되지 않으면 큰 처벌은 없을 거예요."


공항 쇼업(출근) 시간이 09:50AM인데, 노련한 스케줄러가 띨띨한 나를 못 믿어서 출근 한 시간 전에 미리 전화를 해준 것이다. 나는 정신없이 택시를 타고 공항으로 갔다. 같이 가는 승무원들에게 차례로 전화를 걸어 곧 따라갈 테니 미안하지만 먼저 비행기에 가 있으라고 했다. 그중 외국인 기장이 웃으면서 나를 놀렸다. 그냥 문 닫고 먼저 갈 테니 천천히 오라고. 결국 쇼업 시간에는 지각을 했지만 곧장 비행기로 달려가 출발은 지연되지 않았다.


사람들이 일하다 보니 이런 일은 언제든 일어난다. 그런데, 승무원이 지각해서 비행기가 지연되면 승객들의 분노는 얼마나 크겠나? 아마 훨씬 클 것이다. 승객이 늦으면 절대 기다리는 법이 없으면서, 승무원이 늦으면 기다려야 하는 이 더러운 세상! 그 마음 이해한다. 그래서 승무원이 지각하면 처벌도 매우 크다. 노여워 마시길.



그런데 제시간에 출근을 했음에도 불구하고 승무원을 바꿔야 하는 경우가 있다! 여권, 면허증, 배지(Badge) 등을 안 가져온 경우. 아마 대부분의 승무원들은 공항에 여권을 안 가져온 꿈을 한 번씩은 꿔본 적이 있을 것이다. 이게 상당히 악몽이다. 배지는 회사 ID카드나 승무원 등록증을 말하는데, ID카드는 급히 재직 증명서를 발급해서, 그리고 승무원 등록증은 여권으로 대신할 수 있다. 그러나 여권과 조종사 면허증, 신체 검사증은 무엇으로도 대신 증명할 수 없다.  


사실, 여권은 항상 비행 가방에 넣어두기 때문에 잊어버릴 일이 없다. 가방 속 같은 위치에 두고 있다가 사용할 때만 잠깐 꺼내고 바로 집어넣기 때문에 안전하다. 하지만 휴가로 해외여행을 다녀왔을 때, 여권을 새로 갱신했을 때, 어딘가에 여권 사본을 제출하기 위해 복사를 했을 때 등등이 매우 위험한 순간이며 사건의 단초가 된다. 혹시 여권 포비아에 시달려 출근하기 전에 열 번 이상 여권이 있는지 확인한다거나, 아예 전날부터 여권을 목에 걸고 잠자는 승무원이 있다면 빨리 공항 앞으로 이사 갈 것을 추천한다. 잊고 출근해도 얼른 집에가서 다시 가져올 수 있으니 정신 건강에 큰 도움이 될 것이다.


중국 항공사에서 일하던 시절, 중국인 승무원이 여권을 안 가져와서 비행기가 지연되는 사례를 몇 번 본 적이 있다. 중국인은 해외여행을 다닐 때 각 나라별로 출입국 서류와 절차가 우리나라 사람들보다 더 복잡하다. 그래서인지 중국인 승무원들은 보통 한 사람이 여권을 두세 개씩이나 갖고 있다. 가는 나라에 따라 다른 여권을 갖고 가야 하는 것 같다. 각각 다른 여권번호를 갖고 있기 때문에 서로 바꿔 사용할 수도 없다. 승무원들이 출근하면 제일 먼저 승무원 리스트에 적힌 여권 번호부터 진지하게 확인하는 것을 보니, 엉뚱한 여권을 갖고 와서 애를 먹은 경험들이 꽤 있었나 보다.


또한, 보안이 엄격한 중국에서는 승무원 배지를 매우 엄중하게 다룬다. 배지가 없으면 공항 안에도, 비행기 근처에도 갈 수 없다. 중국 민항총국에서 직접 홀로그램과 칩을 넣은 배지를 발급하고 철저하게 관리하다 보니, 만약 잊어버리기라도 하면 벌금도 내고 집에 가서 두세 달 푹 쉬어야 한다.


SF 영화들을 보면, 피부속에 칩을 넣거나 몸에 바코드를 새기고, 안면 인식으로 한 번에 개인 정보를 탈탈 터는 것을 보고 인간성을 잃어가는 미래상을 걱정한다. 그런데 솔직히 그런 세상이 조금 부러울 때도 있다.   



매거진의 이전글 태평양 한 가운데에서 비행기가 고장나면? part 2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