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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신지수 Feb 11. 2022

조종사도 비행하다 겁날 때가 있나요?

[질문 있어요! #5] 잡다한 비행 이야기 일문다답


"비행 중 겁날 때라면... 있지. 막 이륙하려고 하는데 오늘이 결혼기념일이란 사실을 알았을 때. 공항에 도착했는데 여권을 안 가져온 걸 알았을 때. 부기장의 경우는, 무서운 기장님이 오늘따라 컨디션 안 좋을 때. 등등."


...이라고 대답하면 정답이 아니겠지. 하지만 공감하는 조종사들 있을 거다. 다시 한번 도전.


"조종사가 겁날 때라고 하면, 비행기에 결함이 생기거나 기상이 안 좋을 때, 비상상황이 되었을 때라고 상상할 수 있습니다. 물론 긴장이 되지요. 하지만 저의 경우, 단순히 이런 상황만으로 겁이 나지는 않습니다. 비행 중 겁나는 경험은 저도 몇 번 겪어본 적이 있는데, 모두 '오늘 이상해. 오늘이 그날인가?'라는 의심이 생길 때였습니다."


징크스나 미신을 믿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끔찍한 사고를 보면 항상 머피의 법칙이 성립한다. 논리적으로 설명할 수 없는 불운의 사슬 같은 것 말이다. 피구를 할 때 요리조리 공을 잘 피하는 사람도 언젠가는 날아오는 공을 피하지 못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한다. 아무리 잘 피해도 같은 편 친구들이 하나 둘 쓰러지면서 나에게 포화가 집중될 것 같은 두려움. 갑자기 생각지 못한 곳에서 공이 날아올 것 같은 불확실성. 나는 비행할 때, 백 번에 한 번 일어날까 말까 한 상황이 연속적으로 일어날 때 무엇보다 겁이 난다. 통계적으로는 설명이 안 되지만 진짜 일어난다. 실제 경험을 한 예로 이야기해보겠다. 큐.




모스크바에서 서울로 돌아오는 비행 편. 중국 영공에 들어오자마자 관제사가 고도를 강하하라고 지시했다. 항로에 교통량이 많아 원하는 고도를 배정해 줄 수 없다는 것이다. 한 2,000~4,000 피트 내려가라고 할 줄 알았는데 무려 14,000피트나 내려가라고 했다. 중국 영공에서 계획된 고도보다 낮게 가는 것은 흔한 일이지만, 이 정도로 낮게 가는 것은 처음이었다. 낮은 고도로 비행하면 공기의 저항이 강해져 연료 소모가 커진다. 나는 연료를 계산해 보았다. 다행히 착륙할 때 필요한 최소 연료량은 충족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아 젠장. 인천공항에 내리면 8,000 파운드밖에 안 남겠다. 계획보다 6,000 파운드나 더 쓰는 거네. 인천공항 날씨가 좋아서 다행이다."


그나마 날씨가 좋아 회항할 필요가 없으니 예비 연료를 추가로 쓸 수 있었다.


드디어 대한민국 공역에 진입했다. 인천공항 접근 관제사가 말했다.


"XXX 편, 착륙 순서 24번째입니다. 홀딩(Holding, 체공비행. 공중에서 빙빙 돌면서 대기하는 것) 예상하십시오."


헐. 하필이면 오늘 인천공항이 이렇게 붐비다니. 맑은 날씨에 '24'번째라는 숫자도 처음 들었다. 하필 그 시간에 34번 활주로가 잠시 작업을 위해 폐쇄되었기 때문이다. 착륙은 오직 33R번 하나만 사용하고 있었다.  24대의 비행기가 2분에 한 대씩 착륙하면 나는 48분 후에 착륙한다. 18분이면 갈 수 있는 거리인데. 20분이 더 걸리면 연료를 4,000 파운드 정도 더 써야 한다.


"저희 비행기 연료가 모자랍니다. 순번을 조금 앞으로 당겨주십시오."


"지금 비상 연료 상황입니까? 비상을 선포하는 거예요?"


"아, 아닙니다. 아직은 아니지만 이대로 순번을 지키면 비상 연료량이 될 가능성도 있습니다."


"비상 선포를 하지 않으면 우선권을 드릴 수 없습니다. 비상 연료 상황이 되면 말하세요."


지금은 규정이 좀 바뀌었지만, 그 당시는 비상을 선포하는 최소 연료량 기준이 약 4,000 파운드(A330, 착륙 후 잔량 기준) 정도였다. 이대로 순서를 지켜서 착륙하면 딱 그 정도 연료가 남을 것 같았다. 하지만 바늘로 찔러도 피 한 방울 안 나올 것 같았던 관제사도 알고 보니 우리 사정을 걱정하고 있었다. 순서가 한 12번째쯤 되었을 때 말해 주었다.


"XXX 편, 순서 7번째입니다. 연료 상황은 어떻습니까?"


시간을 10분이나 줄여 주었다. 나는 계기 앞에 대고 절을 하면서 대답했다.


"고맙습니다! 연료 상황은 괜찮습니다. 고맙습니다!"


드디어 착륙 순서가 되었다. 이대로 착륙하면 6,000 파운드가 조금 넘게 남아 최소 연료량을 충분히 넘길 수 있었다. 33R 활주로에 착륙 허가가 내려졌고 이제 아무 문제도 없어 보였다. 바로 그때!


"인천타워, OOO 편입니다. 비행기 스티어링이 고장 났습니다. 활주로를 빠져나갈 수 없습니다. 견인차를 불러야 할 것 같습니다."


눈앞에 훤히 보이는 활주로 한가운데에 비행기가 꿈쩍않고 버티고 있었다. 바로 앞 순서로 착륙한 비행기가 노즈 랜딩기어의 조향장치에 고장이 나서 활주로를 빠져나가지 못하는 것이었다. 인천 공항 관제탑도 긴장했는지 순간 말이 없었다. 곧이어 탑장으로 보이는 다른 관제사의 목소리가 들렸다.


"XXX 편, 고 어라운드 하세요(Go-around, 착륙을 포기하고 다시 상승하여 것)!"


"안됩니다! 33L로 사이드 스텝 착륙을 요청합니다(Side-step landing, 접근 중에 활주로를 변경하여 가까운 다른 활주로에 착륙하는 것)!"


하지만 이륙 전용으로 쓰고 있는 33L 번 활주로에는 이미 다른 비행기가 이륙하려고 들어오고 있었다. 잠시 뜸을 들이더니 관제사가 다시 한번 소리쳤다.


"XXX 편 고 어라운드!!"


결국 파워를 넣고 고 어라운드를 했다. 풀파워를 사용하니 연료량이 뚝뚝 떨어졌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짜증 내고 농담도 했지만 갑자기 마음속에 냉기가 돌았다. 어떻게 이럴 수가 있지? 나만 고 어라운드를 하고 내 뒤에 비행기들은 활주로를 바꾸어 33L에 차례로 착륙했다. 이것은 징조인가? 덜컥 겁이 났다. 하필 비 정상적으로 낮은 고도를 배정받았고, 연료는 엄청 소모했는데 하필 인천공항은 활주로 공사로 비행기가 붐볐으며, 관제사에게 빌어서 순서를 당긴 것이 하필 고장 나서 퍼져버릴 비행기 바로 뒤였다. 불운의 연속이 한 방향을 향하고 있었다. 이다음에는 또 무슨 일이 닥칠 것인가? 오늘이 바로 '그날'인가?


"땡!"


조종실 경고음이 나를 깨웠다. 탱크에 연료량이 적다는 경고였다. 자동차 연료 경고등 처럼 말이다. 그 순간 내 영혼 속 감정의 파도가 싹 사라졌다. 불평과 한탄은 두려움에서 나를 구해주지 못한다. 의도한 것도, 훈련된 것도 아닌데, 머리가 맑아지고 시야가 넓어져 마치 AI 로봇이 된 것 같았다. 연료 잔량을 다시 계산하니 이제부터 정상 경로를 따라 다시 착륙하면 2,400 파운드밖에 남지 않는다. 때마침 관제사가 나를 불렀고 침착하게 대답했다.


"XXX 편, 지금 연료량이 얼마입니까?"


"지금 5,500 파운드 정도입니다. 표준 항로를 따라 다시 접근을 시작하면 비상 연료가  것으로 예상합니다."


", 알겠습니다. 1,400 피트로 강하하세요.  컷으로 유도하겠습니다.(Short-cut approach, 표준 접근 항로가 아닌 지름길로 활주로에 접근하는 )."


아무리 날씨가 나빠도, 비행기가 고장 나도, 나는 어떻게 대처할  안다. 모든 것을 통제할  있다고 확신을 가지고 는데, 이런 황당한 상황이 벌어지 정말로 거역할  없는 운명이란 것이 있나?라는 질문이 긴다. 의문을 풀어줄 방법은 딱히 . 그냥 맞설 수밖에. 날아오는 피구공을 하나 피하고,  피하고,  피했으니 그다음은? 포기하지 않고  피할 수밖에.  다른 공이 날아왔을  내가 포기할까  두렵. 언젠가는 피할 수 없을거라는 생각이 들까봐 두렵다. 그런데 조종사라는 직업은 포기하고 싶어도 포기할  없다. 때로는 포기할  있는 권리도 있으면 좋을 텐데. 그런 면에서  직업  별로다.


다행히 관제사는   분만에 착륙할  있도록 안내해 주었고, 안전하게 착륙했다. 연료5000 파운드가 조금 모자라게 남았다.


더 이상의 우연한(아니, 우연하게 보이는 것일 수도 있겠다) 불운은 없었다. 지나고 보면 내가 겪은 비행 경험 중에 그리 위험한 순간도 아니었다. 하지만 순간적으로 밀려온 검은 연기 같은 예감은 나를 바짝 쫄게 만들었다. 하지만 다행인 것은, 그 순간 감정을 지우고 다음에 날아올 공을 피하려고 자세를 취할 수 있었다는 것이다.




통계적으로 설명할 수 없는 이상한 일은 아주 가끔 일어난다. 25년 비행을 하면서 5번 정도 있었다. 5번이나 겪었으면 이제 자신감을 가질 수도 있지 않을까? 그렇지 않다. 지금도 출근할 때 유니폼 단추라도 떨어지면 바짝 긴장한다. 이런 것은 자신감으로 해결할 문제는 아닌 것 같다. 대신 성수, 십자가, 부적, 오마모리 등 모든 종교를 망라한 성물을 갖고 다닌다.

  

photo: Mateusz Klein by pixaba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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