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며느리이기전에 나이고 싶다.
순간적인 감정에 치우쳐 글을 쓰고 싶지 않았다. 그래서 이 글을 쓰는데까지 참 오래 걸렸다. 여전히 이 글에는 여전히 해소되지 않은 불편한 감정이 가시처럼 걸려있을지 모르겠다. 시간이 조금 더 지나면 언젠가 이 나의 날선 감정도 무뎌질거라 믿는다. 나는 지금 예민보스 예비신부니까.
처음에 "시월드에 대한 로망"에 대한 글을 썼을때 말했었다. 시부모님을 우리 친정 부모님처럼 사랑하고 싶다고. 진심이었다. 나는 진정으로 어머님 아버님을 내 진짜 엄마아빠로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잇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그 선언에는 조건이 있다는걸 깨달았다. "내가 진짜 딸로 받아들여진다면" 말이다.
엄석대 같은 딸.
사려깊지만 잘 토라지고, 명령듣는 것을 싫어하며, 예민한 내가 누군가의 가족의 "막내"로 들어간다는 것은 생각보다 녹록치 않은 일이었다. 나는 늘 즐거운 표정을 지어야했으며, 웃기지 않은 농담에도 깜빡 웃는 표정을 짓고, 체력은 누구보다 막강해서 늦게자고 일찍일어나야 하는 역할이었다. 그리고 그 역할을 당연하게 생각하는 것 같은 시댁 분위기 (feat.남자친구)가 미웠다. 사실 내 몸을 조금 움직인다고 닳는것도 아니고 어른들이 움직여 내 마음이 불편한 것보다, 내가 조금 부지런히 움직이는 것 자체가 싫은 것이 아니다. 내가 속상한 것은 "내 자신이 될 수 없는" 이 상황이 싫은 것이다. 우리 집에서는 몸이 조금 지치면, 나 조금 쉬었다 한다고 벌렁 드러누울수도 있지 않는가.
착한(예비)며느리 증후군은 시어머니의 다소 파격적인 말에 말대꾸를 꾹 삼켜버리는 아주 병적인 증상이다. 아들 자랑이 한창이신 어머님이 조금 과하다 싶을 때, 한번쯤 '어머님 칭찬이 너무 과하시네요. 호호' 할 수 있음에도 입을 꾹 다물어 버렸다. 여자는 화려하게 꾸며야 한다며, 우리 교회에 올땐 머리를 이렇게 저렇게 하고 오라는 micro-manage에서도 하하하 넉살좋게 웃어 넘겼다. 다시 한번 말하지만 나는 예민보스 예비신부인데 말이다. 그리고 내가 더 속상햇던 이유는 우리 엄마와 함께 한 자리에서 이 모든 대화가 이뤄졌다는 것이다. 엄마 앞에서는 늘 당차고 내가 원하는 바를 확실하게 이야기했던 딸인데, 한 집의 며느리가 되어 이렇게 착한 며느리 병을 앓고 있는 나를 보여주는 것에 마음이 쓰렸다.
시어머님의 말씀에 마음에 생채기가 날때마다 앙갚음하듯이 "어머님 아들, 힘들게 할거예요." 라는 말이 목구멍까지 올라왔다. 치졸하지만 정말 그런 마음이 들었다. 직접적으로 공격하지 못하니, 상대의 가장 소중한 것을 아프게 한다는 이 논리가 얼마나 치사하고 유치한가. 이건 정정당당하지 못한거다. 실제로 나는 남자친구를 들들 볶는 과오를 범했다. 오빠 어머님 왜 그러시냐며, 어머님 어떻게 그런말씀을 하시냐며- 남자친구에게 하지 말아야 할 말들을 했다. 그것도 모자라 속시원하게 내 편을 들어주지 않는 효자 남자친구를 타박했다. 이 격렬한 싸움이 끝나고 나서야 나는 이제 알았다. 내가 변호하지 못했던 나 자신때문에 남자친구가 힘들다는 사실을. 그리고 나 자신을 보호할 것은 나 밖에 없음을.
내가 시부모님을 진짜 엄마 아빠로 받아들이기 위해서는, 어머님 아버님 또한 나를 진짜 딸로 받아들여야 한다. 그래서 이제 나는 우리 집에서 보여주는 엄석대 모습을 보여주기로 했다. 기분나쁜 말에는 속상하다 말하고, 간섭이 과하다 싶으실때는 그만하셨으면 좋겠다는 제스쳐를 온몸을 다해 보여주기로 했다. 물론 이 "딸 패키지"에는 우리 엄마아빠에게 하는 애교와 살가운 말들, 뜬금없이 보고싶다는 안부전화, 생각이 나서 샀다는 선물세례도 포함이다. 두려운 마음이 드는 것도 사실이다. 이 굳건한 다짐이 시부모님을 뵙는 순간 사그라지고 또 착한척 뒤에 나를 숨기진 않을까. 또 나를 보호하지 못하고 연약한 자신을 그 상황속에 내몰진 않을까 싶어서.
세상에 공짜는 없다.
우리가 가족이 되기 위해서는 진짜 우리 가족이 그랬듯, 서로의 연약함을 발견하고 안아주는 과정이 필요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