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남궁 준 Mar 06. 2022

광동 팝 음악, 자유롭고 재기발랄한 퓨전 음악!

만다린과 영어, 남의 말 속에 나만의 언어로, Cantopop의 형성!

홍콩에는 언제나 구석구석 촉촉한 바닷 바람이 분다. 티없이 맑은 하늘이 먹구름으로 뒤덮여 스콜을 쏟아 부을 , 특유의 눅눅하면서도 친숙한 냄새가 난다. 도시의 아파트는 좁고 길게 지어져서 마치 성냥갑을 길게 세워 놓은 듯한 느낌을 준다. 그리고 좁은 길거리에서 땀을 뚝뚝 흘리며 살을 부딪히고,  사람의 날숨을 그대로 내가 들숨으로 받아야 하는 각박한  속에서도 밤이 되면 시원한 바람이 다정하게 몸을 휘감으며 땀을 식혀 준다. 홍콩의 휘황찬란한 야경은 번영과 풍요과시해 왔, 더불어 길가의 선정적인 포스터들을 보노라면 홍콩 사람들은 욕망에  솔직한 사람들같다는 인상을 받곤 했다.


홍콩은 이러한 눅진함 속에, 해양과 대륙의 접점으로서 사람과 문화의 교차로 역할을 하며 홍콩 특유의 색깔을 칠해 나갔다. 이제는 다시 예전의 모습대로 돌아갈 수는 없겠지만, 공산당에 반환되기 전후까지, 그리고 아무리 길게 잡아도 Beyond가 해체하였던 2000년대 초중반까지 이야기한다면, 나의 홍콩 음악에 대한 이야기도 추억 속에 막을 내릴 것이다.


Cantopop, 번역하자면 광동 팝 음악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광동어로 작사되어 광동 특유의 리듬을 살린 팝 음악은 광동어 오페라와 함께 발전했다. 1930~1940년대 이후, 연속극 전후에 나오는 주제가, 극중 인물들이 독백처럼 부르는 노래의 형식으로 자연스럽게 대중들 속에 전파되었다. 항일 전쟁에 대한 전투 의식과 승리를 기념했다. 이러한 정서는 치열한 격전을 치뤄냈던 광동 지방에서도 예외는 아니었다.  1937년의 <개선가>, <광저우 삼일간의 학살>, 1938년의 <항일가>는, 광동어 오페라 삽입곡과 함께 광동 팝 음악의 맹아로 볼 수 있다.


당시 홍콩의 음반은 홍콩에서 작사, 작곡, 그리고 음원을 녹음한 후 상하이에서 프로듀싱한 후에 완성되었다. 상하이는 선진 문화 도시였고, 홍콩은 상대적으로 낙후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공산당의 상하이 점령 이후로, 상하이의 음악산업은 "자본주의적"이라는 이유로 심하게 탄압받았다. 이는 1927년 전후로 중국 대중 가요의 아버지라 불리우는 리진후이의 재즈풍 음악을 음란 가요라고 비난하고 1940년대에 가장 인기있었던 여성 뮤지션 저우쉔의 "밤의 향기", "님은 언제 오시려나." 등을 현실과 유리된 "취생몽사"라고 비판하던 것과도 맥락이 닿는다. 이 명곡, "밤의 향기", "님은 언제 오시려나." - 등은 수십 년 후 등려군이 더 멋지게 부르기도 했는데 등려군 역시 8-90년대에 대륙에서 금지되었던 뮤지션이다. 이러한 억압적인 분위기 속에서, 등려군이 있는 곳으로 가겠다며 바닷속으로 뛰어들었던 중국의 해안 경비대 병사의 에피소드도 전해진다.


어쨌든 문화계 인사들의 대대적인 엑소더스 속에서, 음악 산업에서 성공했던 사업가들, 가수들, 작사/작곡가들과 관련 테크니션들이 홍콩을 포함해 화교/광동어 문화권이었던 동남아시아로 망명했다. 미국의 음악과 영화에 완전히 개방되어 있던 상하이의 코스모폴리탄적인 스타일이 홍콩에 이식되었고, 1952년 8월 26일, 4개의 앨범 속에  吕红, 冯玉玲 등의 8개의 곡이 수록된 "광동 팝 음악"의 첫 음반이 ENGLISH COLUMBIA에서 드디어 발매되면서 광동 대중 음악의 주체성이 점점 더 뚜렷해 지기 시작한다. 잔잔하고 차분하면서도, 광동 팝 음악의 입춘을 알리듯, 마치 봄바람처럼 마음을 설레게 하는 멜로디와 목소리가 훌륭하다.

https://www.youtube.com/watch?v=o946hA9SUcs


https://www.youtube.com/watch?v=ZczFb9LKaUA

그래도 1950-60년대에는 여전히 광동 지방에서 Cantopop은 주류 음악이 되지 못했다. 광동어 사용 인구가 90%에 달함에도, 영미권 음악과 만다린(대륙의 중국 표준어) 음악에 맥을 못 추었다. 1950년대는 상하이를 위시한 중국 대륙의 다른 도시, 그리고 대만의 문화와 홍콩의 토착 문화가 뒤섞이는 시기였고, 자본과 실력을 갖춘 음악계 인사들이 대륙 출신이기 때문이기도 했다.


또한 앞 포스팅에서 이야기했듯이, 광동 팝 음악 역시 홍콩의 "이민자 정서"가 잦아 들고 "우리의 홍콩"이라는 공동체 의식이 형성되기까지 기다려야 했다. 1961년, 홍콩 출생 인구의 비율은 1961년에 47.7%를 차지했으나 1966년에는 53.8%까지 상승했다. 그리고 이 무렵은 항일전쟁과 국공내전이 끝난지 15년 정도가 되는 시점으로서, 전쟁 이후에 태어난 세대가 청소년기를 맞이할 때였다. 이러면서 점점 자주적인 문화 분위기가 형성되었다. 잘 발달된 주거 지원 시스템과 교통 체계, 부자가 될 수 있는 기회, 영미권의 문화적 색깔, 그리고 오밀조밀하고 다채로운 생활 터전 속에서 홍콩만의 라이프 스타일을 형성해 나가기 시작하고, "광동어 음악"의 로컬리티가 강해지기 시작했다.


1974년이 광동 팝 음악의 분수령이라고 평가되곤 한다. 녹음, 프로듀싱 등 기술적인 측면의 완성도 뿐 아니라, 점점 특유의 스타일이 자신감있게 드러나기 때문이다. 1974 TVB 드라마였던 “Romance between Tears and Smiles” 〈啼笑姻緣〉에 동일한 제목의 삽입곡이기도 한〈啼笑姻緣〉은 섬세하고 감성적인 가사로 크게 어필했고, 광동 팝 음악에 대한 대중들의 인상을 전환하기에 충분했다.

 

https://www.youtube.com/watch?v=om-5MMNGoSA


만감이 교차하는 실의 속에 탄식하지 않아도,

작은 마음을 이루기 어렵네요.

붉은 실의 인연이 천리를 가도록 (님의) 발을 감싸니,

하늘이 인연을 주시지 않았다 해도 원망하지 않아요.


그리고 총 25편으로 구성되어 있는 이 드라마는 광동어를 몰라도 그냥 쭉 볼만 하다. 70년대의 드라마라는 점을 고려해도 인물의 개성, 연기, 줄거리 구성, 분위기, 그리고 음악과 함께 하는 감성 등 여러가지 측면에서 참 완성도가 높다. 특히 남자 주인공은, 현재 환갑이 넘은 나이에도 가창력이 훌륭한 미남 가수 왕걸과 보면 볼수록 닮았다.


삼천포로 조금만 더 세자면,

https://www.youtube.com/watch?v=q2pAQLf1pWc

명곡 相依为命을 불렀던 섹시 가이 천샤오춘의 동일 제목의 노래도 꽤 볼만 하다.





작가의 이전글 비틀즈, 홍콩 록큰롤의 서막을 열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