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부 수관의 수줍음] episode 05
5. 멈춰 있는 시계, 달려가는 사람들
오래된 고백을 어설프게 수습한 그날부터, 그 해 봄 내내 나는 강현을 만나지 못했다. 어쩐지 무언가 놓쳐버린 기분이 들었다. 그러나 그것이 강현인지, 대학인지, 아무것도 마련되지 않은 미래인지 알 수 없었다. 그저 강현과 마지막으로 했던 대화들만 머릿속에 맴돌았다. 강현. 적당한 거리가 좋겠다던 내 답은 거짓이었어. 나는 강현과 함께 있는 게 두려우면서도 좋았어. 강현 너는? 너는 어떤데?
그러다 문득 고개를 들었을 때, 그날은 주말이었다. 대학교를 졸업한 뒤로, 시간 개념조차 없어진 나는 오늘이 무슨 요일인지를 알아차리는 데에도 한참의 시간을 썼다. 거실에 걸린 달력을 빤히 쳐다보아도 오늘이 며칠인지 알 길이 없어, 핸드폰을 켜고서야 날짜를 알 수 있었다. 시간을 파악하기 위해서 조차 시간을 썼다는 사실은, 내가 얼마나 인생을 흘려보내고 있는지를 자각하게 했다. 그런 생각이 들면, 시간을 흘려보내는 것조차도 삶에 필요한 거라는 말을 어디에선가 주워 담고선, 또다시 마음을 다잡았다.
내 시계가 소리 없이 흘러가는 동안, 엄마의 시계 초침은 한 칸씩 촘촘히 움직였다. 엄마는 매 시간, 매 분마다 무언가를 하는 사람처럼 보였다. 지루했던 엄마는 온데간데없고, 이 세상 만물에 흥미를 두고 있는 것처럼 두 눈이 빛났다. 그 동공 속에는 엄마가 시선을 두는 모든 것들이 가득 담겨있었다. 나는 바쁘게 화장하고, 바쁘게 옷을 사고, 바쁘게 움직이는 엄마의 모습이 낯설었지만, 여전히 엄마의 하루를 누구에게도 묻지 않았다. 엄마가 집에 있는 것보다 밖으로 나가는 것이 더 반가웠기 때문이다. 엄마의 세계가 넓어지기를 바라는 마음은, 세상의 모든 딸이 품는 마음일 테니까.
하지만 큰언니 수진은 무언가 달랐다. 수진은 달라진 엄마가 분명 반가우면서도, 한편으로 불안해했다. 변화의 계기를 제대로 알지 못하면, 그 변화를 쉽게 받아들일 수 없다는 것이 수진의 생각이었다. 그녀는 언제나 엄마에게 오늘의 하루를, 내일의 일정을, 요즘의 마음을 꼬치꼬치 캐물었다. 나는 수진이 왜 엄마의 마음을 온전히 알기를 바라는지를 생각하다가, 가족이라는 관계가 얼마나 피곤한지도 함께 생각하게 되었다.
엄마가 얼마나 달라졌는지는 그저 거실만 봐도 알 수 있었다. 한때 텔레비전과 이불만 덩그러니 있던 그곳이, 이제는 엄마가 사 온 자잘한 물건들로 채워졌다. 알록달록한 쿠션, 쓰임새를 알 수 없지만 귀여운 도자기, 시장에서 덜컥 사온 허브 화분까지. 엄마의 손길이 닿은 자리마다 작은 변화가 생겨났다.
이런 변화를 가장 반긴 건, 둘째 언니인 혜진이었다. 혜진은 결혼하기 전에 집에서 함께 살 때도, 티브이 앞에 누운 엄마를 볼 때마다 “답답해 죽겠다”는 말을 입에 달고 살았던 딸이었다. 월급날 아침이면 식탁에서 밥을 먹다 말고도 이렇게 던지곤 했다. “집에만 있지 말고. 쇼핑이라도 해! 가지고 싶은 거 없어? 내가 사줄까?” 그 버릇처럼 내뱉는 말투가 막내인 내 귀에도 이상하게 시원했다.
혜진 언니는 결혼한 뒤로도, 일주일에 한 번씩 집에 들르며 엄마에게 같은 질문을 했다. 엄마 2.0은 전과 달리, 혜진의 쇼핑을 권하는 말에도 반색하기 시작했다. "정말? 그럼 나 가방 하나 살까?"라던가 "다음에 쇼핑 같이 가자." 하는 식으로 말이다.
엄마의 이런 대답은 혜진의 물음이 더 이상 ‘답답한 데를 긁어주는 효자손’이 아니라, 엄마가 여전히 삶을 즐기고 있다는 신호가 되었음을 의미했다. 혜진은 그 사실이 반가워서, 집에 올 때마다 엄마가 오늘도 활기찬지 확인하듯 같은 질문을 반복했다. 엄마가 어김없이 비슷한 대답을 할 때마다, 혜진의 만족스러운 웃음은 늘어갔다.
그날도 나는 침대에 멍하니 누워 있었다.
집 안엔 아무도 없는 줄 알았는데, 거실 쪽에서 불현듯 익숙한 혜진의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엄마는?”
문득 심장이 철렁했다. 나는 부랴부랴 몸을 일으켰다.
“깜짝이야, 언니 언제 왔어?”
“방금. 엄마는 어디 갔어?” 혜진이 가방을 소파 위에 툭 내려놓으며 물었다.
“집에 없으면 나갔겠지.”
“그래?” 그녀가 대수롭지 않게 대답했지만, 얼굴에는 은근한 기대가 번졌다.
저녁 무렵이 되자, 현관문이 덜컥 열리더니 수진이 들어섰다.
“엄마 집에 있어?” 첫마디부터 그녀의 목소리에는 서늘한 기척이 깔려 있었다.
나는 잠시 머뭇하다가 고개를 저었다.
아, 같은 엄마를 두고 이렇게 다른 반응을 보이다니. 같은 집에서 자라온 것이 믿기지 않을 정도로, 두 언니는 완전히 다른 엄마와 사는 것 같았다. 한참 그런 생각을 하고 있을 때, 수진은 거실을 훑다가 다시 한번 내 방 문을 열었다.
“세진아, 이거 엄마가 산 거야?”
그녀가 손가락으로 가리킨 건 엄마가 최근 들어 자주 쓰던 홈케어 기계였다. 나는 고개를 저었다.
“그거 언니가 사드린 거 아니야?” 혜진이 끼어들었다.
“엄마가 자기 돈으로 산 건 아니라던데.”
나는 세 사람의 대화를 마음속에서 되뇌었다. 엄마는 혜진에게서도, 수진에게서도 단 한 푼도 받지 않았다. 그렇다면 그 돈은 어디서 나온 걸까.
결국 엄마는 혜진이 신혼집으로 돌아가려는 직전, 거의 한밤중에 가까운 시간에 돌아왔다. 품에 꼭 안고 온 것은 편백나무로 만든 베개였다.
수진은 그걸 보자마자 물었다.
“엄마, 이게 뭐야? 베개야?”
“뭐긴 뭐야, 편백나무야. 목에 좋대. 음이온이 나온다네, 건강에도 좋다더라.”
혜진은 엄마 말을 듣고 활짝 웃었다.
“어유, 잘했어! 엄마, 이런 거 더 사!”
“정말?”
엄마가 반색하며 말하자, 혜진은 용기를 북돋웠다.
“엄마가 이렇게 사니까 보기 좋네. 마음이 놓여. 나는 집에 간다! 다음 주에 또 올게.”
나는 혜진이 집을 떠나는 소리를 들으며 방으로 돌아왔다. 어둑하고 무거운 방 안으로 수진의 질문이 틈새를 비집고 들어왔다. 수진은 어디서 샀는지, 누구와 갔는지 하루 종일 물어보았다.
“아유 무슨 그런 걸 물어. 어련히 약속 잡고 놀다 왔겠지."
엄마가 좀처럼 쉽게 대답을 하지 않아도, 수진은 포기하지 않고 계속 엄마를 떠봤다.
나는 반복되는 소리에 답답함을 느꼈다. 가족은 어쩌면 반복되는 소리를 어디까지 견딜 수 있는지에 대한 자신의 인내심을 테스트하기 위해 신이 부여해준 것일지도 모른다.
그 소리에서 벗어나기 위해 나는 또다시 강현을 떠올렸다. 늘 새로운 주제로 자신을 깜짝 놀라게 하게 했던 강현을. 새로운 세상을 내게 선사해 보였던 강현을 말이다.
아. 강현이라면 어떻게 했을까? 그는 새로운 세상을 향해 나아갔을 것이다. 강현은 언제나 더 잘 맞는 세상을 향해 떠날 줄 아는 사람이었으니까.
이 계절을 딛고 한 걸음 나아간 강현.
지나간 대학을 졸업하고 새로운 출발을 한 강현.
둘 뿐이던 우리의 세계를 떠나 더 많은 생명이 숨 쉬는 세상으로 떠난 강현.
나는 불현듯 내가 왜 그토록 강현을 좋아했는지 깨닫게 되었다. 늘 제자리에서 머물 줄 알았던 내게, 강현과의 대화는 삶을 한 걸음 더 나아가게 해 주는 착각을 주었다.
그러나 강현이 떠난 내 삶은 여전히 멈춰 있었다. 대학을 졸업하고 내가 향한 곳은, 고작 다시 집이었으니까.
· 이 이야기는 현대 가족의 서사를 담은 허구의 소설로, 모든 인물과 사건은 작가의 상상에서 비롯되었습니다.
· 본 작품은 1부 〈한강에는 금붕어가 산다〉, 2부 〈수관의 수줍음〉, 3부 〈해묘 군락〉으로 이어지는 연작 소설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