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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염전씨 Feb 05. 2019

아름답지만 심란했던 발리

2주 동안 발리에서 만난, 마음 복잡한 순간들

정말 웃기지만 세상의 꽤 많은 것을 경험해보았고, 어딜 여행하든 기본적인 삶의 골자는 동일하다는 오만에 빠져있었다. 그래서 발리는 사실 전혀 가보겠다고 생각도 안했던 곳이다. 정말 뻔한 동남아 휴양지일 것 같다는 생각 때문이었다. 지금 돌이켜보면 어쩜 그리 무지하고 뻔뻔했는지. 실제 가서 만난 발리는 새로운 것 투성이었다. 발리에서 만큼 '내 인생의 처음'이 많았던 곳이 없었다. 여행 내내 모험을 기다리는 마음으로 신나고 즐거웠다.


그렇지만 마음 한 켠에는 부채감이 있다. 사실 동남아를 여행할 때에는 늘 그랬다. 몇 가지 떠오르는 이유는 이렇다. 하나, 관광객과 현지인 간의 묘한 위계 관계. 둘, 삐까뻔쩍한 관광지에서 한 골목만 더 들어가도 바로 등장하는 열악한 현지인들의 생활 환경. 셋, 굉장히 깨끗하고 모던한 서양 음식을 파는 예쁜 식당들과 그런 곳만 찾아다니는 나. 내가 여행을 오는 게 이 사람들의 삶의 터전을 해치고 있는 건 아닐까? 이들의 문화와 사회가 병들게 하는 데에 일조하고 있는 건 아닐까?


내가 2주 동안 마주했던 심란하고 복잡했던 발리, 인도네시아의 모습을 공유한다. 순서는 덜 심란한 것부터 시작해서 갈 수록 더 심란해진다.



지역 공동체에 대한 성찰을 보여주는 길리섬

길리섬은 Gili Eco Trust (GET)라는 지역 NGO의 적극적인 활동으로, 모든 상점과 호텔들이 친환경적 운영을 하고 있었다. 이렇게까지 온 섬이 한 마음이 되어 환경 보호에 적극 동참하고 있다는 사실이 정말 감동적이었다. 고등학생 때 환경 운동가가 되고 싶었다가 "어차피 아무도 신경 안 써"라는 무력감에 포기했던 기억이 새록새록 피어났다. 길리에서는 일단, 배를 제외하고는 모터가 달린 운송 수단이 전혀 사용되지 않는다. 사람들은 자전거로 이동하고 무거운 짐을 옮겨야 하는 경우 마차를 이용한다. 그리고 정말 신기했던 건 #SayNoPlastic 운동이 정말 심각하고 진지하게 전개되고 있다는 점이었다. 카페에는 "테이크아웃이 정말 필요한지 생각해보라"는 문구가 적혀있고, 아이스 음료는 종이/대나무/옥수수 빨대 중 하나와 함께 제공된다.

거북이와 함께 수영할 수 있는 길리섬의 또 다른 동물 친구는 단연 고양이다. 이 동네에는 뭐 이렇게 고양이만 있나 싶을 정도로 고양이가 정말 많다. 그리고 다들 안쓰러울 정도로 바싹 말랐고, 믿을 수 없이 조그맣다. 숙소 앞에라도 내놓고 싶어서 편의점 마다 고양이 사료를 찾았지만 없었다. 자전거를 대여해준 식당 사장님에게 혹시나 싶어 물어보니, 'Cats of Gili'라는 단체가 내 숙소 바로 옆에 있고 거기서 사료를 판다고 알려주었다. 이 단체는 GET의 하위 단체로, 수의사가 전혀 없는 길리섬의 길고양이—그들은 feline citizen, 고양이 시민이라고 부른다—들을 위해 세워진 전문 단체다. 이들은 길고양이 뿐만 아니라 사람들이 키우는 고양이들을 위한 의료 서비스를 제공하고 사료를 판매한다. 수익금은 길고양이를 돌보는 데에 사용된다. 작은 가게에 주먹 만한 고양이들이 열 마리 정도 머무르는데 그 귀여움에 심장이 박살나고, 지역 공동체가 자연과 공생하는 방법에 대해 고민하고 실천하는 길리섬 사람들에게 두 번째 박살나고 돌아왔다.





무상이지만 무상이 아닌 인도네시아의 교육 제도

발리에 오기 전 블로그를 통해서 유심, 환전, 택시 등등 다양한 곳에서 관광객을 등처먹는 현지인들이 많으니 조심해야 한다는 것을 알게 됐다. 원래 호객행위 자체도 싫어하는 터라 나는 뭐든 항상 신경을 곤두세우고 가격을 비교하고, 잔돈을 꼼꼼하게 세어보고, 거리에 있는 모든 사람들에게 의심의 눈초리를 보내고, 호객행위라도 하는 사람에게는 경멸의 눈짓을 한다. 헬로, 헬로 하는 사람들에게 그냥 말이라도 한 마디 해줄 수 있는 건데 나는 항상 무심하게 씹고 지나간다. 투어를 예약할 때에도 정말 끝까지 의심하다가 겨우 예약하곤 했다. 그러다 스노클링 가이드로부터 교육비를 감당할 수 없어서 학교를 다니지 못했고, 이 곳 대다수의 사람들이 그렇다는 이야기를 듣고 현타를 찐하게 맞았다.


조금 더 알아보니 인도네시아는 중등 교육까지 무상으로 제공하기는 하지만, 학교가 수업 도구와 교과서 등 기본 자재를 지원하지 않아서 학생들이 부담해야 한다고 한다. 교과서 한권에 3-6천원 선으로, 모든 과목에 대한 교과서를 구비하고 준비물을 챙겨 학교를 다니는 것 자체가 현지 물가로는 꽤 부담되는 가격이다. 그래서 중도 이탈하는 경우가 많고, 일찍부터 여행객들을 상대하는 직업을 구해서 일을 시작한다고 한다. 정규 교육의 적극적인 지원(?!)을 받지 못하고도 이만큼 이 곳 사람들이 영어를 말한다는 것이 참 신기했다. 주로 할리우드 대중 영화들을 보며 영어 공부를 한다는데 기분이 조금 묘했다. 서구 대중 문화 공룡들에게 비용을 지불한 뒤 그들의 언어를 배우고 그들로 인해 먹고 사는 이 곳의 사회 구조—이렇게 편리하고 납작하게 표현할 수 없는 것이지만—가 새삼스레 다가왔다.


 + 인도네시아가 이슬람 국가인 반면(무슬림 수로 전세계 1위 국가), 발리는 힌두교를 믿는다. 인도네시아에서는 종교가 굉장히 중요하다. 학교도 종교 학교와 일반 학교로 나뉘고, 일반 학교에서도 이슬람 종교 수업을 따로 듣는다. 그렇다면 발리의 일반 학교에서 종교 수업은 뭘 들을까 궁금했는데 국교를 따라 이슬람 수업을 듣는다고 한다.

+ 발리의 교육에 대한 재미있는 사실. 발리에는 교복만 보면 그 학생이 초/중/고등학교 학생인지 알 수 있다는 것이다. 초등학생은 흰 셔츠에 빨간 하의, 중학생은 흰 셔츠에 파란 하의, 고등학생은 흰 셔츠에 긴 바지를 입는다고 한다





처음 만난 힌두교, 그 안에서 부역하는 익숙한 여자들

힌두교 나라로 여행을 가본 것은 처음이었다. 그래서 힌두교 문화가 아주 강력하게 곳곳에서 등장하는 발리의 길거리가 정말 신기했다.

걸어다니는 것만으로도 힌두교가 된 것 같은 느낌

가장 신기했던 것은 집집 마다 문 앞 바닥에 놓인 대나무 접시였다. 형형색색의 꽃과 대나무 장식, 약간의 음식(!!)이 담긴 접시였다. 알고보니 지옥의 악령에게 바치는 제물인 차루라고 한다. 가끔 이 접시가 제단 위 같은 데에 올라가 있는 경우도 있는데, 얘는 천상계의 신에게 바치는 것으로 차낭이라는 이름으로 달리 불린다. 저녁이면 짓밟혀 있어서 좀 보기 싫었는데, 다음 날 아침이 되면 언제 그랬냐는 듯이 깨끗한 길 위에 깨끗한 접시가 새로 놓인다. 말하자면 발리 사람들은 매일 제사를 지내는 것이다. OMG...


정말 희한하다고 생각하면서 고개를 들면, 길거리 마다 가로수 마냥 대나무 장식들이 늘어서있다. 알고 봤더니 용이 고개를 숙인 모형으로, 종교 행사가 있을 때마다 설치한다고 한다. 힌두교에서는 용이 굉장히 귀한 상징이어서, 신처럼 인간을 굽어본다는 의미로 이런 장식을 한다.


힌두교 문화가 거리 곳곳에서 시시각각 굉장히 다른 모습으로 나타나는 것이 여행자로서 굉장히 흥미로웠다. 그렇지만 그 안에 부역하는 여성에 대해서 계속해서 생각할 수 밖에 없었다. 발리의 힌두교에 대해 신나게 설명해주던 택시 기사는, 어머니가 차려준 차낭사리를 들고 나온 거라며 해맑게 이야기했다. 머리에 최소 7단은 되어 보이는 제사상을 이고 가는 중년 여자들, 빡세게 화장하고 허리 라인에 맞춰 꽉 맞는 긴 치마를 입은 채 종교 행사를 준비하는 내 또래 여자들을 보며 마음이 복잡했다.





서비스업 중심 국가의 인문학

발리에서 2주 간의 여행 내내 들었던 생각은 "이렇게까지 관광업에만 생산인구가 몰려 있을 때 이 도시 전체의 행복도는 어떨까?"였다. 나는 내 생활의 터전이 타인의 '관광지'가 되었을 때 별로 행복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여행객들은 시끄럽고, 머물렀던 자리를 더럽게 만들고, 내가 누려야 할 생활 시설들을 그들을 위한 상권으로 뒤덮어버린다. 나는 그래서 여행객들이 싫었다. 대다수의 사람들이 여행객과 직간접적으로 관계를 맺는 발리에서는 도대체 어떨까? 나처럼 여행객들이 싫었을까? 만약 그렇다면 이 사람들은 자신의 인생 전체를 특정 집단의 인간을 싫어하면서도 동침했어야 했을 텐데, '인간'을 어떻게 이해하고 있을까? 이런 것들이 궁금했다.


우붓에서 만난 투어 가이드와 이동 시간에 많은 이야기를 했다. 그는 외국인 여행자들과 함께 많이 이야기하며 영어 실력을 향상시키고, 돈을 많이 모아서 자기 집에서 작게 airbnb를 열고 싶다고 했다. 나중에 돈을 더 많이 벌면 태국 파타야로 여행 가서 트랜스젠더쇼를 보고 싶다고 했다. 그렇지만 어지간하게 많이 벌지 못하는 이상 그러기는 쉽지 않을 거라고도 덧붙였다. 그가 어지간히 벌어도 가기 힘든 해외여행을 나는 하고 있으니, 조금은 씁쓸했다. 그러다 그가 "more tourists means more money"라는 이야기를 했다. 갑자기 찾아온 띠요옹 모먼트에 혼자 먼산을 바라보다 돌아왔다.


아직도 이 궁금증에 대한 해답을 찾지는 못했다. 이런 고민을 정말 나만 했을까 싶어서 열심히 구글링 해봤지만, 직원의 행복도가 여행객의 서비스 만족도에 미치는 영향 이런 경영자 중심적 연구만 나와서 포기했다. 혹시 이런 고민을 하신 다른 분이 있다면 고견을 좀 나누어주셨으면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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