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아래는 2020년 여성개발자컨퍼런스에서 발표한 내용을 글로 풀어 쓴 것입니다.
내가 지금 하는 일은 고객의 비즈니스와 기술 상황을 깊이 있게 이해하고 클라우드 서비스를 더 잘 쓸 수 있게 돕는 일이다. 구체적으로는 고객의 아키텍처를 검토하고 여러가지 관점에서 더 효과적인 아키텍처를 만들 수 있도록 하고, 우리 서비스를 잘 모르는 고객들을 위해서 교육도 수행한다. 또 구체적인 기술 영역에 대한 질의응답을 하기도 하고 고객들이 클라우드를 도입하는 데에 방해가 되는 모든 기술적 장애물들을 검토하고 서비스 제공자 입장에서 해결 가능한 것들은 해결하도록 돕는 역할이다. 여러 고객들에 걸쳐 반복적으로 발견되는 문제, 시장 동향 등을 묶어서 인사이트로 만들어 여러 컨퍼런스에서 발표한다든지, 블로그에 글을 쓴다든지 하는 일도 포함된다.
즉, 나는 개발자나 인프라 엔지니어, 데이터베이스 관리자 등 한 분야만 깊이 있게 딥다 파는 사람들을 청중으로 보통 일을 한다. 이전에 내가 뭔가 서버 앞에 붙어서 문제를 해결하고 직접 뭔가 작업을 하는 것과는 한 발 멀어진 직무이다. 현업에 완전히 붙어 있는 역할은 아니다보니 기술적 깊이 만큼 너비가 더 중요해지는 역할이다. 솔직히 그 전에도 대단히 깊게 해봤냐고 묻냐면 자신있게 대답은 못하겠다. 완전히 비기술직에서 출발해서 서버도 했다가 개발도 했다가 하다 보니 뭔가 하나를 남들만큼 오래하지는 못했다. 오래한 것을 기준으로 깊이를 따진다면(잘못된 기준이겠지만) 나는 깊이는 없는 사람이다. 그보다는 배움과 스페셜리티에 굶주렸던 흔적이 가득한 커리어다.
이런 나의 커리어, 회사의 자아를 키우며 나는 나 스스로를 정의하는 수많은 척도들을 만나게 됐다. 그 첫번째는 나의 성별, 여자라는 것이었다. 데이터센터 첫 출근날 팀장은 내게 “여자 보내지 말라고 했다"는 말을 당당하게 했다. “너는 메모리칩 교체 이런 거 안해봤지, 남동생이 해줘서?” “너는 주말에 안 나와도 돼. 남자들끼리 할게” 이런 말들도 들었다. 내 의지와 관계 없이 내 주변에서는 내가 여자임을 계속해서 상기시켜주었다.
다른 하나는 내가 주니어라는 것이었다. 주니어란 무엇인가? 회사마다 다르겠지만, 내가 있었던 곳에서 주니어는 컨펌을 받아야 하는 사람이었다. 머릿속에서 휘몰아치는 많은 생각들을 미팅 시간에는 이야기하지 못하고 병풍처럼 앉아 있다가 나와서 상사에게 내 생각은 이렇다고 얘기해야 하는 사람이었다. 내가 뭔가 생각을 정리한 뒤 윗사람에게 보내고 누군가의 의견을 기다려야 했다. 혹은 내가 모든 것을 다 준비하고도 말미에는 다른 누군가의 구미에 맞추어, 다른 누군가의 발표 스타일에 맞추어 변형시켜주어야 했다. 그리고 나의 또 다른 중요한 정체성 하나는 제너럴리스트라는 것이었다. 회사라는 것 안에 있다보면 내 존재 의미를 의심하게 되는 일들을 만나게 되고, 그 순간마다 나는 나 스스로를 증명해보이기 위해 최선을 다했다.
그럼에도 내가 없어도 이 회사는 너무나 잘 굴러갈 것 같은 느낌을 받는다. 그렇지만 내가 인격적으로 너무도 한심하게 생각하는 저 사람이 없어서는 안될 것 같은 느낌에 나 혼자 자존심이 상하고는 했다. 수없이 많은 스페셜리스트를 만나야 하는 지금, 기술적 제너럴리스트라고 보는 것이 맞는 지금은 또 어떠한가? 그들만큼의 기술적 깊이를 가지기에는 절대적 시간이 부족한 나는 그들 앞에서 전문가로서 지식을 전달해야 하는데, 만약 그들의 기준을 맞추는 것에 실패하면 나는 그 순간 즉시 쓸데없는 인간이라는 눈빛을 받게 된다.
나는 성장 그 자체를 좋아하는 사람인데, 이 모든 커리어 정체성들이 복합되니 성장이라는 게 참 어렵게 느껴졌다. 원래 이렇게까지 모두에게 힘든건가 싶기도 하고. 첫째로 내가 여자라서 이런 일들이 일어나는 건지 생각하게 되는 피해망상 모먼트들이 나를 자주 괴롭혔다. 지금 내가 하는 이 일이 주니어이면 하는 일들인 걸까 아니면 여자라서 하는 걸까, 내가 받는 이 불편한 느낌들이 내가 스페셜리스트이지 못해서인걸가 여자라서 그런걸까… 이런 생각을 하는 것자체가 소모적으로 느껴졌다. 사회에서 끊임없이 일어나는 여성혐오 범죄들과 여성혐오적인 여론들, 회사 내 스몰토크에서 계속해서 만나게 되는 여성혐오적인 발언들에 노출되면서 더 힘들어졌다. 이런 일들에 스트레스 받지 않고 자기가 하는 일만, 자기가 해야 하는 공부에만 집중할 수 있는 사람들이 진심으로 부러웠다.
또 다른 괴로운 점은 내가 한 인간으로서 존중하기 어려운 사람을 실력 내지 연륜 때문에 무조건 모셔야만 하는 상황이었다. 일상이었다면 상종조차 하지 않았을 사람인데 내가 기술적으로 부족하다는 이유 때문에, 내가 연차가 낮다는 이유 때문에 굽히고 들어가야 한다는 것이 너무나 스트레스였다. 필요한 것만 취하자고 최면을 걸어도 스트레스가 되는 것은 막을 수 없었다. 제너럴리스트로서 여러가지 기술과 고객의 비즈니스를 이해해야 하는 것 역시 대단한 어려움이 따른다. 다른 사람들은 백엔드 개발이면 백엔드 개발로 그 분야만 깊이 있게 공부하고 여기에서 발생되는 트렌드들만 보면 되는데, 나는 백엔드 개발은 물론 IoT, 데이터 분석 등등을 모두 공부해야 한다. 그러다보니 뭐부터 해야 하나 주저 앉고 싶어지는 때가 한 두 번이 아니다. 이 상황에서 내가 어떻게 해야 할까? 여자인 건 바꿀 생각이 없고, 주니어인 건 내가 어쩔 수 있는 것이 아니고, 그럼 조금 더 스페셜티를 가져야 할까? 내가 아니면 안 되는 일들을 더 만들어야 할까?
그래서 제너럴리스트인 지금 상황을 바꿔봐야 하는걸까 고민을 하기 시작했다. 내 주변의 많은 사람들과 이 주제로 이야기를 나누었고 결과적으로는 일단은 지금의 기술적 제너럴리스트 상태를 유지해도 괜찮겠다는 결론을 내렸다. 이 생각을 하면서 링크드인을 통해 정말 많은 사람들의 커리어를 관찰했고 어느 직종이든 성장과 레벨업은 범위의 확장이라는 것을 쉽게 확인할 수 있었다.
우리 모두는 얼마나 체감하고 있는가에 관계 없이 어떤 비즈니스의 성장을 위해 회사에서 일을 한다. 그런 관점에서 더 많은 일을 한다는 것은 더 넓은 범위의 일을 하는 것이었다. 특히 주목할 만한 점은 엔지니어의 경우 필연적으로 커리어 성숙의 과정에서 기술 범위의 확장을 요구 받는다는 것이었다. 개발 팀장이 되는 경우 기능 개발, 서비스 개발을 넘어 개발을 총괄하는 단계로 나아가게 되고 이 과정에서 개발과 연계된 다른 많은 일들(프로젝트 관리, 기획 참여 등)을 하게 된다.
나아가 CTO가 되려면 백엔드, 프론트엔드, 앱 개발, 데이터 분석 등 하나의 서비스를 굴러가게 만들기 위한 한 분야에 집중하는 것에서 벗어나 이 모두를 다 볼 수 있어야 한다. 이 말은 곧 시점의 차이일 뿐이지 대부분의 사람은 결국 제너럴리스트가 된다. 그럼 이제 언제 제너럴리스트가 될 것인가의 선택만 남게 되는 것이다. 이걸 이해하고 나니 제너럴리스트인 지금 상태가 더 이상 불안하게 느껴지지는 않았다.
그럼에도 내가 선택을 해야 하는 것은 달라지지 않았다. 나는 아주 오랜 시간 전문성이라는 것에 목을 매며 살았는데 이게 대체 내 인생에 어떤 의미인지, 이게 무슨 영향을 줄거라고 기대하는지를 조금 더 자세히 들여다보았다. 기술적인 전문성이라는 것은 지금 나의 생존을 위해 원래 필요하다. 놓아서는 안 된다. 그렇지만 이 ‘필요'의 농도는 재정의되어야 한다고 생각이 들었다. 나는 오랜 시간 증명해 보이겠다는 생각으로 공부를 했기 때문이다.
나를 여자로 정의해버리는 이곳에서 뭔가 보여주겠다는 그 마음이 나를 조급하게 만들었다는 것을 부정할 수 없었다. 기술적인 전문성의 방향과 태도는 내가 정하는 건데, 이런 외부적인 요인으로 그 과정에서 내가 너무 소모된다고 느낀다면 그렇게까지 해야 할까 싶었다. 내가 다 타버리고 나면 아무것도 안 남으니까. 그리고 주변 선배들과 구체적으로는 ‘개발자가 되어야 할까요?’라는 질문을 가지고 이야기를 나누었을 때 많은 사람들이 공통적으로 관찰한 것은 나의 동경이었다. 내가 해보지 못한 것,이상향으로서의 무조건적인 동경처럼 느껴지고 구체적으로 왜 하고 싶은지 어떤 점에서 잘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하는지 등을 잘 설명하지 못한다는 말을 듣고 좀 정신이 들었다.
나는 개발자가 되고 싶다고 생각하는 이유, 조금 더 스페셜리스트가 되고 싶은 이유도 궁극적으로는 지금 내가 하는 일을 더 잘하고 싶어서이기 때문이었다. 그렇다고 한다면 내가 노력해서 얻은 어느 정도의 스페셜리티를 가꾸고, 내가 본디 갖고 태어난 여러가지 장점들을 기반으로 쓸 수는 없을까 생각하게 됐다. 그래서 나는 당분간은 지금 일을 하며 제너럴리스트로 살 생각이다.
다만 물경력 제너럴리스트가 되지 않기 위해서는 몇 가지 전략이 필요하다. 첫째는 우선순위 정하기다. X0년 후에 내가 70이 되었을 때에도 일할 수 있게 해주는 무언가를 기르게 해주는지를 기준으로 일을 정한다. 지금 내가 어떤 핫한 기술 분야를 배우는 것은 당연히 여러가지로 도움이 된다. 그런데 지금 나에게 다른 세일즈팀과 일해보는 것, 세일즈 전략을 기획해보는 프로젝트 기회가 온다면 일단은 나는 기술적이지 않고 귀찮은 일이 될 것 같아 망설일 것 같다. 그렇지만 아주 장기적으로 봤을 때 나라는 개인 브랜드, 혹은 나의 사업체를 생각해보면 필요한 일이 될 것이다. 이런 것들을 고려하여 업무의 우선순위, 내가 취할 기회를 선택하는 것이다.
둘째는 그렇게 우선순위를 결정했다면 내가 사장인 것처럼 생각하고 일해야 한다는 것이다. 주니어들은 내가 주니어라는 생각 때문에 스스로 할 수 있는 일에 제한을 두기도 한다. 내가 그랬다. 그런데 그러면 일에서의 최대 가치를 뽑아낼 수 없다. 그래서 일단 맡았다면, 내가 여기서 얻을 수 있는 것을 정의하고 내가 그 프로젝트 상위의 CEO인 것처럼 밀어붙여서 해낸다. 그러면 일찍 제너럴리스트가 되어서 조직과 프로젝트의 성공을 이끄는 경험을 남들보다 일찍 해볼 수 있다. 나는 이런 경험이 제2, 제3의 인생 길잡이가 될 거라고 믿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