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두가 겪는 권태일까, 마음의 구멍이 메워지는걸까
나는 늘 야심이 가득 찬 사람이었다. 늘 새로운 도전을 하고 싶었고 그것을 해내는 것이 너무 재미있었다. 나는 내 야심을 드러내는 것이 두렵지 않았고, 늘 그것에 부합하는 노력을 들이부었기 때문에 부끄럽지 않았다. 6년 차 정도가 됐을 때 내가 불안을 연료로 해서 지속할 수 없는 속도로 가고 있음을 조용히 알아차리기 시작했다. 인정해 봤자 멈출 수 있는 법을 몰랐기 때문에 그냥 계속 그렇게 했다. 미국에 오면서 어느 정도 타의로 브레이크를 잡게 되었고, 결과적으로 말하자면 만 9주년을 바라보는 지금은 그때의 나처럼 살고 있지 않다. 몸도 편하고 마음도 상대적으로 평화롭다면 평화로운데 늘 머릿속에 나 이제 어떻게 살아야 하나 싶은 불안에 가까운 질문이 차오른다. 내 삶이 이도저도 아닌 것으로, 표지만 보고도 간파할 수 있는 시시한 것이 되면 어쩌나 걱정된다.
나는 그 무엇으로도 대체될 수 없는 인간이 되고 싶었다. 내가 아니면 안 되는 일이 세상에 많아졌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내가 없이는 세상이 돌아가지 않으면 좋겠다, 세상은 나에게 전부인데 나는 세상의 전부가 아니라니, 억울하다고 생각했다. 이것은 실제 2014년 내가 대학교 3학년일 때 쓴 일기에서 발췌한 내용인데, 이때보다 훨씬 전부터 그런 마음으로 살았다. 그런데 지금은 그 무엇도 되고 싶은 마음이 없으며 회사에서 나는 너무도 대체 가능한 존재란 걸 절절히 알고 있고 예전만큼 나를 갈고 다듬어 굳이 대체 안 되는 인간이 되겠다는 생각도 들지 않는다. 말하자면 나는 야심이라는 것을 잃어버린 것이다. 애초에 어떠어떠한 자리에 가겠다는 생각도 없었고, 남들이 다 있는 것 같아서 나도 하나 가져봐야지 하고 생각해 본 것도 있었지만 사실 그 자리에 가든 말든 별로 관심이 없다는 게 내 솔직한 심정이다. 나는 그냥 지금은 좋은 책만 보고 싶고 재미있는 요리를 시도해보고 싶고 테니스를 잘 치고 싶고 날씨가 좋을 때 강가에 나가고 싶을 뿐, 더 이상 탑 티어가 되겠다는 생각도 들지 않고 목숨 걸고 무엇이 되어야겠다는 생각도 안 든다. 말하자면 작년까지만 해도 어떻게든 부여잡고 있던 야심을 드디어 잃은 것이다. 여기에 대해 두 가지 가설이 있다.
#1
최근에 한국을 방문했을 때 AWSKRUG Women in Cloud 소모임에 참석해서 업계 여자분들을 아주 많이 만날 기회가 있었다. 주최하시는 분과 준비하면서 나눴던 이야기는, 내 연차의 사람들이 이런 소모임에 잘 참석하지 않아서 어떻게 하면 이 분들을 모실 수 있는지였다. 내가 내 또래의, 내 연차의 사람들을 생각해 보면 사람마다 차이는 있겠지만 거의 비슷한 권태를 느끼고 개인적으로 결혼이나 출산 등의 또 다른 도약을 하기도 한다. 7년 차가 넘어가서부터 이렇게 커리어 권태기, 우선순위의 전환기가 시작되는 것을 느꼈고 9년이 되어가는 지금은 더더 그렇다. 사실 한 7년 차에 들어서면서, 여자들의 커리어 이야기에 1-3년, 3-7년, 팀장이 되고 임원이 되는 이야기는 있는데 그 사이 어딘가의 7-9년은 이야기의 공백이 있는 것 같다고 생각하기 시작했었다. 돌이켜보니 이 권태감, 야심의 상실이 모두가 보편적으로 느끼는 것일까 싶은 생각이 든다.
#2
그렇지만 모두가 7-9년 차가 된다고 야심의 동력을 잃는 것은 아니지 않나? 2022년에 내 심장을 사로잡았던 드라마 <작은 아씨들>을 무슨 바람이 불어서인지 다시 봤다. 책 문장을 읽는 것 같은 생경한 대사들이 새로이 들렸는데, 그중에서도 나를 댕 치고 간 것은 “야심이 크다는 건 그만큼 마음의 구멍이 크다는 뜻이죠.”라는 원상아(엄지원 분)의 말이었다. 박재상(엄기준 분)을 설명하며 그렇게 말했다. 전에 볼 때는 듣지도 못하고 지나간 것 같은데 이만큼 극을 관통하는 대사가 있나 싶었다. 실은 전사가 되고 싶었던 원상아만큼 마음의 구멍이 큰 사람도 없었으며, 20억을 보고 기쁘고 두렵고 황홀했던 인주가 700억이 필요 없는 사람이 되어가는 과정이 이 드라마의 플롯 자체였기 때문이다. 이 대사를 들으면서 많은 생각이 스쳐 지나갔는데, 그중 하나는 내가 지금 야심이 잃은 것은 반대로 말하면 내 마음의 구멍이 뭔가 메워진걸까 싶기도 하다. 나 개인적으로 일을 하면서 충분히 긍정적인 경험도 해봤고 좌절도 했고 뾰족했던 내 각들이 둥글어지면서 이렇게 된 걸까 싶은 것이다.
굳이 답을 내려야 한다면 #1, #2 모두일 것이다. 원인이 어찌 되든 간에 그래서 어떻게 살아야 할까? 회사 생활을 시작하기 전부터 나를 지배하고 있던 이 야심이라는 것이 점점 옅어져 가면, 나를 너무도 오랜 시간 동안 정의해 온 것이 사라져 가면 나는 뭐가 될까? 나는 내가 그토록 두려워했던, 시시한 책이 될까? 내 다음은 뭘까? 머릿속에 생각은 차오르지만 행동으로 옮겨지지 않는 것은 게으름을 탓해야 하는 걸까? 혹은 그저 그만큼 원하지 않는 것일 뿐일까? 다른 사람들은 이런 야심 상실의 시기를 어떻게 지나갈까? 그 어느 때보다 댓글을 보고 싶어서 쓰는 글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