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0대가 된다는 것은 많은 사람들에게 다른 의미를 가지겠지만 나에게 가장 큰 하나는, 사랑이 시작되는 느낌을 알게 됐다는 것이다. 그 느낌은 나를 조심하게 만든다. 진짜로 신중해야 될 것 같게 만든다. 나는 20대의 절반 이상을 Y와 연애 중이었다. 내가 미국에 오면서 앞으로 인생에 대해 바라는 점이 좁혀지지 않는다는 것을 알게 됐고 Y와 결국은 헤어졌다. 처음에는 폭발적으로 사랑했고 그 뒤에는 꽤나 성숙하게 파트너로 자리 잡아갔다. 그와 연애하는 긴 시간 동안 사랑이라는 것이 어떤 모습으로 변모하는지 배웠다. 사랑이 시작되는 느낌을 안다는 것, 이것 또한 Y의 유산이다. 5.5년 간의 연애를 끝내고 헤어진 지 2년이나 지난 이제야 나는 천천히 Y을 뒤로하고 앞으로 간다는 느낌을 받는다. 헤어지고 나서 아주 오랜 시간 동안 Y 같은 사람에게 내가 상처를 줬다는 것을 믿을 수가 없었다. 내 마음에 남은 사랑만큼 죄책감은 깊어만 갔다. 이런 내가 사랑을 받아서 안 된다고 생각했던 것 같다. 그래서 줄 수도 없었다. 이 시간 동안 D와 사귀었다. 그렇지만 미안할 만큼 D를 사랑하지 못했다. 그럼에도 혼자가 되는 것은 너무 무서워서 헤어지지 못했다. 그렇게 함으로써 너무나 큰 상처를 줬다. 나를 사랑해 준 두 남자들에게는 너무 미안하지만 그때의 나는 그냥 그런 사람 밖에 되지 못했다. 20대 초반까지만 해도 내가 상처를 받는 것만 상처인 줄 알았다. 근데 이 두 번의 긴 연애를 지나고 나니, 그들에게 그만큼 상처를 줬다는 사실에 나도 믿을 수없는 만큼의 크기의 상처를 받았다. 나는 너무도 혼란스러웠고 나를 돌보는 대신에 나 자신에게 더 상처 주는 쪽을 택했다. 지난겨울은 아주 긴 자해 같은 시간이었다. 나는 방 안에서 혼자 머릿속에서 일어나는 매드맥스 같은 맹렬한 질주를 무력하게 바라보거나, 내 시간을 투자할 가치가 없는 사람들을 만나 공연히 상처받는 일들을 만들었다. 그런 시간을 지나고 나니까 천천히 선명한 깨달음이 찾아온다. 나는 나도 모르는 새에 분에 넘치는 사랑을 받았다. 이것에 대해 평생 감사할 것이다. 나는 내가 백만장자 못지않은 부자임을 이제 안다. 사랑이 오는 느낌을 나는 이제 정확히 알고 있으니까.
조용하고 확실하게 그리고 아주 담백하게 C가 좋아졌다. 묘하게 확실한 느낌, 싫은 게 하나도 없는 느낌. 100% 내 모습이어도, 내 마음을 공연히 숨기지 않아도, 좋다고 솔직하게 다 말해도 너무도 도망가지 않을 것 같은 느낌. 운전할 때 처음 잡았던 그 손이 너무 오래 잡아본 것 같은 느낌, 처음 본 순간 뭐랄까 그립달까의 느낌. 아프다고 할 때 한걸음에 달려 가서 미역국을 해 줄 수가 없으니 아쉬운 느낌. 과거의 관계 시작이 늘 무언가의 폭발이었다면 지금은 아주 잔잔하다. 예전 같았으면 내가 정말 좋아하는 걸까 의심했을 것 같은 데 지금은 그런 생각이 들지 않는다. 그냥 말 그대로 잔잔한 확신이다. 별 달리 물어보지 않아도 우리가 그 다음 주말에 만날 거라는 것을 알고 4월 13일에도 우리가 함께일 것이라는 것, 콘서트를 같이 보러 가게 될 것이라는 것도 안다. 아주 뻔한 노랫말 같지만 자꾸 기다려지는 게 생긴다. 너를 만나는 목요일, 그냥 얼른 지나가버렸으면 좋겠는 니가 없는 주말, 너와 한국에서 만나는 날들…
이런 조용한 확신이 어디에서 태어났을까 생각해보면 우리가 서로에 대해 무엇을 좋아하는가에서 오는 것 같다. 그는 나의 화려하고 적극적이고 사랑이 많은 모습이 아니라, 아무리 어깨를 펴보려고 해도 다시 숨게 하고 집에 돌아와서 일기만 쓰게 하는, 내 한 가운데에 있지만 있는 줄도 몰랐던, 내 안에 있는 것이 새어나올까봐 조마조마해야 했던 이걸 그는 나에 대해 좋아하는 점으로 가장 먼저 꼽는다. 내가 그에 대해 가장 처음으로 좋아하게 된 것은 웃는 얼굴 뒤에 묘하게 느껴지는 차가운 외로움, 아무 말도 안하고 웃었을 뿐인데 느껴지는 약간의 우울함 같은 것들이었다. 그 뒤로는 심부를 찌르는 정확한 말들로 증폭된다. 내가 부정적인 감정을 이해하고 표현하는 것보다 긍정적인 감정을 처리하는 것이 더 어렵다고 했을 때, 그것을 자신의 과제로 삼겠다는 말 같은 것. 그리고 내가 나와 30년을 같이 살았는데도 발견하지 못했던 내 모습을 그와 대화하면서 쌓아갈 때마다 조용히 견고해진다. 예를 들어 나는 덜 사랑함을 혹은 덜 사랑하는 것처럼 보임을 마치 악세사리처럼 차고 있었다는 것. 그냥 나는 별로 원하지도 않는데도 상대방에 의해 갈구 당하는 대상이 되고 싶었구나. 그래서 기를쓰고 밖에서는 사랑하지 않는 척 하려고 했구나. 뭐 이런 사실들.
우리가 무엇이 될지는 모르겠고 나서서 묻고 싶지도 않다. 주말에 저녁을 먹으며, 서로의 일기를 보고 싶다는 얘기를 했던 것을 생각해보다가 내 일기장을 읽어봤는데 온통 이런 얘기 뿐이라 그저 조용히 몇 조각을 덜어내 접시에 담듯 꺼내고 싶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