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는 일찍이 많은 예술작품에 등장했다. 고전시가에서 비는 슬픈 감정에 대한 객관적 상관물로 등장하기도 하며 예찬하는 자연물을 더욱 아름답게 부각시키는 장치로 등장하기도 했다. 낭만주의 음악가 쇼팽의 전주곡 15번에는 ‘빗방울’이라는 별칭이 붙기도 했다. 비의 음악적 측면과 비를 소재로 한 현대의 음악작품에 대해 논해보자. 빗방울이 부딪히는 소리는 약간의 규칙적인 박자를 갖는다. 이는 우타음(雨打音)이 음가를 가질 수 있음을 암시한다. 여지원은 우타음이 음높이만 갖춘다면 악음을 기능할 수 있을 것으로 보아 빗방울을 위한 악기를 만들었다.
우산북(雨傘鼓)은 얇고 탄력 있는 막으로 이뤄진 우산으로 우타음의 음량을 증폭시키고 특정한 음높이를 낼 수 있다. 아방가르드 작곡가 P의 [르네히트]는 비 오는 날 우산북을 이용해 연주하는 작품이다. [르네히트]는 f minor로서 (8,5,6,8,9,10,5)의 전반부와 긴 쉼표 구간의 중반부와 (1,1,1)로 마무리되는 후반부로 구성된다. 연주자는 테마의 구성음에 각각 대응되는 우산 6개를 (1,5,6,8,9,10) 취한다. 전반부에서 우선 8음을 지정하는 우산을 키고 지정된 음가만큼 기다린다. 지정된 음가를 다 채우면 8음을 지정하는 우산을 접고 5음을 지정하는 우산을 키고 음가를 지속한다. 마침내 전반부의 마지막 우산 5음을 지정하는 우산을 음가를 다 채운다. 이때 조심해야 할 것은 이후의 중반부는 쉼표로 구성됐고 음소거를 표현해야 한다.
아치형 구조물 혹은 지붕 등에 들어서서 우산북에 대한 우타음의 급소거를 느낀 뒤 전반부의 마지막 우산인 5음을 지정하는 우산을 접어야 한다. 이후 중반부의 긴 쉼표의 음가를 다 채우면 1음을 지정하는 우산을 키고 우천구로 다시 들어선다. 후반부는 구성음이 전부 1음이다. 같은 음 높이를 갖는 구성음간의 분절은 우산을 잠시 땅을 향해 기울이는 방식 혹은 우산을 잠깐 접었다 피는 방식 중 자유롭게 선택해도 좋다.
[르네히트] 연주는 산책로에서 완보하며 한다. 이때 도보형태에 따라 왕복보,직선보로 분류된다. 왕복보는 초반부 소거 구간을 향해 걷다가 중반부를 연주하고 다시 출발지점으로 향해 가는 형태이고 직선보는 중반부 연주 뒤에도 방향을 바꾸지 않고 앞으로 나아가는 형태이다. 연주자 H는 왕복보와 우산을 잠깐 접었다 피는 동일한 음고음 나누기 방식을 선호하였다. 그녀는 왕복보를 통하여 그려지는 곡선동선과 우산을 접었다 필때의 탄력에서 느껴지는 우아미를 강조했다. 반면 연주자 여생택은 직선보와 우산을 잠시 땅을 향해 기울이는 같은 음높이소리 분절 방식을 좋아했다. 그는 정처 없이 담담하게 걷는 나그네의 이미지가 이 작품의 이미지이고 직선보와 우산을 잠시 땅을 향해 기울이는 것은 그런 이미지를 부각하는 효과가 있다고 주장했다. 여생택은 또한 이 곡이 조성이 f minor임에 착안하여 토비새가 있는 숲에서 연주할 것을 제안한다. 토비새는 f minor의 장식음 같은 울음소리를 낸다. 토비새가 우연히 울어 연주에 장식음적 효과를 더해 줄 수 있다는 것이다.
[르네히트]는 보행하며 연주되는 작품이므로 중반부 소거구간까지의 거리,발걸음,동선 등을 치밀하게 계산하는 것을 요구한다. 동시에 우천의 강도변화,새소리 등 외부의 요소등도 자연스럽게 받아들일 것을 요구해 우연성과 필연성을 조화시킨 곡으로 평가받는다.
본문을 바탕으로 <보기>를 이해한 것으로 가장 적절한 것은?
<보기> 그 새는 f minor로만 울었다. 그 새는 주로 132으로 울었는데 가끔은 1#3b2으로 울어서 증6화음을 공부하고 있구나 생각하곤 했다. (중략) 자연은 위대한 예술이었지만 사실상 시각예술에 편향됐다. 찬란한 색채와 율동적인 문양 그리고 고운 선(線)의 미로 어우러져 있는 시각예술에 비해 청각예술은 다소 부족했다. 음악가인 나는 서운했다. 비 오는 날은 청각예술이 제 몫을 찾는 날이다. 나는 청각예술에 힘을 더 실어주고 싶었다. -여생택 산책수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