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르게 해석할 여지가 있어서다. 같은 음악을 듣고 서로 다르게 평가하고 서로 다른 이야기를 상상하는 재미이다. 물론 감상자마다 인식의 차이가 너무 심하면 말도 안통하고 실패한 작품이다. 하지만 적정하게 공통의 인식을 하는 가운데 미묘하게 서로 다른 이야기를 하게 만드는 작품은 재밌고 의미있다.
그 작품을 보고 듣고 난 뒤 계속 작품에 관해서 감성 썰 푸는 재미가 있는 작품. 그게 좋은 작품이다.
홍상수의 영화가 대표적이다. 피카소 그림도 그렇다.
쉬운듯 어려운듯 평범한 듯 희안하다. 그래서 말랑말랑해서 접근하고 싶어진다. 그렇다고 만만한 건 아니다.
말랑말랑해서 오 접근할만 하겠는데 싶은데 한편으론 아주 살짝 어렵고, 난해함과 단순함의 적절한 지점에서 잘 갖고 논다.
같은 영화를 두고 보는 사람마다 각자 이야기를 재밌게 풀 수 있다.
반면 해석의 여지가 너무 좁거나 넓으면 지루한 작품이다. 감상자마다 말하는 이야기가 너무너무 다르거나 너무너무 똑같은 정답만 있으면 안된다는 것이다.
현대 음악은 감상자마다 말할 수 있는 이야기가 너무 다양해서 문제이다. 백남준이 바이올린을 부수는 퍼포먼스를 두고는 너무 해석의 여지가 많지 않나? 분노를 표현했다? 전복을 표현했다? 그냥 심심해서 그렇다 등등
반면 고전 음악은 감상자마다 말할 수 있는 이야기가 하나 밖에 없어서 문제다. 전공자 중에서도 석박사 수준으로 오래 공부한 사람 아니면 감히 이론을 제기하기 힘들다. 그만큼 권위를 추구한 영역이기 때문이다.
신호음에 관한 반론 불가능한 나의 자연과학적 해석
여지원의 예술도 고전음악과 마찬가지로 해석의 여지가 너무 적어서 문제다. 총기번호와 멜로디가 연결되는 원리는 반론을 제기할 수가 없다. 그게 정답이기 때문이다. 정말 공식처럼 연결이 된다.
근데 그게 참 문제다. 자의성이 전혀 없는 영역이 문제다. 거기엔 어떤 해석이나 이야기를 개입할 여지가 없다. 마치 권위로 찍어누르는 학술적인 고전 음악처럼. 내가 클래식 음악을 잘못 공부했나보다.
클래식 음악의 아주 나쁜 점만 골라서 배웠다. 해석의 여지가 아주 단일한 권위있는 정답와 만 강요하는 듯한 그 나쁜 고전음악 전공자의 습관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