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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Jiwon Yeo Sep 09. 2023

예술가는 심미적인 추구해야하는가? 현실에 적극적으로 참

<예술가는 심미적인 추구해야하는가? 현실에 적극적으로 참여해야하는가?>


1. 서론:


몇 달전엔 선거가 있었다. 선거를 하는 과정에서 각 지지자는 상대 후보를 비방하는 가사를 담은 음악을 만들기도 하고, 자기 후보를 지지해달라는 선거 로고송을 만들기도 한다. 그런데 너무 경쟁이 치열해서일까? 비판을 넘어서 비난도 아닌 그저 수준 이하의 원색적인 모욕을 담은 개사와 편곡으로 이뤄진 음악이정치적 자유 내지 풍자라는 명목으로 유포되었다. 난 그 저질스러움에 질려버렸다.

그래서 편견이 생겼다. 사회 참여 예술을 한다는 사람들은 예술성이라는 개념이 없나 보다. 그저 음악을 자신의 정치적 목적을 달성하려는 도구로만 이용하는 거 아닌가? 심지어 그런 목적에 달성하기는커녕 목적을 달성하는 데도 실패하고 과정도 엉망인 이도저도 아닌 사람이 아닌가?

김수영 시인을 현실 참여시를 쓴 시인이라고 문학 시간에 배웠다. 마찬가지일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기대도 안 하고 그 분이 쓴 시를 읽었다. 하지만 내 편견과 다르게 김수영의 시는 아름다웠다. 교과서에서는 현실과의 관계를 통해서 독해하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제시하고 있었지만, 적어도 내 눈에는 아름다움이 먼저 눈에 띄었다. 그리고 작품이 아름다움이 충족되었기 때문에 그의 현실 참여적인 목소리가 더 설득력 있게 들렸다.


2. 본론.

인간은 사회적 존재다. 예술가도 예술가이기 이전에 인간이다. 자연스럽게 예술가도 사회적 존재일 수밖에 없다. 음악 외적인 것과는 전혀 관련이 없는, 순수하게 음악에만 몰두해 있는 예술가라는 상은 낭만주의적 독창미학, 천재미학이 만들어낸 신화일 뿐이다. 사회문화적 요소와 분리 가능한 순수한 음악 내적인 요소로만 이해할 수 있는 음악 작품도 없고 그런 음악가도 존재하지 않는다.



순수 예술의 아름다움을 추구한 듯한 모차르트의 작품도 그가 귀족의 후원 체계에서 벗어나 자유시장 경제 하의 악보 출판을 통해서 대중과 직접적으로 소통하기 원했던 투쟁적인 그런 삶과 밀접한 관련 속에서 이해한다.

연주와 감상 측면도 크게 다르지 않다. 오늘날 콘서트에 방문해서 객석에 앉아 조용히 관조하듯 무대 위 공연을 바라보는 문화도 순수한 예술적 아름다움을 느끼기 위한 거 아닌가 싶을 수 있다. 하지만 이조차도 중산층 시민이 자신의 정체성을 확인하고 탐미하는 장이라고 보는 시각도 있다. 엄격하게 효율적으로 분업화된 사회 모습을 악기별로 체계적으로 분류된 오케스트라를 보며 연상하고, 위계의 정점에서 관현악단을 이끄는 지휘자를 보며 관료제의 정점에서 조직을 경영하는 최고경영자의 모습을 투영한다.이로써 자신이 살고 있는 관료제와 시장경제의 분업 체계를 음악적으로 구현하는 모습을 보면서 자신의 정체성을 재확인하고 안심을 느끼는 것이다.


하지만 사실 명제로부터 당위 명제를 이끌 수 없다고 하지 않았던가? 현실과 예술이 밀접하게 관련되어 있다는 이유로 예술이 현실에 적극적으로 참여해야 한다는 논리는 도출될 수 없는 것이다.




현실 세계는 참 복잡하다. 복잡하기 때문에 음악과 역동적인 상호작용을 하고, 그 결과 단순한 법칙으로 환원되지 않는 개성 있는 음악 작품이 탄생하는 것이다. 또한 현실세계의 복잡함 때문에 행위자가 어떤 의도로 행위를 한들 그 의도대로 이루어지는 경우는 거의 없다. 이것은 음악이 사회에 대해서 다룰 때도 마찬가지다. 작곡가 의도대로 이루어지는 일은 거의 없다.하이든 교향곡이 무대에서 연주자에 의해 연주되고, 그것을 객석에서 감상하믐 공연용 음악으로 작곡했지만, 21세기의 대한민국의 현실적 활용은 공중화장실에서 배변을 보는 사람의 심리적 안정감을 형성하기 위해 사용된다. 한편으로는 실용적인 음악으로 작곡된 무용 반주 곡도 후엔 연주회용 레포토리로 편입돼서 여러 춤 모음곡이 무대에서 공연을 위해 연주된다.


음악은 사회 참여적인 목적으로 작곡을 한다고 해도, 유통되는 과정에서는 전혀 다르게 감상용으로 쓰일 수도 있는 것이고, 순수 음악적인 목적으로 쓰인다 하더라도 현실은 사회참여적으로 쓸 수 있는 것이다. 작곡가의 의도를 현실세계에 실현하기 힘들다.  이렇듯 뭔가 의도를 가지고 어떤 행동을 한다고 한들, 그 의도대로 이뤄지지 않으며 오히려 역효과로 의도와 정반대로 쓸 수도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정녕 내가 어떤 의도를 실현하고 싶다면, 직접적으로 즉 1차원적으로 그 의도가 내보이도록 하기보다는 고도의 예술성을 발휘해서 관객들이나 대중들이 이 음악을 일단 받아들일 수 있게 한 뒤 의도대로 사용되어지길 바라는 게 최선이다. 그리고 만약에 자기가 어떤 의도를 갖고 있는데 마침내 대중들이 의도대로 음악응 사용해준다면, 운이 좋게도 감사할 일이고, 그렇지 않는다고 해도 아쉬워 할 필요도 없다. 다만 작곡 및 음악적 사용을 바라는 바를 실현할 확률을 높이기 위해서 적어도 할 수 있는 일은 대중들이 자기의 음악을 흡수하도록 노력하는 일이고, 흡수될 가능성을 높이는 일이 곧 음악성 높은 작품을 생산하는 일이다. 관객은 음악성 높은 작품을 좋아하고 받아들이려고한다. 다시 말해 작곡가가 정말 어떤 현실에 적극적으로 참여하고자 한다면 노력해야할 일은 음악이 갖고 있는 고유한 특성을 발달시키는 데 집중하는 것이다. 그 음악적 특성이란 곧 ''아름다움'이다.


누군가는 쇤베르크의 예를 들어 반론할 수 있다. 쇤베르크는 사회적 부조리를 음악이 드러내지 않았냐고. 그것도 아름다움이 아니라 '추'를 이용해서. 그러나 그도 사실은 아름다움을 주로 드러내기 위한 조성 음악을 계속 작곡해 온 입장에서 마침내 그 미의 극한에 도달한 결과, 안티 테제적으로 추를 드러낸 것일 뿐이지, 처음부터 추만을 추구한 건 절대 아니다. 그리고 쇤베르크도 엄밀하게 따져서 사회를 반영한 것이지 이것을 표현한 것은 아니다. 사회 요소를 반영함으로써 작품의 그런 예술성을 잘 드러낼 수 있는 것이지, 그게 꼭 사회 참여를 한다는 것을 의미하진 않는다.


현실과 사회를 이루는 것도 결국은 개인이다. 개인이 모여서 사회가 되고 현실이 되는 것이다. 개인이 가진 고도의 감수성을 무시해선 안된다는 것이다.


III. 결론


요약하자면 현실과 예술은 분리 불가능하다. 그리고 심지어 어떤 아름다움은 현실 세계를 반영해서 이루어지는 것이기도 하다. 그러나 현실 반영과 현실 참여는 엄연히 다른 개념이다. 또한 현실 참여는 그 예술성이 어느 정도 갖추고 플러스 알파로서 이루어지는 것이지 그게 메인이 될 수는 없다. 그러므로 예술가는 마땅히 심미적인 아름다움을 추구해야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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