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히(?) 숨은 강자를 배려하다
크로스핏에 한창 빠져 매일 저녁 체육관에 출석 도장을 찍던 것이 몇 달째가 되었다. 퇴근 후 일상이 그야말로 운동으로 꽉 채워져, 소위 말하는 ‘워크 라이프 밸런스(work-life balance)’에서 ‘라이프’가 운동으로 치환되고 말았다. 운동에 잠식되어 사라진 ‘라이프’를 되찾고자, 소중한 저녁 시간을 확보하기 위해 아침잠을 포기하고 아침 운동에 나가보기로 했다.
아침 운동을 나가면서 눈에 들어오기 시작한 분이 있다. 꼬박꼬박 나가기 힘든 아침 수업을 절대 빼먹지 않고 출석하셔서, 내가 얼마를 거르고 출석하든 항상 자리를 지키고 계셔서다. 그는 바로 머리카락이 하얀 여자 회원분인 S쌤*이다. S쌤은 몸무게가 40kg 중반이나 되실까 싶었지만, 몸이 탄탄하고 꼿꼿하신 게 어떤 운동이든 오랫동안 해오신 것처럼 보였다. 크로스핏은 지난여름부터 시작하셨다고 했다.
* 이전 글에서도 언급하였듯이, 내가 다니는 크로스핏 체육관에서는 코치님이 회원에게, 혹은 회원들 상호 간에 “쌤”이라는 칭호로 부르는 문화가 있다. 나이나 경력과 관계없이 서로를 존중할 수 있게 해주는 좋은 문화라 생각한다.
아침 수업에 눈도장을 찍기 시작한 지 2주째. 운동인들 사이에서도 주초의 다짐과 주말을 앞둔 설렘 사이에서 ‘수요고개’라 불리며 운동을 빼먹기 쉬운 수요일이었다. 어디 보자, S쌤은 어김없이 출석을 하셨고. S쌤과 나를 포함해 여자 셋, 남자 둘이 출석했다. 다른 요일보다는 다소 적은 인원이었지만 덕분에 모두가 한눈에 들어오는 규모로 랙(rack) 앞에 옹기종기 모여 프론트 스쿼트(Front Squat)를 진행했다.
그렇게 근력을 기르기 위한 스트렝스(Strength) 세션을 마치고 수요일 와드(WOD, Workout Of the Day)를 진행할 시간이 되었다. 그날의 와드는 두 명이 팀으로 15분간 최대한 많은 라운드를 진행하는 방식으로 짜여져 있었다:
─ 40 Box Jump Over
두 발을 동시에 굴러 나무 박스 위로 점프하고 반대쪽으로 내려오기를 반복하는 “박스 점프 오버(Box Jump Over)”를 둘이 합쳐 40번,
─ 30 Double Dumbbell Thruster
양손에 덤벨을 들고 어깨에 걸친 채로 깊이 앉았다 양손을 펴며 일어서는 “더블 덤벨 쓰러스터(Double Dumbbell Thruster)”를 둘이 합쳐 30번,
─ 20 Synchronized Burpee
둘이 속도를 맞춰 “버피(Burpee)”를 20번 수행하면 한 라운드가 끝나는 것이고,
─ Team of 2, 15min AMRAP
15분 동안 최대한 많은 라운드를 진행하여(As Many Round As Possible) 몇 라운드를 진행했는지가 그 팀의 기록이 되는 것이다.
여자가 셋이라 둘 대신 셋이 한 팀을 이루었다. 나와 30대 초반의 A쌤이 ‘한 몸처럼’ 움직이고, S쌤이 다음 주자로 나서기로 했다.
우리 팀의 전략은 이러했다:
“박스 점프 오버” 40개 : 10개(나·A쌤)-10개(S쌤)-10개(나·A쌤)-10개(S쌤)
“더블 덤벨 쓰러스터” 30개 : 15개(나·A쌤)-15개(S쌤)
“버피” 20개 : [S쌤 쉬시는 차례 없이] 다 같이 20개 연속
다시 “박스 점프 오버” 40개 : [나, A쌤 쉬는 차례 없이] 10개(나·A쌤)-···
3, 2, 1!
와드가 시작되었음을 알리는 카운트다운이 끝나기 무섭게, 나는 A쌤과 속도를 맞춰 박스 위로 뛰어오르기를 반복했다. 아까 프론트 스쿼트를 하면서 보니 A쌤 허벅지가 여간 튼튼한 게 아니시던데. (물론 내 허벅지도 튼튼하고.) A쌤과 속도를 맞춰 “박스 점프 오버”를 하면서 눈에 들어오는 A쌤의 튼튼한 허벅지가 꽤나 든든하게 느껴졌다. 우리는 금방 10번을 채우고 숨이 살짝 찬 채로 내려와 S쌤이 시작하시는 모습을 바라보았다.
박스 점프는 두 발을 동시에 굴러 20인치(50.8센티미터) 높이의 박스로 뛰어오르는 동작이다 보니, 무릎에 무리가 가거나 종아리 앞부분이 갈리기 쉬워 초심자가 바로 도전하기는 어려운 동작이다.
오?
S쌤은 크로스핏 경력이 짧으신데도 성큼성큼 두려움 없이 박스 점프를 하셨다. 옆을 보니 남자 쌤들 팀보다 우리가 좀 더 빠른 것 같았다. 욕심이 나기 시작했다.
‘조금 욕심을 내면 우리 팀이 더 많은 라운드를 할 수 있겠는데? 그래도 S쌤께 무리가 될 수 있으니 너무 보채지 말고 배려해드리면서 안전하게 끝내보자.’
파이팅~!
내 귀에 들려온 우렁찬 목소리는 옆에 계신 A쌤의 응원이었다. 열정 가득한 A쌤의 눈빛을 보니 A쌤도 S쌤이 빠르게 차례를 마무리하시는 걸 보고, 나처럼 ‘우리 팀 한번 잘 해보자’는 욕심을 내고 계신 것 같았다. 그렇게 우리는 문제 없이 “박스 점프 오버”를 마치고 다음 동작으로 넘어갔다.
“더블 덤벨 쓰러스터”는 스쿼트와 상체 운동이 결합된 동작이라 그런지 열다섯 개를 쉬지 않고 한꺼번에 하려니 만만치 않았다. 각자 한 손에 25파운드(11.3킬로그램)와 20파운드(9.07킬로그램)의 덤벨을 쥔 나와 A쌤은 온갖 힘든 표정을 짓기 시작하면서도 ‘한 몸처럼’ 그리고 ‘전략대로’ 밀어붙여야 한다는 생각으로 동작을 끝냈다. 그러고는 숨을 몰아쉬며 차례를 넘겨 받은 S쌤을 바라봤다.
오우!
이게 웬걸. S쌤은 하나도 지치지 않고 우리보다 훨씬 빨리 동작을 진행하시는 것이었다……. 덕분에 쉬는 시간이 왜 이리 빠르게 지나가 버리는지*! 불과 첫 동작을 끝낼 때와는 사뭇 다른 마음으로 S쌤의 차례를 기다려 금방 셋이 동시에 하는 “버피”로 진입하게 되었다.
* 크로스핏 팀 와드에서는 파트너와 함께 좋은 기록을 내고 싶은 욕심에 파트너가 빨리 차례를 끝내기를 응원하기도 하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파트너의 차례는 곧 내가 휴식할 수 있는 시간이라 파트너가 너무 빨리 차례를 끝낼 경우 도리어 막막해지기도 한다. 열심히 하고 싶지만 또 격렬히 쉬고 싶은 인간의 모순적인 마음을 보여주는 게 크로스핏의 묘미랄까…….
방금 차례를 마친 S쌤이 바로 버피를 하시기는 힘들지 않을까 해서 눈치를 살폈는데, S쌤은 덤벨을 내려놓고 바로 바닥에 엎드려 버피를 시작하셨다.
「오, 바로 하자고 하시는 거군! 옆을 보아하니 남자쌤들은 덤벨 무게를 높게 정하셔서 그런지 아직 두 번째 동작 중이시네. 그렇다면 이참에 최대한 빨리 1라운드를 끝내볼까? 10개 정도 하니 금방 숨이 차오르기 시작했지만, 방금 동작을 끝내고 버피를 시작하신 S쌤도 별말이 없으신데 어쩔 수 없지.」
정신을 잡고 버피를 끝낸 뒤 A쌤과 바로 2라운드 “박스 점프 오버”를 시작했다.
시간은 빠르게 흘러 어느덧 남은 시간은 2분대가 되었고, 우리 팀은 3라운드째에서 S쌤이 막 “더블 덤벨 쓰러스터”를 끝낸 찰나였다. S쌤은 3라운드째인데도 여전히 속도가 빠르셨고, 덕분에 나와 A쌤은 또 한 번 얼마 쉬지 못한 채로(물론 S쌤은 아예 쉬지 못하신 채로) 버피에 진입해야 할 처지가 되었다.
허헉, 조금만 쉬어요…….
이번에 귀에 들려온 다급한 목소리는 A쌤의 SOS였다. 지친 기색 없이 덤벨을 바닥에 내려놓고 바로 버피를 시작하려 몸을 숙이시던 S쌤은 한참 어린 나와 A쌤의 시뻘개진 얼굴을 보셨다. 그러고는 자애롭게도 잠깐 몸을 펴시어 우리가 숨을 고를 시간을 하사해주셨고, 이윽고 버피를 시작한 우리는 중간에 S쌤께 한 차례 더 SOS를 친 뒤에야 3라운드를 끝낼 수 있었다.
[00:00]-!
15분이 지났고 우리 팀은 3R+19, 다른 팀은 3R-12의 기록으로 와드를 마무리했다. 4라운드째에서 “박스 점프 오버”를 하다가 끝난, 꽤나 괜찮은 기록이었다. 튼튼한 허벅지의 소유자인 나와 A쌤은 튼튼한 허벅지가 무색하게 박스 근처에 바닥 대자로 누워 헉헉, 숨을 거칠게 들이쉬었다. S쌤은 마무리 스트레칭을 마치고 외투를 걸친 뒤 유유히 체육관 밖으로 나가셨다.
그날 이후 나는 아침 운동에서 S쌤과 함께 할 때면 내가 S쌤을 ‘배려해드릴’ 처지가 아님을 자각하고 그저 ‘내 몫을 다하는’ 데만 집중할 뿐이다. S쌤이 이미 환갑을 넘으셨다는 것과, 월요일부터 금요일까지 매일 아침 한 시간 크로스핏 수업을 마치고는 곧장 헬스장으로 가 한 시간 더 운동을 하신다는 것은 그다음 주에야 알게 된 사실이다.
뒤늦게 나지막이 말해본다.
S쌤, 배려해드려서(?) 죄송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