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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지원 Jiwon Kim Jan 12. 2024

사랑은 실전?

나는 어쩌다 실전에 뛰어들게 되었나

 스물두 살 때 에리히 프롬이라는 사회심리학자의 책 <소유냐 존재냐>를 읽고 감명을 받아, 그의 저작을 한 권씩 읽어나가기 시작했다. 그중 읽기에 앞서 가장 큰 기대를 했던 건 단연 <사랑의 기술>. 제목부터 구미가 당기는 책이었다.


 1900년생인 작가가 1956년에 저술한 책이라니, 저자의 명성과 저술된 시기로 따지자면 가히 사랑계(♡界)의 ‘고전’이라고도 불릴 만한 책이다. 요 근래 나오는 연애 칼럼이나 자기계발서와는 다른 이야기를 하고 있을까? 이 책을 읽으면 ‘사랑의 기술’을 이해하고 실생활에 바로 적용해볼 수 있게 될까? 아무리 책을 좋아하기로서니와 좀처럼 느끼기 힘든, 문자 그대로의 ‘두근거림’을 느끼며 책장을 열었다.




 내게 스물두 살은 사랑을 실존적으로 이해하기에는 어려운 나이였지만, 오히려 지금보다 뇌가 말랑말랑해 어려운 책을 곧잘 읽어나가던 때였으므로 일단 머리로 <사랑의 기술>을 다 읽기는 하였다. 그런데 사실, 불과 몇 페이지 넘기지 않고 나온 문장들이 맥을 턱 풀리게 했기 때문에 처음의 두근거림은 얼마 지나지 않아 싹 가셨고 나는 여느 책을 읽듯 심드렁한 얼굴로 책장을 넘겼을 뿐이었다. 어떤 대목에서였냐고? 바로 이 대목에서다.


 사랑에 대해서 배울 필요가 없다는 태도의 배경이 되는 두 번째 전제는 사랑의 문제는 ‘능력’의 문제가 아니라 ‘대상’의 문제라는 가정이다. ‘사랑한다’는 것은 쉬운 문제고, 사랑할 또는 사랑 받을 올바른 대상을 발견하기가 어려울 뿐이라고 사람들은 생각한다. … 이와 같이 자기 자신의 교환 가치의 한계를 고려하면서 서로 시장에서 살 수 있는 최상의 대상을 찾아냈다고 느낄 때에만 두 사람은 사랑에 빠질 수 있다.


 저자는 ‘사랑에 대해 배울 필요가 없다’는 태도는 ‘오류’이며, 사랑을 ‘하게 되거나’ 사랑에 ‘빠지는’ 순간적인 합일의 경험을 넘어 사랑에 ‘머무르기’ 위해서는 사랑을 기술로 여겨야 한다고 말한다. 나아가 이를 위해서는 자기 훈련, 정신 집중, 인내, 관심, 삶 전체를 사랑과 연관시키기 – 라는 노력이 수반되어야 한다고 설명한다.


 위와 같이 이어지는 내용은 차치하고서라도, 스물둘의 나는 프롬이 ‘사랑의 문제를 대상의 문제로 보는 것이 왜 오류로 귀결되는지’에 대해 별다른 설명을 하지 않고 넘어가는 것이 이해되지 않았다.


 그는 서구에서 최근 몇 세기 들어 결혼이 더 이상 계약이 아닌 ‘낭만적 사랑’의 결실로 여겨지기 시작하면서 대상을 선택할 ‘자유’의 개념이 부상했기 때문에, 그리고 오늘날 우리 사회가 인간을 인격이 아닌 시장에서의 교환가치로 평가하는 소비주의 사회이기 때문에 그러한 '오류'가 나타났다고 설명할 뿐*이었다. 그렇다면 사랑의 문제에서 '대상의 문제'가 중요한 것이 아닌지, '대상의 문제'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하는지에 대해서는 별다른 설명을 곁들이지 않았던 것이다. 누구에게나 좋은 상대를 고르는 일이 초미의 관심사인데도 말이다!


* 프롬의 시대와 나의 시대가 큰 궤를 같이 하고 있기 때문인지 그의 지적은 오늘날까지도 유효하고 적실성이 있다. 실제로 청년세대의 연애를 연구하는 박소정은 이렇게 쓰고 있다:

“신자유주의 한국 사회의 경제 구조는 상충하는 가치 사이에서 연애를 올려놓고 연애 주체들에게 끊임없는 조율과 타협을 요구한다. 인격적 관계에서 요구되는 덕목과 비인격적 관계에서 요구되는 덕목을 하나의 정체성 안에서 적절히 발휘하길 바란다. 마음의 진정성과 시장주의적 사고방식 사이에서 현명한 선택을 내려야 한다.”




 바로 내가 꼭 프롬의 말대로 사랑을 대상의 문제라 가정하는 사람 중 하나였던 모양이다. 내게 프롬은 <어떻게 하면 사랑이라는 감정을 나누기에 좋은 상대를 만날 수 있을지> 처방을 내려주는 대신에, <이미 어떤 사랑의 대상이 있음을 상정하고> 그 사람과 함께 사랑의 기술을 연마하는 방법에 대해 논하고 있는 것으로 이해되었다. 그리하여 나는 프롬의 이야기를 귓등으로 흘린 채 사랑의 실전에 나서기에 이른다…….


이 책의 많은 독자들[은] ‘어떻게 기술을 스스로 활용할 것인가’에 대해 처방을 내려주기를 기대하고 있[지만] 사랑한다는 것은 누구든지 자기 혼자서 몸소 겪어야 하는 개인의 경험이다.

 결국 사랑의 기술을 활용하는 것은 각자의 몫에 달려 있다고 말하는 이 대목만 받아들이고서는 말이다.


에잇, 몰라. 프롬도 결국 사랑의 경험은 자기 스스로 겪어야 하는 개인적 경험이라고 하잖아? 이렇게 골방에서 이론만 탐구할 것이 아니라 실전에 나서야겠는걸!


 글쎄, 그로부터 7년간 실전에 나서 사랑에 빠지기도, 사랑에 머무르기도 하며 쓴맛과 단맛을 두루 경험하고 돌아와 다시금 알쏭달쏭 콩닥콩닥한 마음으로 <사랑의 기술>을 폈다.




 그러나 7년 전에 품은 의문은 책을 두 번째 읽는 데도 도무지 풀리지 않았고……,

 「프롬 선생님, 어째서 대상을 선택하는 게 중요한 문제가 아니란 말입니까. 혹시 말이죠, 선생님도 시쳇말로 ‘그 놈이 그 놈이다’라고 생각하시는 건가요. 그래서 ‘어떤 놈’하고 사랑을 할 건지보다, 사랑의 기술을 실천하고 숙달해나가는 게 더 중요하다고 보시는 건가요. 사랑의 기술은 기술대로 갈고 닦을 테니, 사랑의 대상을 선택하는 기준에 대한 고견도 알려주시지 그랬나요. 낭만적 사랑의 신화도, 인간 소외를 불러오는 소비주의도 떨쳐내기란 너무나 힘든 것이어서, 마냥 고고하게 마음의 진정성과 이런저런 조건들로부터 자유로운 선택을 할 수는 없는데 말이죠.」


 이번에도 프롬을 붙들고 숨 쉴 틈 없이 따지면서 무작정 ‘처방’을 요구하고 싶어지는 나였다. 그런데, 이번에 새로 알게 된 것이 있었으니! 어쩌다 넘겨본 책 부록에서 이 사실을 접하고는 그 길로 프롬을 향한 답답함 호소하기를 곧바로 그만 두게 되었다.

 그건 바로, 프롬 역시도 53세에 세 번째 결혼을 하고 57세에 <사랑의 기술>을 펴내기까지 수많은 경험을 거쳐왔다는 사실이다!


 에리히 프롬의 첫 부인인 정신과 의사 프리다 프롬 - 라이히만, 연인이었던 정신분석가 카렌 호니, 두 번째 부인인 사진작가인 헤니 구어란트, 세 번째 부인이자 죽을 때까지 27년을 함께 한 애니스 프리먼과 프롬. (사진 출처 : 에리히 프롬, <사랑의 기술>, 영풍문고)





실전에 진심이었던 프롬의 사랑사(♡史)를 알고 나자 설교자 같던 프롬이 N바퀴 띠동갑*의 인생 선배로 홀연 가깝게 다가왔고 켜켜이 쌓인 7년치 경험을 그의 이론에 대입하며 촘촘히 책을 읽는 중이다.


* 에리히 프롬 선배님은 1900년생으로 쥐띠다. 나도 쥐띠고.




 문제를 사랑으로 해결하기로 결심한 자는 실망을 견디고 퇴보를 무릅쓰고 끈기를 보일 용기가 필요하다.


 프롬 선배님의 말이다. 그렇지! 옆구리에는 <사랑의 기술>을 끼운 채, 마음에는 물음표를 품은 채, 내 기꺼이 실전의 전장으로 돌아가리라. 그리하여, 전장에서 이 글들을 엮어 그대들에게 보내리라. (독자님들, 잘 부탁드립니다!)



필라델피아의 love park에서. 전장에 뛰어든 지 10년쯤 된 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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