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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지원 Jiwon Kim Jan 12. 2024

풀벌레 소리와 함께, 첫 연애의 마침표를 찍다

……. ……. …….

 스무 살 생일을 나흘 앞둔 날, 첫 남자친구에게 이별을 고했다. 우리는 고등학교 2학년 때부터 2년 반을 예쁘게 만난 커플이었다.


 연애를 시작하니 공부를 곧잘 하는 둘 중에 어느 한 명은 꼭 성적이 떨어질 거라는, 얼핏 들으면 저주 같은(?) 선생님들의 걱정이 쏟아졌다. 열화와 같은 반대에도 불구하고- 아니 오히려 반대를 장작 삼아 풋풋한 첫사랑은 활활 타올랐고, 우리는 2학년 크리스마스에도 자습실을 지키며 공부하는 독기를 보였더랬다. 그렇게 열아홉 살의 12월과 이듬해 1월, 우리는 나란히 같은 목표 대학의 합격증을 받아들었다.


 연애의 탄탄대로가 펼쳐진 듯했던 스무 살에 헤어짐을 결심하게 된 데는 이렇다 할 이유는 없었다. 우리의 연애는 반대했으나 우리 각자에 대한 애정만큼은 가득했던 방해꾼들을 뒤로하고 공통의 목표를 이루어 버린 다음이어서일까. 생각보다 슴슴하게 연애를 하고 있던 첫 여름방학의 어느 날, 문득 고등학교 1학년 때 사회탐구 선생님이 하신 말씀이 떠올랐다.


 “얘들아. 너네 지금이든 스무 살에든 남자친구 사귀지? 스물하나부터 스물셋쯤까지 남자친구 군대 보내놓고 고무신 신고, 그렇게 몇 년쯤 관성처럼 ‘1년 추가요’, ‘2년 추가요’ 하면서 추가로다가 쭉쭉 사귀다 보면 금방 20대 중후반이야. 나중에 선생님 말 생각날 거다?”


 옛 여자친구가 생각나서인지, 모종의 이유로 인한 회한 때문인지 입가에 쓸쓸한 미소를 띤 선생님 표정까지 함께 말이다.


 과연 그랬다.


 20대 중후반까지 세계를 누비며 이런저런 경험을 하고 싶었던(!) 내게 미래 계획에 남자친구를 넣는다는 건 내 활동반경에 대한 제약처럼 느껴졌다. 또 그때까지만 해도 20대 중후반까지 결혼을 하고 싶기도 했던(!!) 내게 ‘그저 관성처럼’ 연애를 이어가다 ‘그 나이’가 되는 건 무척이나 아쉽게 느껴졌다*. 생각은 꼬리에 꼬리를 물었고, 도무지 멈출 수가 없었다. 문득, 계산이라곤 모르던 때 시작한 풋풋한 사랑 앞에 온갖 셈법을 들이밀기 시작한 내 모습이 생경하게 느껴졌다. 그렇게, 이별을 결심했던 것 같다.


 *바로 ‘그 나이’가 된 내가 말합니다: “벌써 결혼이라니, 어림도 없지!"


 한두 달을 어영부영 미루고 있다가 하필 다른 때도 아니고 그날 헤어지자는 말을 꺼낸 건, 순전히 나흘 뒤에 생일을 앞두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성인이 되고 처음 맞는 생일이라 큰 선물을 준비한 건 아닐까. 특별히 귀띔해 둔 선물은 없는데. 헤어지지 않고 계속 사귄다면 선물을 거절할 만한 이유도 없고, 얼마 있다 헤어지자는 말을 할 텐데 홀랑 선물을 받자니 부담스럽고. 생일이 4일 앞으로 다가오자 더 이상 미루면 안 되겠다는 생각에 큰맘을 먹고 늘 만나던 기숙사 대강당 피아노실 앞 벤치로 향했다.


 우리…… 그만 만나자.


 진부하디 진부한 이별의 말 뒤에 어떤 말을 했는지는 잘 기억이 나지 않는다. 미리 준비했던 나름의 변명들을 하얗게 잊어버려 떠오르는 대로 말을 했고, 예상치 못한 이별에 미처 아무런 준비도 할 수 없었던 남자친구는 횡설수설 늘어놓는 그 말들 속에서도 완고함을 읽어냈던 것 같다.


 먼저 이별을 고한 쪽은 나였음에도, 믿기지 않게도 정말 ‘주마등처럼’ 스쳐 가는 2년 반의 추억들에 눈물을 흘릴 수밖에 없었다. 내 얼굴은 금세 눈물범벅이 되어 더 이상 말을 잇기가 힘든 지경이 되었다. 한순간에 남자친구에서 ‘전’ 남자친구가 되어버린 그는 맨손으로 눈물을 슥슥 닦아주다가 곧바로 흘러내리는 다음 눈물, 그다음 눈물, 그 다음다음 눈물……에 눈물 닦아주기는 포기하고 “잠깐만 있어봐”라는 말과 함께 뒤를 돌았다.


 왜 잠깐만 있어 보라는 건지 궁금해할 새도 없이 그저 울기 바빴던 나를 벤치에 남겨둔 남자친구는 금방 벤치로 돌아왔다. 한 손에는 커다란 상자를 들고서 말이다. 포장지를 두르지도 않아 뭔지 훤히 보이는 그 상자는 내가 몇 달 전 여름 지나가듯 말했던, 스무 살에겐 꽤나 비싼 십만 원대 태블릿이 담긴 상자였다. 그때부터도 혼자 글을 끄적이곤 하던 나는 그 무렵 좋아하는 웹툰 작가들이 작업을 할 때 태블릿을 PC에 연결해서 쓴다는 걸 알게 되었고 마침 공학도였던 남자친구에게 태블릿에 대해 질문을 한 적이 있었던 것이다. 그걸 흘려버리지 않고 기억해 태블릿을 장만해 뒀구나. 꼭 나흘 뒤인 내 생일에 주려고 했었구나.


 생일선물이야. 어차피 환불 기간도 지났어.
네가 안 쓰면 나도 안 쓰고 버릴 거야.


 선물을 보니 더욱 북받쳐 오르는 눈물을 주체하지 못하던 내 마음을 읽었는지 남자친구는 품 안으로 상자를 떠밀었다. 그새 팅팅 부은 채로 선물을 안아 든 나는 잠긴 목소리로 “고마워……” 세 글자를 내뱉었고, 그는 대답 대신 “가자.”라는 말과 함께 늘 바래다주던 내 기숙사 건물 방향으로 먼저 발걸음을 옮겼다.


 나란히 속도를 맞추어 걷던 평소와 달리 남자친구가 나보다 살짝 더 앞에서, 살짝 더 빨리 발걸음을 옮기느라 그의 앞모습은 볼 수가 없었다. 그렇지만 저녁 어스름 속에서도 조금씩 들썩이는 어깨는 두 눈에 환하게 들어왔고, 마침 중간고사가 막 끝난 대학생들의 기쁨에 찬 소란 속에서도 흐흡, 하고 숨을 고르는 소리도 두 귀로 선명하게 들려왔다.


 외진 곳에 있던 내 기숙사 건물 앞에 당도하자 들뜬 소음은 사라지고 풀벌레 울음소리*만 들려왔다.


……, ……, ……


* 벌레 소리는 / 말줄임표 / ……

   장독대 옆에서도 / 풀숲에서도 / ……

   밤새도록 / 숨어서 / ……

   재잘재잘 / 쫑알쫑알 / …… (안도현, 「풀벌레 소리」)


 내내 들썩이던 그의 어깨를, 애써 고르는 중이던 그의 숨을 외면하듯 나는 고개를 들지 않고 등을 돌려 현관으로 들어섰다. 천천히 복도를 걷다가, 바깥에서 들여다보이지 않는 곳부터 커다란 상자를 들고 뛰다가, 계단에 이르러 내 방이 있는 4층까지 오르고…… 오르고…… 올라…… 창문에서 남자친구의 뒷모습을 한참 동안 바라보았다.


 ……. ……. …….


 스무 살 생일 나흘 전. 풀벌레 것인지 내 것인지 모를 울음소리 그리고 눈물범벅이 된 생일선물과 함께, 그렇게 내 첫 연애에 마침표가 찍혔다.



2015년 3월의 학교 기숙사 풍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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