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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지원 Jiwon Kim Jan 31. 2024

허탕은 아닐지도

에세이 두 편을 쓰게 해준 엑스에게

 스물두 살, 미팅에서 만난 그에게서는 첫 번째 애프터* 때부터 신호가 느껴졌다. 만나기 하루 전, 나는 문득 페이스북에서 그의 이름을 검색해 보았다. 흔한 이름이긴 했지만 어렵지 않게 찾을 수 있었다. 스크롤을 조금 내리자마자 곧장 내 눈에 들어온 건 전 여자친구의 흔적이었다.

* 미팅에서 만난 사람들끼리 개인적으로 만남을 이어가는 것.


 많이 좋아한 것 같았다. 힙합 동아리 활동을 하던 그는 여자친구를 위해 랩을 하고 멜로디를 만들어 영상을 올려두었다. 태그된 전 여자친구 이름을 클릭해 보니 이게 웬걸. 서로 볼 뽀뽀를 하고 있는 사진이 타임라인 커버 사진으로 대문짝만하게 걸려 있었다.


 이게 뭐람. 설마 여자친구가 있는데 미팅엘 나오고 애프터까지 하는 건가? 이미 헤어진 상태라 해도 굳이 볼 필요가 없는 장면을 봐버렸잖아. 잠깐 싱숭생숭한 마음이 들었지만 이내 잠잠해졌다. 글쎄, 내일 만나보면 알겠지.


 애프터 당일. 꽤 신난 듯해 보이는 그와 달리 나는 찜찜함에 겉으로만 웃으며 대화를 이어갔다. 얼마간의 시간이 흘러 좀처럼 떼지지 않던 입을 열었고, 공은 내 손을 떠나 그의 몫으로 넘어갔다.


 [핑] “오빠, 사실 페이스북을 봤는데 말야…… 지금 연애 중이야?”

 [퐁] 그는 잠시 당황한 듯했지만 연애 중은 아니라고 손사래를 쳤다. 자기는 연애가 끝나고 페이스북 타임라인에서 여자친구 흔적을 지운다고 지웠는데 몇 개가 남은 것 같고, 전 여자친구가 페이스북 정리를 하지 않은 이유는 자기도 모르겠다고, 연락을 해서 내려달라 해볼까 싶기도 하단다.


 어쨌거나 연애 중은 아니라던 그의 말에 안심했고 우리는 몇 번의 만남을 거쳐 연애 시작을 앞두고 있었다. 나는 볼 뽀뽀를 하는 사진까지 본 전 여자친구의 존재가 못내 마음에 걸렸다. 그가 스물한 살 때부터 꼬박 만 3년을 만난 첫 여자친구인 데다가, 헤어진 지 고작 3개월이 지나 나를 처음 만났기 때문이었다. 애프터 때처럼 나는 또 한 번 그에게 공을 넘겼다.


 [핑] “오빠, 전 여자친구가 계속 생각나지 않겠어?”

 [퐁] 그는 지난번 공을 넘겨받았을 때부터 준비해 둔 질문이었다는 듯 전혀 신경을 쓰지 않아도 된다고 말했다. “최선을 다해봐서, 미련이 없어.”


 그는 술술 이야기를 이어갔다. 서울에서 복무하는 군인 신분이던 그 해 초, 그는 여자친구와 함께 계획해둔 여행을 떠날 생각에 들뜬 마음으로 말년 휴가를 나왔다. 그런데 당시 여자친구가 대뜸 꺼낸 말은 가히 충격적이었다고. “다름이 아니라……”라는 말과 함께 시작된 이야기는 정말 ‘다름이 아니라’ 아르바이트를 같이 하던 남자와 사귀고 있으니 여행을 못 가겠다는 거였다.


 청천벽력 같던 그 소식을 도저히 믿을 수가 없던 그였지만, 아직 여자친구를 많이 사랑하고 그대로 놔줄 수 없다는 생각이 들어 그 순간 바로 그녀를 붙잡았다고.


그럼 그 사람이랑 나, 둘을 동시에 만나보고 결정해. 내가 잘해줄게.


 그 뒤로 이야기가 어떻게 흘러갔는지 – 그가 그녀의 새로운 남자친구와 겨뤄볼 기회도 얻지 못했을지, 아니면 일단 겨뤄보았는데(?) 처참히 패한 것인지 – 는 모르겠지만 어찌 되었건 그는 여자친구를 떠나보낼 수밖에 없었다.


 솔직히 그런 제안을 한 게 이해가 되지는 않았지만, 사랑했기에 자존심을 내려놓고 그런 제안을 했다는 것 자체가 대단하다는 생각이 들었고, 그쯤 했는데도 거절을 당한 이상 재결합을 할 일은 없겠거니 싶었다. 차분하게 이어진 그의 말에 나는 고개를 끄덕였고 그렇게 우리는 연애를 시작하게 됐다.




 그로부터 몇 개월이 지나 나는 유럽 배낭여행을 떠났다. 연락 빈도가 너무 낮아졌다고 불평하던 친구의 남자친구와 달리 ‘나 신경 쓰지 말고 편하게 여행하고, 생각날 때만 연락줘’라고 하던 그의 태도에 내심 흐뭇했다. 첫 여행지인 파리 시내에서 사흘을 보내고, 다음 날은 파리 근교에 위치한 베르사유 궁전으로 향했다. 그런데, 3G도 잘 터지지 않는 궁전에서 의미심장한 메시지가 왔다.


 [지원아]

 세 글자의 메시지에 심상치 않음을 느껴, 궁전 정원에 나가 어렵사리 신호를 잡았다.


2017년 8월 베르사유 궁전. 내가 2G와 3G 사이를 오가며 이별 통보를 들은 곳이다. 이 사진을 찍고 정원을 배회하며 통화를 했더랬다.


 수화기 너머로 들려온 그의 첫 마디는: “…… 우리 헤어지자.”


 사귄 지 이 주 만에 그의 어머님이며 할머님이며 동생에게까지 모두 인사를 드렸던 사이인데* 이렇게 쉽게? 연락을 보채지 않는 모습에 고마워했는데, 알고 보니 마음이 떠서 그랬던 거였나. 놀란 마음을 다잡고 공을 넘겼다.

* 그렇다. “저 키 안 봐요”의 그다.


 [핑] “왜인지 물어봐도 돼?”

 [퐁] 그게 사실, 첫 여자친구가 생각나서. 못 잊겠어서.


 그에게서 돌려받은 공은 뒤통수를 맞은 느낌이 더해져서인지 헤어지자는 말보다 더 놀랍게 다가왔다. 하지만 나도 그 해 초 이별 통보를 들었을 그와 똑같이, 그대로 그를 놔줄 수 없다는 생각이 들어 그 순간 바로 그를 붙잡아보았다.


 [핑] 괜찮아, 원래 첫 이별이 그렇더라. 일상을 살아가다 보면 그 사람이랑 함께했던 추억이 떠오르고 그런 거잖아. 이게 그 사람을 못 잊고 그리워하는 마음 때문인지 아니면 단순히 일상에 스민 기억이 날 뿐인 건지가, 원래 첫 이별 때는 분간이 잘 안 되더라고. 오빠, 지금 당장은 힘들더라도, 전 여자친구가 계속 생각나더라도 극복할 수 있게 내가 옆에 함께 있어주면 안 될까?

 [퐁] …… 그래, 그러자. 그럼 계속 만나자.


 맥이 빠질 만큼 쉽게 번복되는 그의 이별 통보였다. 그를 만나기 전 두 번의 이별을 해본, 첫 번째 이별과 그다음의 이별들은 사뭇 다르다는 걸 알게 된 이별 선배(나, 22세)의 말이 이별 초짜에게 너무나도 설득력 있게 다가갔던 걸까? 그도 나와 함께라면 다른 사람을 사랑할 수 있고, 다른 사람과 새로운 추억을 만들어갈 수도 있다는 걸 느끼면서 첫 이별의 후유증을 극복해 나갈 수 있지 않을까? 약간의 맥 빠짐도 잠시, 뿌듯함과 더불어 일종의 사명감까지 느낀 나였다.


 하지만 한 가지 찜찜함이 남아 마지막으로 공을 던져보기로 했다.


 [핑] “그런데 오빠, 혹시 나랑 헤어지면 그 분한테 연락해 보려고 했던 거야?”

 [퐁] “…… 응, 맞아.”

 [핑] “그 분 아직 그 남자랑 연애 중인 건 아냐?”

 [퐁] “그건 연락을 안 해봐서 모르겠어. 그래도…….”


 파스스…… 그가 받아친 공에 내 마음은 순식간에 식고 말았다. 전 여자친구를 혼자서 그리워하는 게 아니라 연락까지 해보려 했었다는 말에, 미련이 남지 않았다는 말이 무색하게 내게 뒤통수를 쳐버린 것도 괘씸했고, 그런 마음까지 먹었으면서도 내 말에 금세 이별 통보를 번복한 갈대 같은 태도에 이건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그에게 공 넘기기를 포기했고 두 손 두 발을 다 들고 말았다.


 “그냥 오빠 말대로, 우리 헤어지자.”


 에잇, 대단하다는 말 다 취소. 이번 연애는 허탕이다*.

* 허탕은 “어떤 일을 시도하였다가 아무 소득이 없이 일을 끝냄”이라는 뜻을 갖고 있다고 하는데, 그는 내게 에세이 두 편의 소재는 물론이고 허탕 신호를 얼마간은 감지할 능력을 안겨주었으니, 이게 다 소득이라면 소득일지도. 그와의 만남이 마냥 허탕은 아닐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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