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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지원 Jiwon Kim Jan 26. 2024

“저 키 안 봐요”

라는 말을 입증하겠습니다, 이 글로써!

 우리 아빠는 키가 187cm다. 초등학생 때는 아빠 키에 너무 익숙했던 나머지, ‘나중에 내가 아빠 사위를 데려왔는데, 할아버지쯤 되어 키가 살짝 줄어든 아빠보다 키가 더 작으면 뭔가 이상할 것 같은데?’ 싶어 ‘적어도 아빠보다는 더 큰 남자를 만나야지’라고 생각했던 기억이 난다.


 그리고 머지않아 나는 ‘아빠보다 더 큰’ 남자를 만나는 건 매우 어려운 일임을 깨달았고, 이왕 키를 덜 보는 김에(?) 극단적이게도 키를 아예 보지 않게 되었다. 정말이다!


 나는 키가 170cm 언저리다.

 가까운 사이에서든 가벼운 술자리에서든 ‘이상형’을 묻는 말에는 늘 이렇게 대답하곤 했다.


 키요? 저 키는 안 보는데.


 그 대답에 돌아오는 건 십중팔구 “에이, 말로만 키 안 본다고 하고 키 보는 여자들 많은데. 솔직하게 말해봐요. 본인 키도 있는데.”라는 말과 함께 찌릿찌릿 의심스러운 눈초리. 심지어는 ‘남자 키에 대해 관대한 이미지를 구축하기 위한 수’가 아닌가 하는 의심도 받아봤는데, 그런 이미지를 쌓아 뭐하나! 내게 떡고물이 떨어지는 것도 아닌데 말이다.






 억울하게도 의심만 쌓여가던 차에 드디어, “저 키 안 봐요”라는 말을 귀납적으로 뒷받침할 아주 강력한 근거가 생겼다. 게다가 처음 듣는 사람이라면 두 눈을 휘둥그레 뜰만한 이야기까지 하나 얹어서.


 바로…… 미팅에 나가서 나보다 1~2cm가 작은 남자를 만난 거였다. 그가 마음에 들었던 나는 자기 키가 괜찮냐는 그의 질문에 늘 그래왔듯 “저 키 안 봐요”라는 대답으로 간질간질한 분위기를 이어갔다. 몇 번의 애프터 끝에 순조롭게 연애가 시작되려던 찰나:


 “지원아, 나 고백할 게 있어.”

 “(사랑 고백이 아니면) 무슨 고백인데?”

 “사실 나 이번 달 말에 수술……을 하나 할까 해.”


 갑자기 웬 수술이람. 내가 한순간에 불치병에 걸렸다고 고백하는 남자 주인공을 만날지 고민하는 드라마 여주인공이라도 되어버린 것인가. 그 고백에 갈대처럼 마음이 변해 남자를 뻥 차버리는 악녀인지 판별하기 위한 시험에라도 든 것인가. 생각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있는데, 얼마간의 정적을 깨고 들려온 그의 말은 전혀 상상치 못한 내용이었다.



 나, 키수술 하려고.



 키수술이라니, 그의 입에서 처음 들어본 단어였지만 구태여 “키수술?”하고 되묻지 않고 차분한 척 다음 말을 기다렸다. 그가 한다는 일리자로프 수술은 말 그대로 ‘키를 늘리는 수술’인데, 수술 후 병원에서 1주일, 집에서 5개월을 누워있어야 한다고 했다. 종아리뼈를 부러뜨린 다음, 그 부분을 관통하는 새장 모양의 철제 원통을 달고 하루에 네 번, 사방에서 나사를 돌려 뼈를 1mm씩 늘려주는 것이다. 뼈 외에 힘줄과 근육 따위는 뼈가 자라는 속도에 맞추어 발목을 접었다 펴는 소위 ‘까치발 운동’을 해서 늘려준다고 했다.


 거리낄 것이 없었던 20대 초반의 나는 오빠가 하겠다는 수술이 그보다 더한 무언가(?)가 아님에 감사하며 순항 중이던 썸의 닻을 다시 한번 힘차게 올렸고 우리는 키수술이라는 데이트 일정상의 걸림돌에도 불구하고 연애를 시작했다.



 그와의 연애는 어떻게 되었냐고?

 그의 집까지 찾아가는 병문안만이 유일하게 그를 만날 방도라 사귄 지 이 주 만에 그의 어머님이며 할머님이며 동생에게까지 모두 인사를 드릴 수밖에 없었지만(!), 하는 사람도 받는 사람도 멋쩍었던 그 인사들이 무색하게도 연애는 한 달 만에 끝이 났다.



 그놈의 키수술 때문이냐고?

 아니다, 키수술이라는 녀석에게는 잘못이 없었다. 나와의 연애가 두 번째 연애라던, 첫 연애는 꽤나 길었지만 미련이 전혀 없다고 하던 그가 ‘첫 여자친구가 생각난다’며 이별을 고했기 때문이었다.

 당시 친구들과 유럽 배낭여행 중이던 나는 첫 여행지인 파리의 근교에 위치한 베르사유 궁전에서 그 말을 들었다. 3G도 잘 터지지 않는 궁전 정원에서 어렵사리 신호를 잡아 보이스톡을 받았다가 불쑥 당한 이별 통보 덕분에, 내 머릿속에 프랑스의 멋진 세계유산은 그와의 김빠지는 이별 장소로 자리 잡고 말았다.



[사진] 2017년 8월 베르사유 궁전. 내가 2G와 3G 사이를 오가며 이별 통보를 들은 곳이다. 이 사진을 찍고 전화가 와서 정원을 배회하며 통화를 했더랬다.



 그의 키는 얼마나 컸냐고?

 나는 애석하게도 키가 다 큰(?) 그의 모습은 못 보았는데, 전해 듣기로는 170 중반까지 자랐다고 한다.


 키수술에 대한 그의 만족도는 어떠하냐고?

 연락이 닿지 않아 거기까진 잘 모르겠다.



 휴, 이제 와서 말하지만 나는 그가 키수술을 하건 말건 괜찮았는데. (살짝 뒤끝을 부려보자면, 나는 그가 사무쳐 그리워하던 첫 여자친구에 그 존재감이 감히 비할 바가 못 되겠지만 말이다.)


 저, 키는 안 보거든요, 진짜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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