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나는 일정이 빡빡할 때 더 신나는 사람
나는 시간이 없는 가운데서도 시간을 쪼개어 사는 것을 잘한다. 고등학교 때는 플래너를 쓰면서 빡빡하게 시간관리를 했었다. 대학교 4학년 1학기 때는 18학점의 수업을 들으면서 주3회 리트 스터디를 했고, 주1회 동아리 활동에, 주2회 최소 6시간씩을 할애하는 건명원까지 꽤나 많은 일정을 소화하면서도 크게 힘들다는 생각을 하지 않았던 것 같다.
(그만큼 나는 다른 사람이야 아무래도 상관 없지만 스스로 바쁘다, 귀찮다는 말을 하지 않으려 많이 노력한다. 같은 일이라도 효율적으로 해내면 해내지 못할 일이 없고, 또 그 일에 그만큼 마음을 쓴다면 정말 시간이 없을까 하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정말 바쁘더라도 얼굴을 보고 싶은 사람과는 1년에 밥 한 번은 먹을 수 있고, 평소에 책도 조금씩은 읽을 수 있고, 부모님께도 매주 안부 전화를 드릴 수 있는 것처럼 말이다. 그럴 시간이 없다는 말은 그럴 마음이 없다는 말이고, 바빠 죽겠다는 말은 내가 소화하거나 감당할 수 있는 범위를 넘어선 일정을 운용하고 있다는 말밖에 되지 않는다고 생각한다.)
나는 반대로 주어진 가용시간이 많을 때에는 겉으로는 그 시간을 잘 운용하고 있는 것처럼 보이면서도, 막상 마음 속으로는 갈피를 못 잡는 경향이 있다.
수험생활을 마치고 로펌에서 일을 시작하고 나서도 평일 저녁 상당수나 주말 하루이틀은 자유로웠고, 회사로 이직하고 나서는 평일 저녁 시간도 자유롭게 쓸 수 있거니와, 일정이 있더라도 미리 예측이 가능한 삶을 살게 되었다. 이렇게 일을 시작하고 2년간을 보내면서 운동과 책 읽기, 글 쓰기를 퇴근 후 삶의 주된 축으로 삼아 시간을 운용하고 있고, 건명사학, 독서모임, 시에라 소사이어티 등 지적인 교류를 할 수 있는 커뮤니티 활동도 기회가 될 때마다 해왔다.
그만큼 겉으로는 시간을 알차게 잘 운용하고 있는 것처럼 보이기는 하다보니, 친구들 중에는 내게 '갓생을 산다', '바쁘게 산다'라고 해주는 사람도 있다. 그러나 막상 내 마음 속으로는 잠깐의 여유 시간이 생겨도 축 쳐지는 등 갈피를 잡지 못하는 경향이 있는 것 같다. 무언가 생산적인 것을 해야지 하는 강박을 느끼는 건 아닌 것 같고, 할 일이 많을 때 더 신이 나서 여러 가지를 열심히 하게 되는 것 같다.
2. 지금 나는 균형을 좇기보다는 열정을 쏟고 싶다, 그렇지만
내 내면의 소리에 귀 기울여 본다면, 현재의 나는 삶에서 여러 부분의 균형을 잘 맞추어가는 것보다는 내 본업인 일에 있어서 좀 더 열정을 불태우고 싶다.
이런 생각과 관련해 최근 조금 더 발전이 있었던 점은 다음과 같다:
1) 일을 시작하기 전에는 추상적이고 맹목적으로 '나는 일에 대한 열정이 있는 사람이야'라고 생각했는데, 일을 시작하고 나서는 진심으로 또 구체적으로 그런 열망을 느끼게 된 것 같다. 친구들 중에서는 막상 일을 시작해보니 자신은 그런 유형이 아니라는 걸 깨달은 사람도 있다고 하는데, 나는 같은 일을 하더라도 조금 더 집요하게 물고 늘어지고 싶고, 조금 더 강도 높게 업무를 해보고 싶다.
2) 동시에 이런 열정이 영원하지 않으리라는 생각도 하게 되었다. 인생을 살면서 체력과 건강, 가족 등 여러 변수가 얽혀 있는 만큼 언제나 일에 대해 이런 열정을 불태울 수 있는 게 아니라는 생각도 든다. 그래서 더더욱 이런 유한한 젊음의 시기에 열정을 불태울 수 있는 일을 해보고 싶다.
3) 지금까지는 '업무강도가 높은 일'을 하면 자연스레 열정을 발휘할 수 있지 않을까 생각했다. 그러나 목적 없는 열정, 지향점 없는 바쁨이 얼마나 의미가 있고 또 지속 가능성이 있을까 하는 생각도 한다. 전에는 업무강도를 일의 의미, 성장의 프록시처럼 생각을 했는데, 이젠 꼭 그렇지만은 않다는 생각을 한다.
3. 지금 시기는
삶에서든 일에서든 바쁜 시기와 상대적으로 여유로운 시기가 있게 마련이고, 늘 강강강강강의 일정으로 살아갈 수도 없을 테다. 지금과 같이 살짝 여유가 있는 시기는 기초체력을 다지면서, 나를 파악하고, 일의 차원뿐만 아니라 일 외적인 차원으로까지 지적 호기심을 발휘할 수 있는 소중한 시기가 아닐까 싶다.
(2024. 12. 9. 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