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변호사 일기] 꿀꿀할 땐

by 김지원 Jiwon Kim

1. 꿀꿀했던 하루



새해 시작부터 꿀꿀한 일이 많았다. 첫째는 옆집의 소음. 열한 시쯤부터 노래가 들리기 시작했다가, 열두시 반쯤부터 비정상적으로 볼륨이 높아졌고, 새벽 내내 최대 볼륨의 음악소리가 복도에 울려 퍼졌다. 새벽에 경찰분들이 출동하시기까지 했는데, 경찰분들이 문을 두어 번 두드리고 가셨는데 인기척이 없어서인지 그대로 복귀를 하신 것 같았다. 에어팟을 끼고 자려다가 혹시 알람을 못 들을까봐 망설였는데, 이러다가 밤을 꼴딱 새고 출근하겠다 싶어 결국 3시쯤 에어팟을 끼고 억지로 잠을 청했다. 다행히도 긴장한 탓인지 평소보다 잘 일어나서 출근을 했다. (나름 ‘변호사 일기’ 카테고리에 글을 업로드하는데, 층간소음 법적 대응 같은 유용한 정보는 없는 글이 되었다.) 둘째는 회사에 있을 때 생긴 꿀꿀한 일. 셋째는 지하철역으로 귀가하는 길에 이상한 사람이 따라온 것.



2. 꿀꿀할 땐


기분이 안 좋을 때 내가 하는 일은, 내 감정을 가만히 들여다보고, 내가 왜 그런 감정을 느끼는지 원인을 나열해보는 것이다. 머릿속에만 떠올려보다가 마지막엔 웬만하면 종이에 적어보곤 한다. 머릿속으로만 생각을 하면, 생각이 뒤엉켜 쉬이 정리되지 않는 느낌이 들기 때문이다.


종이에 내 감정과 원인을 쭉 적어보면 - 더 이상 바로 새로운 아이디어가 떠오르지 않는 정도까지는 쥐어 짜내야 한다 - 종이 위에 적힌 글자를 제3자의 시선으로 객관화해서 바라볼 수 있게 된다. 마치 요가에서 내 호흡에 오롯이 집중을 하듯이 말이다. 내 감정상태와 원인에 대해 ‘그렇구나’ 하는 정도의 마음으로 지긋이 눈길을 주는 것이다. 불쑥 떠오르는 인상 판단은 어쩔 수 없겠지만, 되도록 어떤 가치 판단은 하지 않는다.


그렇게 흙탕물에서 흙이 가라앉듯 부유하던 내 감정이 잠잠해지면, 그 중에서 시간이 지나도 내게 의미가 있을 이유를 남기고, 그와 관련하여 내가 지금 당장 나의 힘으로 할 수 있는 일이 있다면 무엇일지 곰곰이 생각해본다. 라인홀트 니부어가 다음과 같이 분별의 지혜를 달라고 신에게 기도한 내용을 실천에 옮겨보는 것이다: "바꿀 수 있는 것을 바꿀 용기를 주시고, 바꿀 수 없는 것을 참을 인내심을 주시고, 바꿀 수 있는 것과 없는 것을 구별할 지혜를 주소서"


그렇게 지금 당장 내가 내 부정적 감정의 원인을 얼마간이라도 해소하기 위해 할 수 있는 조치를 취해보고, 지금 당장은 아니더라도 장기적으로 염두에 두고 실천해볼 수 있는 방안들을 떠올려 보면, 꿀꿀한 감정도 살살 녹아 조금씩 걷히곤 하는 것이다.


이렇게 감정과 원인을 정리해서 가만히 살펴보고, 액션 플랜까지 짜보면, 격해졌던 감정도 조금은 잦아들고 이미 일이 벌어진 후에 얼마간의 수습을 하거나 건설적이고 발전적인 그 다음 걸음을 내딛을 수 있게 된다. 내 자연스레 터득한 방법인데, 혹시 다음에 부정적인 감정이 들 때 떠오르신다면 한번 해보시는 것 어떤지!


아. 언제는 한번 분한 일이 있어 눈물이 와앙하고 터졌는데(그리 오래 되지 않은 일인데도 그새 기억이 나지 않는다. 역시 다 지나간다.) 우는 와중에 고등학교 친구와 카톡을 주고받으면서 내가 우는 이유가 뭔지 생각해보고 정리하여 말해보았다(음슴체 주의).


IMG_1588.JPG?type=w773 실제 카톡은 아니고 예시로 적어보았다.

이렇게 말했더니 나와 MBTI가 P/J만 다르고 나머지가 모두 ENT로 똑같은 친구가 “역시 니도 T다”라고 했던 기억이 난다.




3. 오늘의 위로


오늘의 위로가 두 가지 있었으니, 첫 번째는 일이다. 새해를 맞아서인지 사내 각 팀에서 법무팀으로 일이 쏟아져 들어왔다. 다들 연말에는 업무를 설렁설렁 하다가 연초가 되어 새로운 마음가짐으로 열심히 일을 벌리시는 건가? 그래도 일을 빠르게 쳐내면서도 모처럼 단문이 아니라 수십 쪽짜리 서면을 쓸 일이 있어, 짧고 긴 호흡을 병행하며 일을 하니 일이 유독 재밌는 날이었다. 지금 돌아보니 일이 위로가 되어준 듯도 싶다.


두 번째는 요가와 필라테스다. 운동 중간중간에 떠오르는 잡념을 그대로 응시하다가 현재에 오롯이 집중할 수 있도록 회복할 시간을 두 시간이나 가질 수 있었다.

요가는 한 자세에 집중해서 얼마간의 호흡을 유지하다 다음 자세로 넘어가는 식의 시퀀스로 구성이 되어 있다. 그래서 요가 수업을 따라가면서 한 자세를 오랫동안 유지하고 있다 보니, 미처 정리되지 않은 감정들이 호흡 중간에 불쑥불쑥 튀어나왔다. 그런데 마지막에 머리서기를 시도하면서 이 생각들이 쑥 들어갔다. 뒤집어 우뚝 세운 몸이 균형을 잃을까봐 코어에 집중하며 파들파들 떠느라, 강제로 '지금 이 순간'에 집중하며 수업을 마무리했다.

필라테스는 오늘 내가 수강한 수업의 강사님이 에너지가 넘치셔서 그런지, 쉴 틈 없이 몸을 움직이게 만드셨다. '동적인' 수업이라는 표현으로도 모자라, '아주 가만히 놔두지를 않는' 수업이었다. 귓가로 쉴새없이 빗발치는 강사님의 큐잉을 놓칠세라 정신없이 따라가다 보니 거의 완벽하게 '지금 이 순간'에 집중하게 됐다.




4. 오늘의 꿀꿀함을 내일로 가져가지 말라


오늘 하루는 ‘꿀꿀함에 사무쳐’ 있다가, 뜻밖에도 일에서 위로를 받고, 요가를 하며 호흡과 함께 가만히 내 생각을 지켜보다가, 필라테스를 하며 용케도 아직 힘이 남아 날뛰던 생각뭉치를 마저 진정시키고,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몰스킨에 이 글의 초안을 끄적이며 마무리 중이다. 이 일련의 과정을 거치면서 오늘의 꿀꿀함은 그저 오늘의 몫으로만 남겨두고, 내 몸과 정신은 이제 그만 가볍고 단촐하고 또 홀가분하게 내일로 넘어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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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요가와 필라테스 / 지하철에서 몰스킨 쓰기 / 예쁘게 마르는 중인 꽃. 이 밤의 고요함이 이렇게나 감사할 줄이야!



(2025. 1. 3. 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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