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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Jissay

때론 의미 없어도 괜찮아요

by 이지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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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습 마지막 3개월이 끝나간다. 실무에서 처음 담당하는 R&R이었지만 힘든 것 과는 별개로 정말 재밌게 지내왔다. 3개월이면 90일, 누군가의 몸이 명품으로 바뀌기에 충분한 기간이라 생각하지만, 새로운 분야에서 당장의 성과를 만들기엔 턱없이 짧은 기간이기도 하다.


다만 E2E 테스트 자동화 내부 세미나를 앞둔 시점에서 과거의 나와 비교한다면 많은 부분에 있어서 성장한 건 사실이다. 그만큼의 인풋이 있었기에 맨땅에 헤딩하는 순간들을 잘 버티고 극복해왔다. 하지만 문제 해결 능력과 더불어 여전히 부족한 기본기로 인해 갈 길이 멀다는 것을 스스로도 인지하고 있고, 이를 스스로 인지한다는 것은 이전에 비해 많은 성장을 했다는 것을 의미하기에, 갈 길이 멀게만 느껴지는 요즘이 오히려 소중한 기회이자 시간으로 다가온다. 이제야 무엇을 모르는지 아는 상태가 되었기 때문이다.


사회와 조직 그리고 세상이 내 속도에 맞춰준다면 얼마나 좋을까 싶지만, 희망 사항과 의무 사항의 무게와 책임은 다르기에 성장에 대해 조급해하지 않을 수 없다. 오랫동안 가늘고 길게 꾸준히 하는 것이 더 중요하다는 걸 알면서도 조급해하지 않을 수 없는 건 사실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랫동안 가늘고 길게 꾸준히 무언갈 포기하지 않고 하는 것은 여전히 내 삶에서 중요하다. 그간 스스로의 역량 부족으로 인해 맨땅에 헤딩이라는 표현을 쓸 정도로 심리적 압박감이 상당한 채로 하루하루 지내왔지만 그것과는 별개로 새로운 것을 학습하고 적용하는 것은 여전히 살아 숨 쉬게 하는 원동력 중 하나이다. 챌린지가 없는 삶은 죽은 삶과 마찬가지다.


커리어 몰입도 중요하지만 균형을 위해서 작은 행복을 꾸준히 만들어가는 것도 중요하다. 지치지 않고 꾸준히 해야 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작은 행복은 목적과 의미 없이 무언가에 몰입할 때 나타난다는 것을 느끼고 있는 요즘이다.


어린 시절을 떠올려보면 별일 아닌 것에도 웃음꽃이 활짝 폈다. 떨어지는 낙엽에 신기해하고 즐거워했었다. 하지만 마지막 20대를 보내는 와중에 점차 지켜야 할 것들이 보이고, 지켜야 할 것들이 생겨나기 시작하니, 어찌 이리도 어린아이의 마음이 사라졌는지 시간이 무정하게 느껴지는 요즘이다.


어른이 되어간다는 건 어쩌면 행동의 시작과 끝에는 항상 목적과 목표와 의미가 있어야 한다는 것일지도 모르겠다. 아무 생각 없이 놀이터에 있는 모래알을 만지작 거리며 하루를 보냈던 시절에는 아이스크림 하나 내 돈 주고 사 먹기 힘들었지만, 일상 자체가 즐겁고 행복했었다.


커리어와 목적과 목표 그리고 행위에 대한 의미를 따지기만 했던 내 모습도 좋지만, 때론 의미도 목표도 목적도 없이 호기심 가득한 눈빛으로 즐길 수 있는 대상을 찾는 것도 중요한 요즘이다. 그리고 그러한 대상을 찾게 되었다. 헬스, 마라톤, 복싱에서는 찾을 수 없는 유형의 즐거움과 행복감이었다. 내가 찬 공이 골대 안으로 들어갈 때의 순간을 느끼고자 내일이 기다려지고 주말이 기다려진다. 왜 그런지는 모르겠지만 그래서 즐겁다.

사실 나는 어릴 때부터 축구를 좋아했었다. 축구를 못하지만 축구 자체를 즐겨했었고 보는 것 또한 즐겨했었다. 하지만 사회생활을 시작하고서부터 무의미한 행위로 다가왔었다.


과거의 나였다면 축구공 차는 행위는 앞으로의 내 인생과 커리어에 아무런 도움이 안 되기 때문에 시간낭비라 느껴졌을 테지만, 작은 행복의 중요성을 피부로 느낀 이후부터는 너무 소중한 시간으로 다가왔다. 목적과 목표와 효율을 따지는 삶에서 벗어나 삶 그 자체를 순수한 감정에 의해 느낄 수 있기 때문이다.


좋으면 좋은 거고 싫으면 싫은 거고 행복하면 행복한 거지만, 어느 순간부터 이유가 필요해지고 명분이 필요해졌고 논리적인 납득이 필요해졌다. 이러한 삶은 여전히 오늘도 내일도 지속될 테지만 가끔 이렇게 골대 안으로 '어떻게 공을 더 회전시킬까'와 같은 커리어와 아무런 연관이 없는 것에 몰두하고 행복해할 수 있다면, 지속 가능한 행복을 찾은 게 아닐까 싶은 요즘이다.


본업과 관계없는 무언가를 하고 있을 때 어린아이의 순수함과 호기심과 즐거움이 생겨나는 것 같다. 목표도 목적도 의미도 없이 무언가를 짧게나마 해볼 수 있는 시간을 가진다면 오늘 하루 내가 해야만 하는 일과 삶을 보다 밀도 있게 채울 수 있지 않을까 생각된다. 꿈과 목표가 높다면 오히려 한쪽으로만 치우친 삶이 아닌, 아주 약간의 균형을 적절한 타이밍에 만들어내는 것도 중요한 게 아닐까 싶은 요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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