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라한 선물 뒤에 숨겨진 마음
이틀 전에 아이들에게 게임기를 선물했다.
큰 아이의 나이가 열 살.
지난 십 년 동안 되도록이면 스마트폰에 노출시키지 않고 키웠고, 집에 텔레비전도 없이 살아온 세월이었다. 그런데 덜컥 큰돈을 들여 닌텐도 스위치라는 최신형 게임기를 선물했다.
아들이 사 달라고 떼를 쓴 것도 아니었다. 그런데 이상하게 사 주고 싶었다.
"엄마, 내 짝꿍은 좋겠어."
"왜?"
"수요일마다 할머니 집에 간대. 부러워. 그리고 할머니 집에 안 가는 날엔 게임을 한대."
(프랑스는 수요일마다 학교를 가지 않거나 또는 오전 수업만 한다)
그랬다. 몇 개월 전에 스쳐가듯 전했던 아들의 진심이 내 마음 한 귀퉁이에 걸려 있었던 모양이었다.
프랑스에 온 뒤로 할머니 할아버지를 만나지 못하고 있는 아들, 아들에게 할머니 집은 천국 같은 곳이었을 텐데... 안 되는 것이 없고, 모든 것에 대해 그저 용납되고 감싸지는 공간. 그런 공간과 그런 대상을 잃어버린 마음이 오죽했으랴. 아들의 말을 듣고 애잔한 마음에 눈물이 핑 돌았더랬다.
아들의 방점은 '할머니 집에 간대'였겠지만, 부수적으로 덧붙였던 '게임을 한대'가 함께 내 마음에 담겨있었던 이유는 그나마 내가 해 줄 수 있는 것이었기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그렇게라도 위로해 주고 싶었던 마음, 엄마는 그렇게 또 아이들에게 지고 말았다. 게임기를 사달라 보채지도 않은 아이들의 품에 게임기 한 대를 안기면서, 최대한 전자기기와 멀리 놓고 길러보겠다던 나의 당찬 포부도 그렇게 슬그머니 내려놓았다.
아이들 입장에선 큰 횡재였다. 보채고 조르지도 않았는데, 아니 사실은 엄마가 이런 걸 허락해주리라고 상상도 하지 못했는데, 갑자기 하늘로부터 게임기가 떨어졌다. 세상에 이런 일이. 입이 귀까지 걸려 행복해하는 아이들을 보니 나도 일단은 좋다.
상대가 요구하지도 않은 선물을 안기며, 그걸 받고 좋아 어쩔 줄 모르는 모습을 보는 건 얼마나 큰 기쁨인가.
그런데 그러다 문득 내 어린 시절이 떠올랐다.
한창 DDR이라는 게임기가 유행하던 때였다. 나는 이제 막 중학생, 사춘기에 입성했더랬다.
여기저기 오락실에서는 펌프니 DDR이니 하는 큰 게임기기 앞에서 춤 좀 춘다는 아이들이 줄을 서서 실력을 뽐내고 있었지만, 그다지 춤에는 소질이 없었고 소극적이었던 나는 그리고 오히려 범생이 쪽에 가까웠던 나는 제대로 한 번 해 본 적도 없었다.
"딸, 어여 나와 봐라. 아빠 왔다."
술에 얼근하게 취한 아빠가 반갑게 나를 불렀다. 사춘기 입성의 가장 큰 특징, 만사 귀찮음 중이었던 나는 술에 취한 아빠의 목소리가 귀찮았고, 그 목소리가 나를 부른다는 사실이 또 귀찮았다. 얼굴을 잔뜩 찌푸리고 나가보니 아빠 손에는 한껏 초라한 가정용 DDR 게임기가 들려 있었다.
비닐장판 같은 재질에 허접하게 만들어진 DDR기계는 TV에 연결해서 할 수 있는 거라고 했다. 그걸 내 앞에 들이밀며 '요즘은 이게 애들 사이에 최고 인기란다' 말하던 아빠는 세상 다 가진 듯 환한 표정을 지었다. 그러나 선물을 받아 든 나는, 정작 '이걸 왜? 뭐하러?' 하며 시크하게 반응했다. 꼭 필요한 것도 아니었고, 꼭 갖고 싶었던 것도 아니었으니 나로서는 당연한 반응이었다.
그러나 아빠는 아랑곳없이 어서 한 번 해 보라고, 이게 지금 그렇게 유행하는 거라며... 설렘 가득한 목소리로 나를 채근했다. 가뜩이나 귀찮은 중에 있던 나는 더욱 귀찮아졌다. 한밤 중에 엄마 아빠 앞에서 DDR이라니... OTL
내 시큰둥한 반응을 느낀 아빠는 서운한 기색이 역력했다. 버럭 화를 냈던 것도 같다. 엄마는 나를 향해 눈을 찡긋 대며 어서 해 보라고 열심히 신호를 보내고 있었다. 그렇게 마지못해 재롱잔치를 하는 7살 어린이처럼 아빠 앞에서 허접한 DDR을 꾸역꾸역 몇 곡 따라 했던 기억이 어슴프레 남아있었다.
그 후, DDR은 서랍장 깊은 곳에 있다가 어느 날 사라졌다.
그 빛바랜 기억이 갑자기 왜 떠올랐을까.
최신형 게임기 앞에서 세상 다 가진 듯 행복한 두 아이의 얼굴을 바라보다, 엄마 고맙습니다를 연발하는 두 아이의 얼굴을 바라보다, 그 모습에 덩달아 세상 다 가진 듯 행복해진 내 마음을 바라보다,
한껏 초라한 DDR 기계와 그걸 수줍게 내밀던 아빠를 떠올리고 말았다.
"글쎄 말이야, 아빠가 DDR을 사 왔다니까?
말이 돼? 아무 쓸모도 없는 그런 물건을..."
언젠가 남편에게 농담처럼 아빠 흉을 봤던 적이 있었던 것 같다. 그 사건은 딱 그 정도의 기억이었을 뿐이었다. 눈물도 추억도 아련함도 담길 것 없는, 그냥 한 번 웃고 지나갈 에피소드.
그런데 할머니를 만나고 싶지만 만날 수 없어 슬프다는 아들 마음을 위로해주려,
차안으로 게임기를 선택했던 내 마음은 사랑이었다.
가장 원하는 것을 줄 수는 없지만, 그래도 내가 줄 수 있는 작은 것 하나라도 주고 싶은 마음... 그렇게 해서라도 구멍 난 마음을 조금이라도 메워주고 싶은 마음, 잠시라도 웃게 해 주고 싶은 마음... 그 나이 때 아이들이 누리는 것들을 조금이라도 누리게 해 주고 싶은 마음...
그것은 오로지 사랑이었다.
그러고 돌아서서 보니, 아빠가 건넨 초라한 DDR도 아빠의 사랑이었겠다 싶다.
세상 화려한 것들, 예쁘고 좋은 것들,
아빠라고 그런 것을 모를 리 없었겠지만 초라한 DDR 한 대 밖에는 살 수 없었을 아빠의 초라한 주머니 사정이 이제야 헤아려진다. 아빠에게는 그것이 나를 위한 차안이었을 것이었다.
딸을 웃게 해 주고 싶었을 아빠, 딸을 기쁘게 해 주고 싶었을 아빠, 그러나 그 방법을 몰랐거나, 그 방법에 도달할 수 없었을 아빠, 그런 아빠에게 초라한 DDR은 '그래도 내가 너를 사랑하고 있다'라는 수줍은 고백이었는지도 모르겠다.
그 순간을 떠올리다, 괜스레 콧등이 찡해진다.
초라한 선물 뒤에 숨겨진 아빠의 마음을 헤아렸더라면 환하게 웃어줄 수 있었을 텐데, 고맙다고 친구들이 하는 거 나에게도 주고 싶어서 이렇게 선물해줘서 고맙다고, 꼭 갖고 싶었던 거라고, 조금은 과장된 말들로 아빠의 마음을 기쁘게 해 드렸을 텐데...
그러나 그 마음을 헤아리기엔 나는 그저 열다섯 살 어린 소녀였을 뿐.
세월이 이만큼 흐르고 난 뒤에,
이제와 서야 나를 향했던 숨은 사랑 한 조각을 발견한다. 초라한 DDR 기계를 들고 웃고 있던 아빠의 모습을 떠올리며, '아빠 고마워요' 한 마디를 마음속으로 속삭여본다.
그렇게 묻혔던 기억의 한 조각은 아름다운 추억이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