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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마리앤느 Aug 26. 2022

상처가 치유되는 순간들


고3 때, 수능 시험을 마치고 난 뒤

마음이 참 많이 착잡했었다.


나름대로 애를 쓰며 공부를 했고, 고3이 된 이후 모의고사를 볼 때마다 작은 폭으로나마 성적은 늘 오르고 있었다. 그러나 정작 수능시험에서 너무 긴장한 탓이었던지 성적은 그만 뚝 떨어지고 말았다.


마음이 천근만근,

가뜩이나 어려운 형편에 재수는 꿈을 꿀 수도 없었다. 시켜준다고 한들 솔직히 자신도 없었다.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방 안에 누워 끙끙 앓고 있는 나에게 아빠는 이야기를 좀 하자고 했다.


그리고 마음이 뚝 떨어져 있는 나를 향해,

기어이 아빠는 모진 한 마디를 던지고 말았다.



"재수는 안 된다."



수능시험을 망친 뒤, 그것이 내가 아빠에게서 들은 유일한 한마디였다.


알고 있었던 사실이었고, 생각하고 있었던 사실이었지만, "딸 괜찮니?"라는 말 대신 들어야 했던 그 말은 그토록 가슴에 아프게, 그리고 야속하게 남아있었다.


이후, 나는 집 근처 국립대에 들어갔고 4년을 장학금으로 대학을 마쳤다. 부모님의 도움을 받지 않겠다... 그것은 아빠에겐 자랑이었을지 몰라도 나에겐, "재수는 안 된다" 했던 아빠에 대한 일종의 소극적인 항거였고, 반항이었다.    





사실 그 말은 이십 년도 더 전에,

아빠가 대학에 떨어졌을 때,

할아버지로부터 들었던 한마디였다.


당시 교사셨던 할아버지는 대학 입시에 실패한 아빠를 앉힌 뒤 그렇게 말씀하셨다고 했다.


"장남이 재수하는 일은 있어서는 안 된다.

장남이 재수를 하면 말 그대로 재수가 없다.

그럼 뒤에 동생들이 줄줄이 다 재수를 하니까 너는 그냥 군대를 다녀와서 직장을 잡도록 해라."


주저하며 한 번만 더 기회를 주십사 어렵사리 말을 꺼내는 아빠에게 할아버지는 단호하게 "나는 너에게 기회를 이미 줬다."라고도 했다고 했다.


그러나 아빠가 군대에 다녀왔을 때부터 몇 차례 직장에 들어갔다 나왔다를 반복하는 사이, 둘째 삼촌부터 막내 삼촌에 이르기까지 아빠를 제외한 다섯 명의 동생은 재수와 삼수까지 해서 모두 대학을 들어갔다고도 했다.

 


그 사건은 평생토록 아빠에게 깊은 아픔이 되었다. 술이 흥건하게 취한 밤이면 아빠는 그게 누구든, 비록 아주 어린 딸이라 할 지라도 앉혀 놓고 그 가슴 아팠던 일을 들려주고 또 들려주곤 했다.


단 한 번의 기회만이 주어진 장남으로 살아온 세월, 자신에겐 도무지 주어지지 않았던 다시 한번의 기회....

그것이 '나'에게만 허락되지 않는다는 억울함과 그러나 그런 현실을 피할 수 없는 것이야 말로 내게 주어진 인생이라는 깊은 슬픔.


아빠는 큰 슬픔 앞에 그렇게 조금은 꺾인 채,

조금은 체념한 채 평생을 살아왔다.

그것은 아빠 인생의 굴레였다.



그런데 아빠는 그 족쇄를

기어이 내게 채워주고 말았다.


자신이 들었던 가장 아팠던 한 마디를,

애를 써 보았지만 기대만큼 얻어내지 못해 아파하고 있는 가장 사랑하는 딸에게 무심결에 던지고 말았다.

그렇게 아빠는 가장 원하지 않았던 방식으로, 아빠가 가졌던 할아버지에 대한 그 이미지와 똑같은 모습으로 내게 남겨질 수밖에 없었다.



아빠보다 조금 더 욕심이 많았고, 아빠보다 조금 덜 꺾인 나는, 인생은 내게 단 한 번의 기회만을 허락한다는 사실 앞에 체념하기보다 오히려 뛰고 또 뛰었다.


이번이 아니면 안 된다는 생각은 늘 절박함과 간절함이었고, 그것은 인생을 종종거리며 살게 했다. 그리고 때로 나처럼 살지 않고 언제라도 기회를 누릴 수 있는 것처럼 살아가는 여유로운 누군가들을 마주할 때면 마음 한 편엔 늘 억울함이 있을 수밖에 없었다.


그것이 내 인생의 굴레였다.


찾아온 기회를 놓치지 않겠노라 온 힘을 다해 살아가야 하니 늘 힘겹고, 동시에 내 인생만 이렇게 힘들다 여길 수밖에 없었던 나는 어느새 아픔 많던 아빠를 조금 닮아 있었다.



그것은 어쩌면 상처의 되물림이었다.



 


이번에 마흔 가까운 나이에 다시 대학 공부를 시작하겠노라 마음먹고 돌진했으나 모든 대학에서 떨어졌을 때, 나에게 다음은 없었다.


시간도 힘도 재정도 모두 낭비되었다는 생각에, 가족들을 향해 미안했고, 송구스러웠다.


이제 더 이상 대학시절처럼 내 시간을 나만을 위해 오롯이 쓸 수 없는 형편이었다.


내가 공부를 하겠다고 일을 내려놓으면 그 부담은 고스란히 남편에게로 갈 것이었고, 내가 공부를 한다고 시간을 나를 위해 더 쓴다면 그만큼 아이들은 엄마를 포기해야 했다. 물론 남편이 그만큼의 짐을 더 져야만 하는 셈이었다.


그걸 기꺼이 해 주었음에도 나는 실패했다. 그것이 미안했고, 부끄러웠고, 속상했다. '다시 한 번'을 말할 용기는 내 편에선 하나도 없었다.



그리고 내 시나리오대로라면, 남편은 아빠와 같이,

"재수는 안 된다"라고 해야 하는 것이었다.

그것이야 말로 합당한 반응이었다.


그러나 그 말을 다시 듣는 것은 내게 너무나 가슴 아프고 자존심이 상하는 일이었다. 어쩌면 그토록 떨어지지 않길 바랬던 이유는 그 아픔을 다시 반복하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었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반대의 입장이라 해도 나 역시 남편에게 그렇게 말했을 게 분명했다. "더는 안 된다"라고. 그것이 내가 경험한, 실패에 대처하는 방법이고 태도였으니까.




그러나 "더는 못 하겠다, 자신이 없다"라고 말하는 나를 향해 남편은 "다시 한번 해 보라" 말해 주었다.


애들 돌보며, 일 하며 그렇게 공부를 했으니, 힘든 게 당연하다고... 그래도 그 와중에 이만큼 한 게 기특하다고...올 한 해는 온전히 공부에 집중하면서 다시 한번 해 보라고... 내가 도와줄 테니까, 네가 원하는 대로 한 번 해 보라고....  


남편은, 그렇게 기꺼이 내 편에 서 주었다.

인생에 처음 있는 일이었다.  


내가 떨어진 까닭을 나에게서 찾지 않고 상황의 탓으로 돌려주었고, 내게 다시 한번의 기회를 주기 위해 기꺼이 자신이 무거운 짐을 지어주었다.



그것은 내게 특별한 사건이었다.

떨어져도, 실패해도,  못해도,  모습 그대로 응원받을  있고 지지받을  있다는 사실은 놀라운 일이었다. 그리고 머리로는 알지만  번도 경험해보지는 못한 일이었다.


두 번의 기회는 주어지지 않는 차갑기만 했던 세상은 그렇게 내 속에서 따스한 세상으로 이미지를 변모해 가고 있었다.  


잘하지 않아도 용납받을  있다는 사실과, 실패의 순간에 손을 내밀어주는 사람들이 존재한다는 것은 그렇게 단번에 모든 것을 바꿀 만큼 강렬한 것이었다.


그리고, 부끄럽게도 이제야 비로소 나도 누군가의실패 앞에서 그렇게 말해줄 수 있을 것 같다.


더 노력했어야지 대신에

너는 충분히 잘하고 있어라고,

더는 안 돼 대신에

내가 도와줄게라고.


 어느 드라마  대사처럼,

이렇게 채워지고 나서야 나도 누군가를 채워줄  있게 되는 건지도 모르겠다.


그리고 그렇게 서로를 채워줄 수 있을 때 우리는 비로소 위로부터 쏟아져 내려왔던 상처를 아랫세대에 대물림 하는 일을 막아설 수 있게 되는 건지도.  



그러고 보니, 차라리 떨어지길 잘했다는 생각이 든다. 이러려고 그랬나보다 싶다.


어쩌다 다시 그 아픔의 자리에 서서, 피할  없어  아픔을 서성이다 이렇게 치유를 경험한다.



그때 그토록 듣고 싶었던  ,


딸아, 인생에서 떨어지고 붙고 하는 것은

너의 가치와 아무런 상관이 없다.

그러니 너무 슬퍼 말거라.

아빠는 그래도 네가 이렇게나 자랑스럽다.

네가 얼마나 열심히 했는지 아빠가 다 아니까.

그러니 이제 그만 훌훌 털고 일어나거라.

네가 무엇을 하든, 어떻게든 아빠가 도와줄게.

딸아 사랑한다.

너를 믿는다.


그 말을 아빠 대신 남편에게 들으며,  

어쩌면 아빠에게 필요한 말도 그말이었을까

아빠의 아픔도 헤아려보며...


그리고 마침내,

나도 누군가의 실패 앞에 

부디 그렇게 말해주리라 마음먹으며...  



그렇게 가슴 시린 상처 하나를 치유해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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