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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마리앤느 Nov 13. 2020

두고 온 책가방

실수를 통해 배워가는 아이들

한글학교에 가는 수요일은 평소보다 조금 더 바쁜 날이다. 애들 학교에 데려다주고 잠시 수업 준비하고 애들 가방 싸고 점심 준비하고 애들 데려 와 먹이고 다시 한글학교에 데려가야 하니 아침부터 종종 댄다.


그런데 엄마의 이런 다급함과 분주함을 아는지 모르는지 딸내미는 세상 느긋하다.

가뜩이나 천천히 먹는 아이인데, 수다까지 떨려니 밥그릇에 밥이 사라질 기미가 없다. 오빠는 벌써 다 먹고 양치까지 끝냈는데, 딸내미는 아직도 밥을 먹고 있다. 얼른 먹으라고 재촉을 해야만 하는 내 속은 부글부글...

겨우 밥을 다 먹은 딸내미는 이제 놀고 있는 오빠에게로 돌진한다.

"아니, 딸 양치부터 해야지"

엄마의 다급한 외침에 못 놀게 한다고 한 바탕 울음이 터진다.

'얘야... 울 시간에 얼른 양치하고 나면 더 놀 수 있잖니....' 차마 하고 싶은 말을 다 하지는 못하고 내 속은 또 부글부글.....


여하튼 그러는 동안 시간은 훌쩍 흘렀다.
이제 출발해야 할 시간이다.


지난주 수요일은 비가 와서, 한글학교 교장 선생님이 태우러 와 주신다고 연락이 왔다. 감사하고도 반가운 소식이었다. 그렇게 20분의 시간을 벌었다.


그러나 아이들을 준비시키다 보면 늘 느끼지만 아무리 일찍부터 준비를 시켜도 늘 시간이 모자라다. 결국 선생님이 도착했다는 전화를 받고 나서야 허둥지둥 내려갈 수 있었다.



오늘 20분의 시간을 벌고도 이렇게 분주한 데에 딸내미가 한몫을 톡톡히 했다. 교장쌤 차에 타서  휴우- 하고 한시름 놓으려는데 아들의 다급한 목소리가 들린다.

"엄마, 동생 가방은?"

아뿔싸.... 간식이며 파일이며 필통이며 싸 둔 가방을 놓고 내려온 딸내미...

떼쓰고 늘어지다 시간이 늦어져 결국 쫓기다 시피  허둥지둥 내려오게 된 딸내미는 가방을 완전히 잊어버린 듯했다.

오빠의 말을 듣고서야 가방을 놓고 온 걸 안 딸내미는 나라를 잃은 백성 마냥 서럽게 꺼이꺼이 울기 시작했다.

그러나 이미 너무 많은 시간을 지체했다.

다시 올라갔다 오기엔 너무 늦어 그대로 출발을 해야만 했다.


정말 마음 같아선

'내가 뭐랬니.. 그러니 징징 댈 시간에 빨리 준비하랬지.' 하고 팩폭을 날려주고 싶었지만 꾸욱 참는다.  


'뭘 잘했다고 울어? 그만 울어.'라고 한 마디 해 주고 싶은 것도 꾸욱 참는다.


나 역시도 이 상황이 유쾌하지만은 않지만... 그러나 생각해 보면 가방을 놓고 온 딸이 가장 속상할 터였다.

한글학교 갈 때마다 조금만 무거워도 엄마가 들어줘 하며 던져주는 아들과 달리 어찌나 자기 가방을 애지중지 하는지...

무겁고 힘들 법도 한데 끝까지 엄마에게 맡기는 법이 없는 딸이었다. 게다가 간식도  없으니... 얼마나 속상할꼬.


수업하다 보면 당이 떨어져서 혹시나 싶어 넣어온 초콜릿 두 개를 주겠다고 달랬다. 그러나 딸의 속상함은 풀어질 줄 몰랐다.



그렇게 수업을 시작했다.

필통이 없는데도 친구들이 빌려주고, 학교에 있는 사인펜으로 하니 큰 불편함이 없다. 딸의 마음이 조금 풀어지는 게 느껴진다.


물이 없지만 엄마 물을 나눠 먹을 수 있으니 생각보다 나쁘지 않다. 딸의 마음이 또 조금 풀어지는 게 느껴진다.


그리고 대망의 간식 시간,
엄마가 준 작은 초콜릿 두 개 손에 쥐고 친구들이 가져온 간식을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는 딸...

'내가 다른 간식을 조금 더 넉넉히 챙겨 놓을 걸... '

딸을 조금 애처롭게 바라보고 있는데, 그래도 금세 상황을  받아들이고는 초콜릿을 까기 시작한다.


그때였다.

"선생님 이거 간식이에요. 딸 주세요. 오늘 간식 못 가져왔죠?"

교장선생님이 딸의 수호천사로 변신해서는 맛있는 과자를 가지고 나타나셨다. 선생님 손에 들린 과자를 보자 그제서야 세상 가장 행복한 얼굴로 방긋 웃는 딸내미.


마음이 넉넉해졌다. 딸은 신이 나서 과자를 뜯어 반 아이들 사이를 돌아다니며 나눠 주고 또 나눠 준다.
그날 집에 돌아와 감사 나눔을 할 때 딸의 고백은

"오늘 가방 놓고 갔는데, 교장 선생님이 맛있는 과자 주신 거"

아마도... 딸은 또 한 가지를 배웠을 것이다. 가방을 놓고 온 일이 너무나 슬프고 속상했는데, 그것이 생각보다 나쁘기만 한 일이 아니었다는 걸.

그런 상황 속에서도 나를 돕는 사람들이 있고, 나의 어려움을 헤아려 주는 사람들이 있다는 걸. 그리고 그런 헤아림을 받을 때, 나 역시 누군가의 마음을 헤아려 볼 수 있게 된다는 걸...


그런 딸을 바라보며 나도 나를 돌아본다. 나는 오늘 또 어떤 두고 온 가방을 애달파하며 하루를 지냈는가. 그리고 그런 내게 의도치 않게 찾아온 무수히 많은 감사의 제목들을 놓치며 살고 있는 건 아닌가...

엄마에게 이 질문을 던져주려고 딸은 책가방을 그렇게  두고 갔었나 보다. 딸 덕분에 또 내가 1센티 자랐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덤으로, 딸내미가 다음부터는 일찍 준비해야겠다는 교훈도 얻었기를 ㅋㅋ 내심 바래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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