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년 만에 만난 그 사람은 침울해 보였다.
가까운 사이는 아니었다. 그때도 지금도.
그러나 내 기억 속 6년 전 그 사람의 모습은,
그때도 바빠 보이고 지쳐 보이긴 했지만
그래도 어떤 소망이나 희망 같은 게 느껴졌었다.
젊었기 때문이었을까.
어제 오랫동안 그 사람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함께 식사를 하고 대화를 나누는 동안
그는 곧잘 이야기에 참여했지만,
그의 표정에서는
침울함이,
켜켜이 눌러 놓은 듯한 슬픔만이
읽힐 뿐이었다.
애써 살고 있구나, 어쩐지 짠하게만 느껴졌다.
친하지 않은 사람이었다.
우연하게 알게 되었으나 금세 잊혀졌고
다시 한번 우연하게 연결이 된 관계였다.
그러나 그의 침울함이 내 마음에 깊이 남았다.
왜일까? 오전 내내 그 이유를 찾아 헤매다 깨달았다.
그의 표정이,
그 표정 속에 담긴 침울함이
나의 것과 닮아있었다는 것을.
웃고 있지만
말하고 있지만
영혼의 생기가 느껴지지 않는,
마치 다른 사람의 생을 살아내듯
부자연스럽고
불편해 보이는
그 모습이
마치 한국에서의 내 모습 같았다.
그제야 깨닫는다.
다른 사람들의 기대를 살아내는 사람들의 표정은
하나같이 침울하다는 것을.
웅크린 영혼으로 살아간다는 것을.
늘 누군가들이 원하는 것을 충실히 살아냈다.
표정이며 말 한마디조차도
내 마음대로 할 줄을 몰랐다.
그러나 상충되는 순간들은 늘 있었다.
그럴 때마다 나는 그들의 기대에 맞춰지기 위해
나를 지워냈다. 지워내고 또 지워냈다.
잠시, 왜 나만,
울분이 차 오르기도 했지만,
내게 속삭였다.
내 욕구는 틀렸고, 그들의 기대는 옳았다.
이내 마음이 고요해졌다.
그렇게 갈등을 피하고
조금 더 편안해진 대가로
나는 생기를 잃어갔다.
감정이 사라지자, 표정이 사라지고,
삶의 의욕도 같은 박자로 차츰 사라져 갔다.
프랑스에 온 뒤,
나는 혼돈했다.
더 이상 살아낼 기대가 없었다.
어떻게 살아야 하냐고,
물어볼 대상도
두리번 대며 살필 대상도 없었다.
두려움이 엄습했다.
한동안,
어쩌면 다른 이의 기대를 살아낼 때보다도
더 심하게
나는 웅크리고 있었다.
그러나 더는 이러고 있을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조심스럽게
한 걸음을 내디뎌 나왔다.
조심스럽게
내 목소리를 내 보았다.
너 갑자기 왜 그래,
때로 가까운 이들의 반발이 일었지만
내친김에 나로 살아보겠다 마음을 먹었다.
마음에 있는 말들을
솔직하게 내뱉기 시작했다.
그러나 거친 방식은 피했다.
내가 다시 누군가들을
내 기대의 감옥에 가두고 싶지는 않았다.
그러나 좋은 것은 좋다
싫은 것은 싫다, 표현하는 일에 더는
죄책감을 갖지 않기로 했다.
더 나아가
나의 어설픔, 서투름, 실수
모두 가리거나 숨기지 않기로 했다.
이게 나인 것을
나더러 어쩌라는 거냐...
때로는 그런 배짱으로,
그렇게 나는 조금씩 나를 되찾아갔다.
나는
생각보다
어설프고 흠이 많은 사람이었다.
실수투성이에다
겁도 많고
조금만 힘들어도 포기하고 싶어지는
아주 연약한 사람이었다.
그러나 나는,
내가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더 따뜻하고, 성실하며
쾌활한 사람이었다.
누군가들의 기대의 감옥으로부터 탈출한 나는,
요즘 있는 그대로의 내가
좋다.
그들의 기대만큼
좋은 사람은 아닐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나는
내가 기대하는 것보다는
훨씬 좋은 사람이다.
그래서 나는 내가 좋다.
어쩌면 진정한 변화는
있는 그대로의 나를 용납하는 데서부터
시작되는지도 모른다.
그들의 기대 속 완벽한 나 대신
있는 그대로의 나를 찾아가기로 결정할 때,
우리는
우리 자신을 더 이상 소외시키지 않는다.
그리고 그제야 깨닫는다.
이 삶도,
이미 충분히 괜찮은 삶이었다는 것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