결핍은 나의 힘

by 마리앤느

띵, 메일이 도착했다.

한국어 과외를 받고 싶다는 연락이었다.

대상은 10살 프랑스 여자 아이였다.

조건은 집에 와서 대면으로 수업을 해 줄 것.


다행히 그 친구의 집은

우리 집으로부터 15분 거리였다.

걸어갈 수 있겠다 싶었다.


그러나 그러려면

나는 난생처음 보는 프랑스인의 집을

매주 토요일 아침마다 방문해야 했다.

그리고 그것은 곧

스몰토크가 필요하다는 의미였다.


아... 어떡하지...
조건은 나쁘지 않은데...
할까? 말까? 갈등이 시작되었다.






외국어를 배우며 알게 되었다.

실력이 정말 늘었는지를 확인하는 단 하나의 기준은,

아무 맥락 없는 대화를

부담 없이, 자유롭게 나눌 수 있는가였다.


프랑스어가 늘고는 있지만

나는 여전히

낯선 사람들과 무맥락의 상황 속에서

아무 말이나 즐겁게 주고받아야 하는

스몰토크 같은 대화가 불편했다.


차라리 여러 명의 학생을 대상으로 하는

기관 수업이 나았다.

맥락이 분명했고

역할이 명확했다.


성인 학습자 한 명을 가르치는 것도 괜찮았다.

그에게는 수업으로 나를 보여줄 수 있으니까

다른 부연 설명이 필요하지 않았다.

그러나 집으로 방문하는 개인 과외는

더군다나 어린아이를 가르치는 일은

그 부모와도 교류해야 할 테니...

이제까지와는 다를 게 분명했다.


게다가 주말이었다.

주말만큼은

작은 한국이나 다름없는

집으로 숨고 싶었다.

숨 쉬는 것만큼이나 편안한

한국어를 쓰면서

한숨 돌리고 싶었다.


그러나 어쨌거나

나는 프랑스 사회로 조금씩 진입해 가야 했다.

여기서 계속해서 살아가기 위해서는

이런 기회들을 잡아야만 했다.

그 사실을 알면서도

어쩐지 망설여졌다.


다음에 해도 되지 않을까?
내 불어가 조금 더 늘고 난 다음에
그때 또 기회가 있지 않을까?





그러나 결국 나는 그 수업을 하기로 선택했고

지난 두 달간 토요일 아침마다 그 집을 방문하고 있다.


해야 할 이유는 충분했고

그에 못지않게

하고 싶지 않은 이유도 설득력이 있었다.


그러나 나는 망설임 끝에

그 좋은 기회를 기어이 잡았다.

두려움을 뚫고.


어째서 그럴 수 있었을까?


그건 모두 결핍 때문이었다.


아이들이 한참 크고 있고

하고 싶다는 것도 차츰 늘어갔다.

해가 갈수록 파리의 물가는

한층 더 비싸지고 있었고

남편이 수고해서 벌어오는 재정으로는

네 식구 생활이 풍요롭지만은 않았다.


그리고 이런 상황 속에서

나는 공부를 시작했다.

공부와 일을 병행하는 건 사실상 불가능했고

그나마 한국어 과외만이

시간을 유연하게 쓸 수 있는 유일한 일이었다.



한 달에 고작 몇 백 유로.

누군가에겐 있어도 그만, 없어도 그만일 금액.

하지만 그 적은 수입으로

아이들을 위해 무언가 하나라도

더 해줄 수 있다는 생각이

나를 움직이게 했다.


토요일 아침 늘어지고 싶은 나를 흔들어 깨우고

작은 한국 속에 숨고 싶은 나를

문 밖으로 이끌어 내며

낯선, 그래서 불편한 누군가의 집 앞에서

벨을 누르게 만들었다.


불어를 자유롭게 구사하지 못한다는 두려움을

넘어서서 세상을 향해 나아가게 만든 것은

당위성이나 온당한 이유가 아니었다.


그것은 결핍이었다.



없는 중에 있는 것들을 지켜내고 싶은 마음.
더 채워서 조금이라도 더 나아지길 원하는 마음.
부족함을 부족한 대로 두지 않으려는
극복하려는 마음이
혹은 극복해야 하는 상황이

나를 몰아붙였다.



그렇게 나는 또 하나의 한계를,

내가 만들어두었던 한계를 넘어섰다.


매주 토요일마다

프랑스인의 집을 방문하고

서툰 프랑스어로 한국어를 가르친다.

웃으며 잠깐이나마 아이의 엄마와 대화를 나누고

관계를 만들어 간다.


그리고 비로소 깨닫는다.

별 것 아니네...
이걸 왜 두려워했을까...
해 보니 별 일도 아니구먼....



벌어야만 하는 결핍이

살아내야만 하는 상황이

나로 하여금

전진하도록 만든다.

어제보다 오늘

조금 더 강해지도록 만든다.



결핍은 나를 넓히고

결핍은 나를 밀어붙이며

결핍은 나를 일으킨다.


그렇게 결핍은 나의 힘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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